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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안노 히데아키 × 노비 노비타

2021년 11월 18일 목요일

「타케다의 자장가」 이야기


식모살이 지겨워라 백중날이 지나가면
守りもいやがる 盆から先にゃ
모리모 이야가루 본카라 사키냐

눈이 내리고 추워지니 애는 울고
雪もちらつくし 子も泣くし
유키모 치라츠쿠시 코모 나쿠시

백중이 돌아와도 무엇이 기쁠까
盆がきたとて なにうれしかろ
본가 키타토테 나니우레 시카로

예쁘게 차려입을 오비 하나 없는데
帷子はなし 帯はなし
카타비라와 나시 오비와 나시

애는 자꾸 울어 식모를 괴롭히고
この子よう泣く 守りをばいじる
코노코 요오나쿠 모리오 바이지루

식모는 하루하루 여위어 간다
守りも一日 やせるやら
모리모 이치니치 야세루 야라

빨리 여기를 떠나고파 이 재소 넘어서
はよもいきたや この在所越えて
하요모 이키타야 코노자이쇼 코에테

저쪽에 보이는 것이 부모님 집인데
むこうに見えるは 親のうち
무코오니 미에루와 오야노 우치

 이 우울한 노래 제목은 「타케다의 자장가」(竹田の子守唄). 말이 자장가지 실체는 노동요에 가깝다. 식모가 되어 주인댁 아기를 돌보느라 학교도 못 가고 놀지도 못하는 10대 소녀가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남미에서나, 포크음악은 민중적인 것, 민족적인 것을 파면서 좌익적인 성향을 띠기 마련이다. 이 노래도 60년대 말엽에 일본 포크씬에서 지하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이 노래를 접한 사람 중 한 명이 고토 에츠지로(後藤 悦治郎). 당시 고토는 자기 밴드에서 부를 레퍼토리가 영어곡 뿐인 것에 불만이 많았는데, 관서 "오사카 노음예회"(노음=노동음악)에서 이 곡을 접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고토는 밴드를 발전적 해산하고 새로 밴드를 결성, 이 곡을 데뷔곡으로 내게 된다.

 고토가 새로 결성한 포크밴드 “붉은새”는 이 데뷔곡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69년 11월 야마하 경음악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을 정도. 하지만 당시 포크씬 대부분은, 이 노래를 널리 퍼뜨린 고토 본인마저도, 이 노래가 막연히 민요의 번안곡이라고만 알 뿐, 정확한 유래가 무엇인지, 어느 지방의 민요에서 유래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제목의 “타케다”가 어디냐는 질문에도 몰라서 얼버무렸을 정도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한 고토는 고교동창인 작사가 하시모토 마사키(橋本正樹)를 시켜, 노래의 정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탐색 2개월만에 결정적 제보를 받은 하시모토는 “큰 쐐기가 박힌 것처럼 언동이 멈췄다.”

 이 노래는 원래 1964년 12월, 좌익성향 극단인 “동경예술좌”가 여류소설가 스미이 스에(住井 すゑ)의 대하소설 『다리 없는 강』을 연극으로 올리면서 그 삽입곡으로 들어간 곡이었다. 『다리 없는 강』은 조선인 징용문제, 부락민 차별문제를 다루었는데, 제목 자체가 피차별부락을 “강 너머”, “숲 너머”라고 돌려 부르던 것을 의미한다. 작곡 담당이던 오노에 카츠히코(尾上 和彦)는 부락민 당사자가 아닌 자신은 부락차별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쿄토의 부락해방동맹 합창단을 찾아가서 부락민 합창단원의 모친에게 부락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던 노래를 받아써서 편곡했다. 그게 이 곡이다.

 노래 가사에 있는 재소(在所)라는 말이 관서 지방에서 피차별부락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 하시모토가 받은 결정적 제보였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부잣집에 식모로 팔려온 부락민 소녀의 심정을 노래한 곡이었던 것이다.

 1971년 2월 5일, 「타케다의 자장가」는 싱글컷으로 발매되었고, 해당 싱글은 이후 3년간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가사의 “재소”를 보고 이 노래의 정체를 알아차린 방송국에서 자율규제를 가하기 시작했고, 음반회사도 편곡자 권리가 애매하다는 핑계로 재녹음을 피하게 되었다. 고토는 반항하듯이 하시모토가 발굴한 원곡 가사의 구절을 추가한 버전을 1971년 9월 마이니치방송에서 부르기도 했다.

