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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안노 히데아키 × 노비 노비타

2021년 12월 8일 수요일

『대담의 대담에 의한 대담을 위한 보완』

본 대담은 『신지의 신지에 의한 신지를 위한 보완』 시리즈의 후일담입니다.
스포일러 등이 있으니 반드시 본편을 먼저 읽어 주세요.

Seonghwa   이번에 『자양화 유니버스』를 한국어로 완역하게 되어, 저자이신 드래곤플라이 선생께 기념 대담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기꺼이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간단히 자기소개부터?

1984년 1월호 『아니메디아』
Dragonfly   야마구치현 우베시 출신의 일본의 한계 오타쿠입니다. 서점에서 본 애니잡지 표지에 첫눈에 반해 애니 오타쿠가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에반게리온』과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와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2차창작 대표작으로 【신지의 신지에 의한 신지를 위한 보완】 시리즈(자양화 유니버스)가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안노 감독과 동향이라는 것입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_^;)

  저는 한국의 서울시에 살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은 당연히 『에반게리온』, 그리고 『슬레이어즈』와 『월희』와 『하늘의 혈맥』. 소설가는 마츠모토 세이초를 좋아합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방금 전에 『구극³』이 예정된 시각에 맞추어 업로드되었습니다만, 정확히 오늘 업로드하기 위해, 그 전의 『초호기³』을 조금 무리해서 하루 4화씩 업로드하는 일정으로 달렸습니다. 지금 이 대담을 진행하는 오늘은, 다름아닌 아스카=미야무라씨의 탄신일이니까요. 뜻깊은 날입니다.

  그렇네요. 트위터에서 관측하고 있는 것만 봐도, 준비로 난리가 난 모습입니다. (^_^;)

  그리고, 이 대담을 정리해서 업로드하는 것은 미사토씨=미츠이시씨의 탄신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이 『자양화』 시리즈의 시작이 결국 『신지³』이었으니까, 의미있는 수미상관 아니겠습니까?

  그렇네요. 어울리는 날짜라고 생각합니다.

  드래곤플라이 선생께도 당연히 그러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정말로 뜻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에바』와 그 캐릭터들이 제게 버팀목이 되어주었거든요. 그리고, 그 추체험의 한 완결편이 된 것이, 드래곤플라이 선생의 『자양화 유니버스』였습니다.

  흠흠. 당시 에바 팬픽은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졸작에까지 이르는 것,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군요.

  그래서, 다소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직접 이 시리즈를 한국어로 번역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시점(10년 전 2011년)에서 일본어는 어느 정도 공부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처음 번역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문외한이었네요. 한자는 자격증이 있을 정도로 조금 알았습니다만, 일본어의 문법구조라던지 조사 같은 것을 전혀 몰랐고, 문장 하나하나를 사전에서 찾아가면서 해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도중에 도망쳐 버려서 꽤 오래 걸리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 점은, 실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셨나요? “도망치면 안 돼”라는 것일까요? (웃음)

  거기서 무려 변역을 결의한다. 그런 결의가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럽네요. 역시, 도망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 리얼에서 힘든 시기가 아닐까. 그것을 극복하면 돌아올 것이라고 기다렸습니다. 에바인은 기다림에 익숙하니까. (웃음)

  그래서, 이 작품군의 한국어 번역이 원작의 완결 이후 14년만에 이루어진 것도 참 묘하네요.

  주박이네요.

  주박이라던가, 신극장판이라던가. 이런 이야기도 뒤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자양화 유니버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그럽시다.

  제가 힘들었던 시절의 에바 추체험의 정화는 2단계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1단계는 애니메이션에서 저와 같다고 생각되는 캐릭터들을 발견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는 단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까지 얻지는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주박에 걸리는 단계였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제2단계는 그 주박을 풀어解い가는 과정, 즉 “해석解釈”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단계에서 하나의 매듭을 제공한 것이 제게는 『자양화 유니버스』였습니다. 어떻게 표현하자면, 제게 맞는 팬픽을 모색하는 단계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여러가지로 섭렵해 보시고?

  네. 하지만 그 당시 저는 로맨스나 커플링 중심의 팬픽 생태계에서는 길을 찾지 못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작품들 가운데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것들도 많이 있었지만, 제가 “에바”에서 찾고자 하는 추체험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역행물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고요. 대부분의 경우, 역행물은 막강한 지식과 능력을 얻은 주인공(대개 신지)이 사랑하는 특정한 대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식이었는데, 이것이 저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당시에는 구체적인 이유를 몰랐습니다. 좀 더 공부를 해서 언어를 얻은 지금은 그게 뭔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요. 그것은 잠시 뒤 이야기하기로 하고.
아무튼 새로운 무언가를 원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 만났던 것이 『자양화 유니버스』였고, 저의 에바 팬픽 편력은 여기서 일단 멈출 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뭐, 졸작은 난숙爛熟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니까, 종착점으로는 그럴싸하군요.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요, 글이라는 것은 말입니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합디다. 대학원에서 교수님들이 요구하시는 부분인데, 논문이라는 것은 무엇이든 좋으니 새로운 것을 보여야 한다고. 그것이 논픽션이라면 논문이고, 픽션이면 소설이 되겠지만요. 가치 있는 글이란 novel한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돌이켜 보면, 『자양화』는 정말 여러가지로 새로웠습니다. 종래에 보던 다른 팬픽들과 달랐던 것은 물론이고, 작품군에 속하는 작품들끼리도 서로 똑같은 점이 하나도 없었지요. 라이너노츠를 보면 드래곤플라이 선생이 의식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잘 몰랐지만, 새로움이 미덕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그것을 읽으면, 분명히 그것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작품을 거론하며 이야기하겠지만, 평행우주마다 인물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결말도, 포지션도, 과정도 모두 다르지요. “행복해진다”는 당연한 목표를 공유할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군의 최대의 미덕이겠네요.