 이런 방송금지 조치가 부락민에 대한 차별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떠한 동네가 피차별부락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쿄토시 후시미구 타케다의 주민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부락민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부락지명총람사건’이 있었던 것도 정황증거로 제시된다. 그런데 부락해방동맹 쿄토부련에서는 이런 자율규제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이야기가 조금 복잡하다. 정작 후시미구의 “후시미 인권모임(ふしみ人権の集い)”에서는 2001년부터 이 노래를 부락민 인권문제를 상징하는 노래로서 제창하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복잡한 문제다.

 한편, 고토는 나중에 오노에가 노래를 채록받은 피차별부락민 모자를 직접 만났다. 어머니 쪽은 고토가 마이니치방송에서 추가해 부른 가사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해당 가사는 “구세의 무밥, 길상의 나물밥, 그리고 타케다의 비빔밥”이라는 가사였는데, 무와 나물을 방앗간에서 나온 찌꺼기밥에 비벼서 먹는 부락민의 비참한 식생활을 나타낸 가사였다. 당연하게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노래의 전승자인 당신을 작사가로 등록하고 싶다는 고토의 제안도 어머니 쪽은 거부했다.

 아들 쪽이 “용기있게 노래해 주기 바란다. 나도 응원한다”고 말해 주었기에 노래 자체가 폐기되지는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붉은새의 다른 멤버들은 고토의 경솔한 가사 추가가 피차별 당사자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비판했다. 붉은새는 1974년 해산되는데, 이 사건이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겠으나, “노래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고 회고되는 바, 간접적인 원인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미디어의 철저한 자기검열로 「타케다의 자장가」는 공권력의 개입 하나 없이 “사실상의” 방송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대신, 「타케다의 자장가」 싱글의 B면에 실린, 가사 면에서 문제삼을 소지도 없고 곡조도 희망찬 노래는 실컷 틀어 주었다. 이에 따라 대중들에게는 이 노래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토의 의도는 A면의 우울한 「타케다의 자장가」를 먼저 듣고, 희망을 노래하는 B면 곡을 이어 듣는 것이었을 터이다. 밤이 새벽과 아침을 거쳐 낮이 되듯이. 하지만 두 노래는, 밤과 낮은, 이렇게 서로 분리되고 말았다.

 일본 사회의 어둠과 빛을 상징하는 A면과 B면을 가진 싱글 음반.

 그 B면 곡이, 바로 이 곡이다.


지금 나의 소원이
今 私の願い事が
이마 와타시노 네가이고토가

이루어진다면 날개가 갖고 싶어요
かなうならば 翼がほしい
카나우나라바 츠바사가 호시이

내 이 등에 새의 그것처럼
この背中に 鳥のように
코노 세나카니 토리노 요우니

새하얀 날개를 달아주세요
白い翼 つけてください
시로이 츠바사 츠케테 쿠다사이

이 드넓은 하늘을 날개를 펴고서
この大空に 翼をひろげ
코노 오오조라니 츠바사오 히로게

날아가고 싶어요
飛んで行きたいよ
톤데유키타이요

슬픔 한 점 없는 자유로운 하늘로
悲しみのない 自由な空へ
카나시미노 나이 지유우나 소라에

날갯짓 하면서 가고 싶어요
翼 はためかせ 行きたい
츠바사 하타메카세 유키타이

지금 부라던가 명예 같은 건
いま富とか名誉ならば
이마 토미토카 메이요나라바

필요 없지만, 날개가 갖고 싶어요
いらないけど翼がほしい
이라나이케도 츠바사가 호시이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것
子供の時 夢見たこと
코도모노 토키 유메미타 코토

지금도 똑같은 꿈을 꾸고 있어요
今も同じ夢に見ている
이마모 오나지 유메니 미테이루

이 드넓은 하늘을 날개를 펴고서
この大空に 翼をひろげ
코노 오오조라니 츠바사오 히로게

날아가고 싶어요
飛んで行きたいよ
톤데유키타이요

슬픔 한 점 없는 자유로운 하늘로
悲しみのない 自由な空へ
카나시미노 나이 지유우나 소라에

날갯짓 하면서 가고 싶어요
翼 はためかせ 行きたい
츠바사 하타메카세 유키타이

 「날개를 주세요」(翼をください)는 이런 의미심장한 역사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 곡은 일본의 어둠과 인위적으로 분리되어 버린 일본의 빛을 상징하는 노래다.

 ……「날개를 주세요」에 「타케다의 자장가」라는 다크사이드가 있다는 이야기, 혹은 「날개를 주세요」가 오히려 「타케다의 자장가」의 브라이트사이드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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