  확실히, 에바 팬픽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에바에 가장 부족한 것은 “사랑”이라고 공언했을 정도니까요.
저와 에바 팬픽의 만남은 『체험에바』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 자체는 찬반양론이 갈리는 문제작이지만, 자극적이기도 해서 2차창작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던 저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는 팬픽을 섭렵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에바 팬픽계는 제2세대 시기였고, 네르프 안티, 미사토 헤이트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읽던 도중 “에바는 이런 게 아니잖아! 미사토도 이렇지 않잖아!”라는 기분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라이너노츠에 쓴 것처럼 신지가 역행빙의하는 아이디어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미사토에게 빙의한다는 아이디어로까지 발전하자, “이것으로 안티네르프, 미사토 헤이트에 대항할 수 있겠다!” 싶었고.

  마치 반박논문을 쓰는 연구자와 같은 마음가짐이었군요.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하는 부분도 그렇고, 선생의 글은 역사학적 연구 같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안티물, 헤이트물이 만연한 시대였기에 안티테제가 나올 차례가 되었다고 판단한 면도 있었고요. 팬픽에는 칠드런의 시점이 많았으니까, 어덜트의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안티테제로서 성립하겠다. 라고 판단한 것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에바 팬픽계가 안티와 헤이트의 흐름으로 종말로 치닫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팬픽계가 다시 활성화될지도?”라는 생각으로 시도했습니다.

  그 원대한 꿈은 어느 정도 이루셨습니까?

  분명하게 안티물, 헤이트물 신작이 적어졌고, 사랑을 표방하는 작품이 늘어났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네기마』로 흘러갔던 독자들이 돌아왔던 것 같고요.

  우와, 언제적 『네기마』

  2006년 당시 에바 팬픽계는 분명히 쇠퇴기로 들어섰고, 『네기마』로 유출이 발생하고 있었어요. 먼저 떠내려간 『고스트스위퍼 미카미』의 상황을 봐도, 안티나 헤이트가 유행하면 그 장르는 쇠퇴기인 것입니다.

  확실히, 『자양화』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넘친다는 부분이지요.

  제가 읽은 수많은 안티물, 헤이트물에 대한 반동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웃음)

  저 역시 읽으면서 겐도 이외의 모든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고, 직접 번역까지 하면서 그것이 굳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겐도는 좋아할 수가 없네요…….

  겐도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제 힘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웃음)

  샤아의 최악의 면을 배양하면 겐도가 되지 않을까.

  운석을 떨어뜨리는지, 임팩트를 일으키는지가 차이일 뿐…….

  신지가 “어른이 되어라” 같은 말을 겐도에게 들어서야, 우스울 뿐이잖아요? 『아스카³』에서 앙제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지요. 확실히 옹호는 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각설하고, 사랑과 이해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어느 하나 같지 않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계기는 항상 작은 온기 한 톨. 그것이 『자양화』의 패턴이 아니었을까요. 굳이 말하자면.

  그것도 그렇네요. 『에바』 원작에 부족한 것이 “사랑과 이해”니까.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이 커플링 같은 즉물적인 차원의 것이 아님이 좋았습니다. 한국어로 번역해서 소개할 때, 독자들로부터 “이 작품의 커플링은 뭐냐, LAS냐 LRS냐” 설명을 요구받았을 때, 대답할 수 없어서 곤란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이 작품군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칠드런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연애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커플링적인 방향성은 애초부터 없었지요.

  저는 어리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칠드런을 포함한 그들의 상처가 너무 깊고 복잡해서, 커플링 같은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커플링 우선시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제가 아스카의 진짜 첫사랑은 카지가 아니고 미사토였다는 신이론을 개발해 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아스카가 미사토와 사랑의 결실을 맺으면 행복해졌음에 틀림없다, 그런 주장이 아니거든요.

  아, 확실히 그렇기도 하겠네요. 저는 아무튼 칠드런에게는 부모의 사랑이 결여되어 있고, 그 부분을 “어리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칠드런 뿐 아니라 29세의 삼남매도 “어리다”고 말해야겠네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칠드런만큼은 아니지만, 특히 리츠코 경우에는 미사토에게 카운셀링을 받게 만들었을 정도니까요.

  카지도 눈치채기는 힘들지만, 상당히 뒤틀려 있지요. 특히 이 녀석이 아스카에게 한 짓은 굉장히 끔찍한데도, 결함이 눈에 띄는 미사토와 리츠코에 비해 성숙한 어른이라고 오해되곤 합니다.

  그렇네요. 원작에서도 이야기되었지만 “자기모순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것 같습니다.

  아스카는 사랑하면 증오하는 광기의 파토스의 소유자. 그래서 아스카가 사실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분명한 인물이, 절대 증오하지 않은 카지입니다. 남들과 자기자신을 속이기 위한 연극적인 호감이죠.
카지가 정말 성숙한 어른이었다면 아스카의 파괴적인 성향을 알고, 그것을 왜 자기에게만 드러내지 않는지까지 알고, 아스카를 적절하게 유도했어야 하는데, 이 놈은 아스카에게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했어요. 자신이 동질감을 느꼈고, 스파이로서 이용가치도 있었던 신지에 대한 태도와 비교하면 확연하지요.

  과연 그렇네요.

  『초호기³』에서의 LAR적인 분위기도 저는 그래서 쉽게 납득했습니다. 아스카가 누구에게 정말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려면, 누구를 증오하는지 보아야 하니까요.
미사토, 신지, 아야나미,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어머니.

  확실히 그렇지요. 졸작의 어느 작품에서도 아스카는 동생적인 존재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증오 없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주고 싶어서 그랬을지도요.

  그래서 최초의 작품인 『신지³』의 이야기입니다만, 하지만 솔직히 이 작품에 대해서는 저는 별로 첨언할 것이 없는 것이, 너무 잘 쓰셨으니까요. 절대로 번역한지 너무 오래되어서 할 말이 안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고, 그러세요.

  결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요전에 프로 소설가인 제 친구에게 보여주고 평가를 받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잘 썼다” 정도가 아니라, “이 팬픽을 보기 위해 『에반게리온』을 보기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과분한 평가라고 생각했지만, 기뻤습니다.

  역시 프로는 프로입니다. 이 작품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설명하다니.
왜 이 작품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는지,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그래서 구체적으로 기획・집필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셨나요? 연재된 텀을 보면, 미리 완결까지 다 쓴 뒤 회차별로 공개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2006년 4월 말경부터 플롯 작성에 들어가서, 집필을 마친 것이 6월 말이었지요. 실질 2개월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엄청나게 빠르게 쓰셨네요.

  본격적으로 팬픽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때부터 붓은 빨랐던 것 같습니다.

  부러워라.

  실은 몰래 근무중에도 쓰고 했습니다. (^_^;)

  저도 일단은 픽션라이터인데, 빠르게 쓰는 것과 잘 쓰는 것 둘 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네요. 그래서 저는 거의 포기하고, 젊은 친구들에게 아이디어와 방향성만 제공하고 대필을 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명의는 그 친구들 명의로요. 언젠가 제 명의의 글도 써서 보여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쉽지가 않네요.

  그렇군요. 후진 육성에 힘을 쏟고 계시다니. 그것은 대단하네요.

  아니, 후진이니 뭐니 할 거창한 것은 아니고. 그보다도 제가 운영자의 입장이니까요.

  운영도 큰일이지요.

  직접 글을 쓰는 사람들에 비할까요?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들은 정말 경외의 대상입니다. 드래곤플라이 선생은 그 중에서도 상위 티어고요.

  부끄럽네요.

  그래서, 프로소설가의 인정을 받을 정도이고, 스스로도 대표작이라고 생각하시는 『신지³』에 대한 직접총괄은 어떻습니까?

  뭔가 이미 상당히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한데요…….

  지금까지는 계기라던가, 역사적 배경이라던가, 좀 외부적인 이야기였으니까요. 작품 자체의 내용과 성과 같은 내부적인 측면에서요.

  굳이 꼽아 보자면, 신지가 미사토에게 빙의한다는 아이디어가 내려온 시접에서, 『에바』 원작을 더 깊게 파헤치는 『해체신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확실히, 원작의 대사가 그대로 사용되었고, 원작에 대한 해부의 측면이 있지요. 명대사 뿐 아니라 극히 사소한, 지나가는 대사들조차도 원작을 전거로 한다는 점은 놀라웠씁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원작의 대사를 인용한 패러디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같은 대사라도 다른 맥락에 위치시키게 되면서 전혀 다른 느낌과 고찰을 제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네요. 원작의 대사를 엄격히 사용하면서, 그러면서도 의미는 다르게 하여 이야기성을 바꾼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밈처럼 무지성적으로 대사를 인용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지요. 원작에 대한 집요한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작과 그림은 같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를 목표로 했던 바 있습니다.

  “아프지? 이 봐, 뺨이 아프지?”라던가. 특히 이 장면은 미사토가 오퍼레이터를 괴롭히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사실 원작에서는 아야나미가 죽는 심각한 장면의 대사 아닙니까? (웃음)

  그렇네요. (웃음) 팬픽은 원작을 철저히 빨아먹는 행위니까, 사소한 부분들에도 그렇게 신경을 썼습니다.

  번역된 글에 삽화를 넣기 위해 애니를 뒤지다 처음 발견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평상심” 셔츠라던가, 그리고 이스라펠전에서 칠드런이 패배한 이유.

  『아스카³』 제칠화의 “이 때의 손맛, 잘 기억하고 있어. 아니, 손맛이 없었던 걸…, 잘 기억하는 거려나” 군요.

이스라펠전의 진실
  글레이브 날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분열하고 있더라고요. 칼에 맞고 갈라진 뒤 대응하기 위해 분열한 것이 아니고, 이호기가 앞에 들이닥친 시점에서 이미 대응을 위해 분열하고 있었고 이호기는 헛칼질을 했다는 것. 저는 이번에 삽화를 넣으려고 프레임 단위로 TVA를 보면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대발견 하셨네요!

  이것은 프레임 단위로 돌려보지 않으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데, 드래곤플라이 선생이 얼마나 철저하게 원작을 연구했는지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랬지요.

  그전까지는 번역은 했지만 그 의미를 진짜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탄스러울 따름. 솔직히 말씀해 주시죠. 이런 연구작업에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을 쏟으신 것입니까?

  실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에바 팬픽을 만나고, 『에바』를 재발견하고부터 반년 정도…….

  반년이면 빠르게 쓴 석사논문이 하나 나올 법한 시간이네요.

  그 반 년도 에바 팬픽을 섭렵하고 TVA를 시청하고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3분할입니다.

  십수년을 봐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반년의 삼분할이라도 포착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합니다. “재능이라는 거요, 당신의.”

  “좋아하면 잘 하게 된다”는 걸까요.

  이런 부분이 철저하기 때문에, 가끔은 이것이 원작을 고증한 연구결과인지, 선생이 독자적으로 추가한 해석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습니다. 『신지³NC』의 이야기이지만, BOA에 관한 질문이라던가.

  15년 전 이야기이므로 확실하지 않지만, 고증의 결과도, 독자적 해석도 모두 있으니까요.

  원작에서 미사토가 아스카에게 라벤더 향수를 빌려주지 않은 것이, 세컨드 임팩트 이후 생화향수가 귀중해졌기 때문이었다는 해석도 좋았습니다.

  아아, 그 해석은 저도 마음에 듭니다.

  그것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 고증을 근거로 독자적 해석을 제시하는 부분 아닐까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순간이니까요.

  그렇네요. 그게 팬픽의 묘미지요.

  AT필드도 이 작품군에서는 매우 애용되는데요. AT필드가 만능이냐고 불만을 가진 독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있었습니다. 도라에몽의 사차원 주머니냐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도들의 온갖 기묘한 묘기가 모두 AT필드에 기반한 것이라면, 에바라고 못 할 것 없지 않은가? 하고 납득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AT필드는 “마음의 벽”이니까요. “일체유심조”입니다.

  이네요.

  그렇네요. AT필드 만능도 “사도의 능력은 AT필드”+“AT필드는 마음의 벽” 이 두 가지의 조합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oO(사도의 능력을 모두 가진 슈퍼신지에 비하면 이건 양반이지……)

  이것을 비판하려면 “그렇게 당연한 것이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밖에 논리를 세울 수 없는데, 이것은 솔직히 빈약하지요.
AT필드를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활용하는 팬픽이 달리 유례가 있었던가요? 저는 옛날에 읽기로는 이 작품군 외에 본 기억이 없습니다.

  솔직히,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여러가지로 유일하고 특별한 작품군이네요. 정말이지. 제 인생에도 그랬고, 선생의 라이터 경력에서도 그렇고, 일본의 에바 팬픽계에서도 그렇고.

  에바 팬픽 세계의 난숙한 결과물이라는 느낌입니다. (웃음)

  전체적으로 훌륭한 이 작품이지만, 계속 멋있어지기를 거듭하는 부분이 제십삼화 이후라고 생각합니다만.
제십삼화에서 사도전 이후 미사토와 신지의 대화,
제십사화에서 기량을 최대로 발휘해서 완벽한 팀플레이로 제루엘을 쓰러뜨린 칠드런,
제십오화에서 신지(빙의자)와 미사토의 대화,
제십칠화에서의 “나는 당신의 인형이 아니야,” “안 돼. 미사토씨가 부탁하고 있어.”
이것들이 제가 꼽는 이 작품의 4대 명장면, 아니 『자양화』 전체의 4대 명장면입니다만. 이런 명장면이 매 회차, 최종화 직전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몰아치는 부분 말입니다. 후반에서 이렇게 쉴새없이 감정적으로 독자를 타격하는 것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 부분을 다시 읽으면 감정이 치밀거든요.

  아아, 확실히 플롯은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난산이었던 부분들 뿐이군요. (^_^;)
이 후반에 몰아치는 구성은 『에바』 원작, 더 나아가서 『이데온』을 의식하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이데온』이 안노 감독에게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은 명시되어 있기에, 그 구조를 의식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뚝 잘라 먹으면서 이야기를 압축하고 극장판으로 마무리라는 구조입니다.
이것을 의식해서 뒤로 갈수록 문장량을 늘렸습니다. 물론 명장면이 될 수 있는 장면도 후반에 집중시켰습니다. 전반은 신지가 미사토에게 빙의했다는 데오치出オチ로 끌고 갔으니까요.

  이 “데오치”라는 말, 사전적인 의미는 알겠습니다만, 한국어로 옮기기가 힘드네요. 어떤 의도로 사용하신 것인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그렇겠네요. 신지가 미사토에게 들린다는 장치를 처음부터 부딪으면서, “이것은 지금까지의 팬픽과는 다르다!”는 기대감을 갖고 무슨 이야기인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회 정도 읽고 나면, 각각 익숙해져서 전체 이야기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노림수인 것이지요.

  아아, 과연. “새로움”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미끼? 그렇다면, 최초의 독자들 가운데는 카지와의 “어른의 키스와 그 다음”을 기대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있으셨겠지요. 카지와의 관계를 기대한 사람들. (웃음)

  이 작품에서의 미사토와 카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만한 화제이지만 우선은, 쉴새없이 몰아치는 명장면이 후반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전반이 루즈하다는 느낌도 없어요. 미사토가 칠드런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들만의 행복한 가족놀이가 그려지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요. 후반에 질주해야 하기 때문에, 전반은 더욱 차분하게 칠드런들과의 관계육성에 주력했습니다. 데오치의 위력이 있는 동안 치고 나가야 하니까, 페이스 배분은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카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요전에 『신지³NC』 번역 과정에서 드렸던 질문을 다시 거론할 것 같지만요. 『신지³NC』에서 신지=유이는 저번 우주에서 자신이 가짜 미사토였기에 카지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랬지요.

  제가 읽고 번역하면서, 그리고 선생의 확인도 받은 것이지만, 『신지³』우주의 카지는 그 우주의 미사토(내용물은 신지이지만)를 사랑한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신지는 그것이 자신이 아는, 원작의 카지와 미사토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틀리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만 것이네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지요. 대학 시절 미사토(신지)는 루트가 틀려버리는 것을 두려워했고요. 미사토가 서서히 카지에게 대담해지는 것도 읽을만한 부분 아닐까나요.

  네르프 시절에도 대학 시절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착각하는 것이 답답하고 둔감한 부분입니다만. 신지다워서 그런 부분도 미숙하고 귀엽지요.

  그렇지요. 외견 및 행동과 내용물의 갭도 세일즈포인트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은 이 시리즈에서 빙의된 주인공을 다룰 때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셨습니까? 예컨대 신지가 빙의된 미사토를 다룰 때, “미사토”로서 다룬 측면이 더 컸느냐, “신지”로 다룬 측면이 더 컸느냐는 것인데요.

  미사토의 육체에 빙의한 신지라는 것이니, 신지로서 다룬 부분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사토의 뇌구조에 끌려다니다 보니 울보가 되어 버린 측면도 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바뀐 하드웨어라는 점은 상당히 의식했습니다.

  결국 어느 한 쪽이라기보다, 빙의하고 있는 동안에는 혼과 육체의 영향이 결합된 제3의 존재 같은 느낌이군요?

  그렇네요. 인간이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바퀴로 서는 것이고, 어느 한쪽만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어로 설명할 때 “빙사토” 같은 표현을 쓰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1인칭 서술에 있어서도 말투가 바뀌는 게 있네요. 미사토편 최종화에서 원래 세계로 돌아온 후, 갑자기 서술자의 말투가 시니컬한 소년의 말투로 바뀌어 버린다던가 하는. 빙의 대상자의 뇌의 영향을 받는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납득이 됩니다. 그런 식의 발투의 변화도 다 의식하신 거지요?

  그렇지요. 집필의 첫 단계에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아서, 프롤로그의 문장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2~3화까지 투고한 뒤에, 이건 아니다 싶어서 황급히 고쳐썼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어는 사람에 따라 말투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게 참 신기해요. 물론 한국어도 말투의 개인차가 없는 건 아닌데, 일본어는 뭐랄까, 말투의 타입이 정형화되어 있어서 그 변화를 캐치하기 쉽다는 느낌이랄까.

  이것은 미공개 설정이지만요, 신지의 혼은 발할라의 릴리스레이가 유지하고 있고, 그 의식만 현지의 미사토에게 투사한 것입니다. 뇌기능적으로는 미사토에게 하자가 없고, 미사토가 신지에게 미치는 정신적 영향도 상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정신오염사도 전투에서 미사토 본인과의 대화겠지요.

  무언가 닫히는 소리가 난다고 했었지요?

  네. 마음의 문의 소리(신지의 심상)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순히 미사토의 마음이라던가 뇌리의 방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사토가 다시 마음을 닫은 것이 신지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또는 릴리스레이가 그렇게 들리도록 변환했다. 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빙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설정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다. 그런 것이네요.

  그렇지요. 그 부분을 설명하려면 릴리스레이의 시점이 필요하고, 그것은 전지적 시점으로도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사람과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는 메시지가 엉망이 되니까,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슬레이어즈』 신장판 제3권 후기
  얼마 전에 『슬레이어즈』 신장판 박스세트를 샀는데요, 제3권 후기에서 칸자카 하지메 선생이 그러더라고요. “여백 없는 세계는 액자에 갇혀버린다”고.
저는 한국어 역본으로 읽었으니 정확한 일본어 표현은 모르겠습니다만, 요지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리나의 고향의 언니라던가, 가우리의 할머니라던가, 절대 등장할 예정 없다고.

  과연.

  어디까지를 여백으로 남겨야 멋있을지 전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유능한 라이터의 조건 같네요.

  그 부분은 작품 주제와의 균형으로 자연스레 태어난 부분이라, 제 공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네요.

  너무 겸손하십니다.

  일본인이니까…….

  혼네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웃음)

  (웃음)

잔혹한 천사의 테제
covered by 정여진
  그러면 『신지³NC』 이야기로 슬슬 옮길까 싶습니다만, 그 전에 노래 한 곡 들으실까요? 정여진 선생님이라고, 한국의 호리에 미츠코 같은 분이 계신데, 그분이 『테제』의 번안곡을 부르셨습니다. 『신지³NC』제입사화 번역 말미에 삽입된 "Life Itself Will Let You Know"의 한국어 번안곡이, 이 분이 9세 때 부르신 곡입니다. 원곡은 아버지와의 듀엣이지만, 소개한 가사는 어머니로 슬쩍 바꾸었고. (웃음)
「내가 쓰러지면 그냥 놔두세요.
­ 나도 내 힘으로 일어서야죠」
『신지³NC』에서의 이카리 모자의 관계를 정확히 나타내는 가사였다고 생각해서 넣어 본 것입니다.

  과연. 딱 맞네요.

  작품군 가운데서 『신지³NC』는 가장 이질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회차 개수부터 압박적이네요. 그리고 사용된 사료史料가 애니메이션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 직접제어의 개념 같은 독창적인 해석이 가장 많이 제시된 점이 떠오릅니다.

  그렇지요. 『강철의 걸프렌드』 게임이라던가.

  게임 뿐만이 아니고, 사다모토의 만화도 있네요. 코어의 모친의 혼 외에, 에바 자체의 혼이라는 개념.

  라이너노츠에서도 썼다시피, 『신지³』에서 펼쳐보지 못한 고찰을 가득 담았으니까요. 만화는 당시로서 연재의 행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참고한 정도였습니다만…….

  그런데 사실 사다모토의 만화는 해석적인 면에서 원작의 저변을 넓히기는 커녕 오히려 좁히는 측면이 있지요. 그런데 이런 물건에서도 멋진 고찰을 이끌어냈다는 게 참 훌륭합니다. 그야말로 “타산지석 가이공옥”이랄까요.

  그런 부분은 작가마다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어쨌든 그런 사정으로부터, 『신지³NC』는 다른 세 작품과 비교해서 질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력이지만. 다르다異になる는 것은 새롭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역시 읽는 사람을 가리는 작품 같습니다.

  일단 빙의 대상이 유이라는 부분부터 신지 입장에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네요. 미사토에게 빙의하는 것도 다른 팬픽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지만, 유이는 정말 어떤 임계를 넘은 느낌이랄지. (웃음) 가장 증오하는 대상과 부부가 되고, 자기 자신의 어머니가 된다니. 여기까지만 읽어도 벌써 어질어질하거든요.

  라이너노츠에도 썼지만, 빙의했을 때 문제가 없고 작품적으로 재미있는 캐릭터로 미사토와 유이가 2대 거두였으니까요. 원래는 『신지³』을 웃기게 마무리하는 펀치라인으로 쓰려던 일회용 소재이기도 했고.

  육아의 상세한 묘사라던지, “어머니됨”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도 잘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찌질한 남자들이 어머니를 찾는 것은 샤아 이래로 전통이잖아요. 게다가 현실에서도 최근 오타쿠들은 캐릭터에게 “마망”을 요구하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자기자신이 “어머니”가 되는 것이 모든 해결의 시작이라는 것이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러한 퇴행성과는 정반대의 벡터랄까요.

  그렇네요. 무언가를 추체험함으로써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이 시리즈의 보편적 테마입니다.

  이 경우는 추체험이 아니라 직접체험입니다만. (웃음) 애까지 낳고 말이야.

  거기가 바로, 독자를 가리는 부분이랄지. (^_^;)

  릴리스레이, 사실 성격 엄청 비뚤어졌고.

  응. 비뚤어졌지.

  그래서 신지는 이 우주에서 여러 사람의 어머니가 되네요. 이 우주의 이카리 신지를 시작으로, 이카리 레이, 초호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스카까지.

  그렇네요.

  사실 “아스카의 보완”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스카³』보다도 『신지³NC』쪽이 더 명시적으로 보이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이 특정 우주의 아스카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부분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거니까요.

  이따 이야기하겠지만, 『아스카³』 쪽이 오히려 “신지의 보완” 같고.

  듣고 보니 그렇네요.

  세계의 진실과 권력에 가장 가까운 유이의 위치가 되어서도, 아스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빡세게 노력해야 한다는 부분. 결국 『에바』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는 아스카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극장판의 파탄도 이 부근에 있는 것 같고.

  그렇네요. 그만큼 원작의 전개를 뒤집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저의 아스카에 대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플롯이 중지된 킬편에서는 더 쉽게 아스카의 보완을 쓸 수 있기도 했고요.

  그것이 또 너무 쉬워지면 서사로서의 가치가 없어지지요. 폐기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킬편은 쓰지 않았습니다.

  킬편은 통째로 여백이 되는 편이 세계 전체의 그림에 좋은 것.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흔해빠진 슈퍼신지물이 슈퍼아스카물로 바뀔 뿐이고.

  그렇지요.

  아무튼, 에바 팬픽계에서 “어머니됨”을 이렇게 집요하게 다룬 작품이 있던가요? 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연구와 가정 사이에서 가정을 선택해야 했던 유이의 사정이라던지, 육아의 다양한 노동과 고난이라던지, 조금 과장하면 페미니즘 문학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아요. 그것이 정말 맛있는 부분입니다만. (웃음)

  그런 부분들이, 일하는 여성을 묘사할 때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더군요.

  저는 『에바』 애니메이션이 신지의 이야기인 동시에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또 이 애니메이션의 강력한 장점이 후자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신지³NC』는 그 장점을 아주 극대화한 작품이 아닌가.

  그렇네요. 『에바』의 최초 기획에서는 주인공도 여자애였고, 『톱을 노려라!』나 『나디아』 같은 구성이 되었다고 하니까요.

  유이의 생존에 의해서 겐도는 “유이의 남편”으로 위치가 축소・주변화되고, 나오코・리츠코・미사토・아스카 등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유이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발단이 되니까. 이 패턴은 『초호기³』에서 빙의레이와 리츠코의 관계로 다시 변주되고.

  그렇군요. 겐도의 주변화라……. (웃음)

  결국 겐도라는 폭력적인 가부장을 멀리 치우는 것이 여성의, 그리고 소년의 구제에 필요하다는 것이네요.

  일본에는 “바깥양반이란 건강하고 집에 없는 게 좋다”는 말이 있는데, (웃음) 아버지란 그 정도의 존재감이 딱 좋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겐도를 치우는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여성들이라는 것도 좋고. 어쩌면 이것이 『자양화』에서 반복되는(원작에 대한 개입이 가장 적은 『아스카³』는 제외) 또 하나의 패턴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들이 아버지를 치우면 그것은 단지 새로운 가부장으로의 교체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그냥 오이디푸스가 되어 버릴 테니까요.

  원작마저도, 그리고 특히 신극장판이 이 함정에 치명적으로 빠지고 마는데, 『자양화』에서는 “여성에게 빙의했다”는 것으로 이 함정을 슬기롭게 회피했다고 생각됩니다.

  안노 감독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전혀 없지요. 그런 부분이 『에바』에도 나타나고 있는 듯한……. 『자양화 유니버스』는 TS물(trans-standing-position)이기도 하니까, 그 입장에서의 시점이라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거겠죠.

  그러고 보니, 이 팬픽에서 오리지널 신지는 이제 여성으로 살아간 기간이 훨씬 길지 않나요? 미사토로서 15년, 유이로서 11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웃음).

  신지야 고생이 많다…….

  신지가 고생할수록 자양화는 예쁘게 피어났답니다 (웃음).

프로토타입 아스카
  애니메이션의 초기 기획에서는 주인공이 여자였다고 아까 말씀하셨는데, 그 초기 주인공 디자인이 아스카였죠. 아무튼 그 부근에 원작의 강점이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안노 감독이 처음에는 메카 『세일러문』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다던가. 물론 안노가 페미니스트였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작 애니메이션은 폭력적인 가부장(겐도)과 무책임한 쾌남(카지)을 확실히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지요.

  안노 감독은 『세일러문』에서의 성공체험을 재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여성이 아니면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생기는 긴장과,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다루려고 했던 부분이 원작 애니메이션의 미덕이었달까요. 원작을 보면 신지의 이야기는 하나도 어렵지 않지요. 자신을 긍정하고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 풍부한 해석의 여지는 여성 캐릭터들의 주변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요.

  그리고, 이 긴장을 다루는 것을 결국 포기해 버린 것이 신극장판의 가장 끔찍한 파탄이 아니었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연. “아득한 저 편의 존재”를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역시 카지는 어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확실히 그래요.

  피안으로 도망가 버리려는 카지를 삶의 세계에 붙들어놓은 것이 『자양화』에서 카지의 보완. 어느 측면에서는 메타적으로 안노 감독에 대한 보완이기도 하겠네요. 벌써 늦어 버렸지만. 안노는 그 피안으로의 도망을 “주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착각했고. 그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실패이고 도망이니까.

  “도망치면 안 돼” 입니까? 안노감독의 보완은 모요코 여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나.

  사실 『해피 마니아』의 모요코씨가 옆에 붙어 있는데도 신극장판에서 여성 캐릭터의 묘사가 그렇게 후퇴했다는 것이 괴담 수준이지요. 안노 감독은 모요코씨에게서 어떠한 답을 얻어서 그것을 작품에 반영할 기회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못 했다고 봐야하지 않을지. 『에바』 자체가 도망쳐야 할 숙제가 되어버렸으니까. 츠루마키 감독과 마에다 감독만 불쌍합니다.

  신극에서 느껴지는 근질근질한 느낌은 그 부분이었나……. 뭐랄까, 납득할 수 없어서 어이없다고 할까, 가슴에 개운치 못하게 맺히는 것이 있다고나 할까…….

  아, 그렇지요. 저도 무척 번민했습니다. 그래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자양화』의 완역에 재도전했고, 그 덕분에 이러한 답을 얻었네요.

  언어화하기 힘든 불쾌감이 있었지요. 불쾌감이랄지 소양감이랄지

  이 작품군의 한국어 번역이 한국의 『에바』팬의 마음에도 촛불을 옮겨붙여, 그 불쾌감을 해소하는 데 일조했으면 좋겠네요. 하여간 신극장판 욕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어서. 이 부근은 『구극³』의 순서로 넘기고, 일단 『신지³NC』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내용적으로는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기교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는데요. 2004년의 유이에게 빙의했다면 2015년까지 뭘 하면서 보내냐, 이 부분에 대해서 특히 고민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난산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지³』에서 겨우 확보한 독자들이 다 도망갈 내용이었으니까요. 최초 플롯에서는 다시 엔트리 실험을 한 유이는 거기서 레이를 임신중인 것을 알게 되어서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요. 그런데 거기서 레이를 사쿠라와 동급생으로 만들면 재미있을지도? 라는 계시가 내려와서. 원래는 겐도와 좀더 거리를 둘 예정이었지만, 레이를 사쿠라와 동갑으로 만들려다 보니 다시 임신출산하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독자가 떠나가는 것을 각오했었습니다.

  신지야 고생이 많다…….

  신지야 미안해…….

  겐도×신지는 진짜 파천황이었을 테니까요.

  겐신 그 자체는 유례가 있지만, 애까지 낳는 것은 그 당시 유례가 없었으니까요.

  아, 유례가 있어요? 이것은 또 놀라운데……. 일본의 검은 안개는 짙고도 깊군요.

  겐신 또는 신겐을 공언하는 팬은 꽤 관측되어 왔습니다.
실은 이거, 릴리스레이의 보완이거든요. 제 해석으로 레이는 태어나지 못한 신지의 여동생이었고, 『신지³NC』에서 보완되는 것입니다.

  아, 그거. 저도 번역하면서 계속 아이가 이상하게 조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것이었군요. 읽으면서 “이거 릴리스가 빙의한 거 아니야?” 이런 생각 하고 그랬거든요.

  실제로 빙의한 것은 아니고, 신지의 여동생으로 태어난 레이를 그 붉은 바다에서 기껍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약하게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반쯤 빙의 정도일까요.

  그것이 릴리스 본인의 보완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릴리스가 되어버린 레이의 보완입니다.

  말하자면 세 번째 레이인가. 아니면 네 번째?

  아마도 세 번째라고 생각해.

  대사. (웃음)

  관측자의 존재가 관찰물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신지³NC』의 이카리 레이는 그런 것입니다. 양자역학이네요. (웃음)

  그러고 보니 유이편에서의 보육소 묘사가 혹시 유토리 교육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미사토편에서도 싱크로율과 하모닉스 경쟁에 대한 비판이 편차치 교육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다는 독자의 소감을 받은 적이 있으시잖아요?

  독자에게 지적받고 알아차렸을 정도니까요. 그 부분은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쓴 것이 아닙니다. (웃음) 다만 굳이 꼽아보자면, 기존의 주입식 교육에 문제가 많지만, 유토리 교육으로 전환하기에는 교육자 측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 아닐까, 그 정도 생각은 있습니다. 그래서야 학생과 교육자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고요.

  한국의 어느 시사 팟캐스트에서 유토리 교육에 대해 소개하면서, “경쟁하지 않는 달리기를 아이들 스스로 했다면 위대했을 텐데, 선생들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는 순간 이상해진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렇지요. 현실의 유토리 교육에는 그런 「일그러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송에서는 과도한 경쟁에 의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교육부터 바꿀 게 아니라, 어른들이 지배하는 사회부터 먼저 바꾸었어야 했다고 분석했는데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상을 바꿔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냐고. 마치 크와트로나 카지 같은. (웃음)

  (대폭소)

  새로운 시대를 만들 책임은, 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른들에게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자양화』의 주인공들이 또 아름답게 빛나는 것 같아요.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신지³』와 『신지³NC』에서 아스카는 미사토와 유이 덕분에 정말로 유능한 파일럿으로 성장하는 데 성공하죠. 특히 『신지³』에서는 “미혹을 버린 아스카는 최강”이랄까. 지휘자로서의 역량까지 개화하고. 그렇게 육성한 것은 신지가 빙의한 미사토고요. 사실 『신지³』에서 미사토가 파일럿들을 포지션별로 육성한 것을 보면 『프린세스 메이커』 같은 것도 떠오르고. (웃음)

  『프린세스 메이커』도 가이낙스였지요?

  그런데 『신지³NC』에서 신지=유이는 아스카가 우수한 파일럿이 되는 것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지요. 아스카가 에바를 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에바를 타지 않는 행복을 찾았으면 한다고 바라는 부분이 있지요.

  『신지³』에서 멋지게 아스카를 에이스 스트라이커로 키워낸 것과 비교하면 태도가 후퇴한 것 같은데. 폐기된 킬편 프롤로그를 보면, 결국 아스카가 파일럿으로서 빛나게 만들어 주는 데 망설임이 없어졌다고 할까, 그 갈등이 해결된 것 같거든요. 이런 부분도 안배하신 바 있습니까?

  글쎄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하는 게, 『신지³NC』에서는 자기가 더 잘 했으면 쿄코의 실험실패를 피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요. 킬 편에서는 몇 번이나 노력한 이후에 벌어진 결과니까, 어떤 의미에서 곪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요.

  아아, 각각의 우주의 아스카를 별개의 인물로서 다룬다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과연. 납득했습니다. 이것은 『아스카³』에서 이야기할 것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군요.
『신지³NC』 종료 시점에서 유이=신지는 세계의 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인가요? 예컨대 최후반부에 보면, 카츠라기 박사에게 책임을 몽땅 뒤집어씌어 버린 겐도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라던지, 찝찝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느낌이 있으니까요.

  그러게요……. 세계의 진실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겐도만큼의 해상도는 가지고 있지 못하겠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겐도의 말을 그대로 믿어준 것도, “사랑은 맹목”이라는 것도 있지만, 세계를 구하는 것이 지상과제이고, 진실은 둘째, 셋째 다음 일이니까요.

  확실히, EOE가 임박한 시점에서 겐도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겠네요.

  신지군은 언제나 잔뜩 잔뜩 노력했답니다.

  『신지³』에서 미사토=신지는 혼의 정체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고찰에 근거해서, 초호기를 폭발시키고 아야나미 클론들을 수조 밖으로 꺼내도록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지³NC』에서는 그 고찰이 틀렸을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무서워하지요. 그렇다면 『신지³』에서의 고찰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틀렸나요? 틀렸다면 클론 아야나미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 부분은 여백……이라고 하면 도망치는 것이 되겠네요. 이것도 미공개 설정입니다만, 미사토의 고찰은 정확합니다. 구프의 문은 이미 역할을 마쳤고, 그래서 텅 비어 있었다. 클론들에게도 혼은 있습니다. 『신지³NC』에서는 나이를 먹지 않아 보이는 유이의 외모에 동요했을 뿐입니다.

  그거 실은 “에바의 주박” 아닙니까?

  그렇네요. “에바의 주박,” 원작보다 먼저 나옴. (웃음)

  그리고 또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신지³NC』의 묘사를 보면 초호기가 처음부터 S²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요. 이것은 어떤 해석인가요? 보통 제루엘전에서 S²기관을 섭취했다고 보지 않나요?

  이것은 뒷설정입니다만, 『자양화 유니버스』에서 S²기관은 단일한 장기기관 같은 것이 아니라, 코어 안에 미세한 것이 다수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포공생하는 오르가넬라organella처럼. 그리고 그 수효는 사도나 에바마다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으로 사도>에바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초호기는 단시간 폭주를 할 수 있을 정도의 S²기관을 보유하고 있어서, 직접제어 하에서 발전소 대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고, 제루엘전에서는 기존보다도 훨씬 대량의 S²기관을 섭취하게 된 것이라는 설정입니다. 에바는 모조사도이니까 S²기관이 적다는 것이고.

  굉장히 흥미로운 해석입니다만, S²기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 것도 팬픽에 유례가 있나요? 특정한 다른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거나? 아주 희귀한 해석이라고 생각되거든요.

  딱히 영향을 받은 박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씹어삼켜서 섭취가능한 것이니까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미토콘드리아 같은 것을 연상했던 것이죠. 거기에 샴시엘전 이후 겐도와 후유츠키가 코어를 보러 왔기 때문에 그 소재지는 코어라고 고찰했고요.

  그도 그렇네요. 하지만 에바의 코어는 교체가능하다는 점에서 설명력에 약점이 있지 않을까요?

  듣고 생각해 보니 그 부분이 확실히 제 고찰에는 누락되어 있었다고밖에 말씀드릴 수 없군요. 15년 전에 이야기할 상대도 없이 혼자 구축했던 고찰이니까요.

  뭐, S²기관 자체가 원작에서도 상세한 설명을 거의 제공해주지 않았던 것이니까요. S²가 Super Solenoid의 약자고, 미사토의 아버지가 이론을 세웠다는 정도밖에? 그리고 S²기관이라는 것을 그냥 잡아먹었더니 흡수된 무언가가 아니고, 세포공생이라는 형태로 실체를 갖는 것으로 고찰하려는 시도는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아스카³』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요. 하나는 『신지³』와 『신지³NC』에서는 오히려 두드러지지 않았던 “이 우주의 신지의 보완”이고, 다른 하나는 앙제가 행하는 아스카, 즉 자신에 대한 철저한 심리분석이네요. 그리고 이 둘 다 원작과의 차이가 가장 적은 우주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라이너노츠에서 이미 언급되어 있지만,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글쎄요……. 원래 아스카의 빙의처로 최대의 후보는 아스카 자신이었습니다.

  아스카는 아스카 자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2회차에 돌입해서는 자신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세계를 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차선책이 미사토에게 빙의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신지³』와 너무 겹쳐서 포기했습니다.

  미사토에게 빙의한 아스카도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좋은 글에는 “새로움”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겨우 신지에게 빙의(?)하게 된 것입니다만, 그 다음의 곡절은 라이너노츠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신지의 입장을 체험함으로써 세계나 자신을 모두 이해하고, 그 다음에 자기자신에게 빙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빙의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해. 스탠드인가.

  스탠드……. (웃음)

  그래서인지 “이카리 신지”의 보완이 정작 『신지³』보다도 더 내밀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신지³』에서 빙의자 신지=미사토는 이미 미사토로서 14년을 체험하고 온 상황. 솔직히 “이카리 신지”라고 불리기 힘들지요.

  그렇지요. 어디까지나 타인인 미사토=신지보다 더 가까이 달라붙은 앙제가 있으니까요.

  “이카리 신지의 어머니”가 되어버린 『신지³NC』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는 최초의 타자”니까요.

  그래서 “원작의 이카리 신지”를 직접적으로 보완하는 것은 『아스카³』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요. 한 번 『신지³』를 통과했기에 가능한 구조였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스트레이트를 던져 봐야, 그 뒤에 커브나 포크가 통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다 보면 마린볼도 던질 수 있고.
아무튼, 『아스카³』에서 제시된 아스카의 내면묘사와 해석은 저의 아스카에 하나의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앙제는 자신의 아스카로서의 신지에 대한 감정이 심하게 일그러진 라이벌의식이었다고 분석하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 즈음에 커플링 중심의 독해에 염증이 나고 있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TVA 제15화의 키스씬을 포함해서 “애정”으로 해석되던 장면을 라이벌시와 증오를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제게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갈증에 물이었달까요?
역설적으로 『자양화』의 우주들 가운데 아스카(빙의자 말고, 그 우주의 아스카)가 결말 이후 신지와 맺어질 가능성이 가장 큰 것도 『아스카³』지요. 이런 점도 좋았습니다. 첫 눈에 반했다거나, 처음부터 맺어질 운명이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고. 증오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결말 이후 이 두 사람이 맺어질 수도 있겠다고 납득시켜주는 부분이요.

  그랬지요. 아스카에게 신지에 대한 애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대 그뿐이라고 할 수 없지요.

  당시의 커플링 중심의 해석, 다시 말하자면 “누가 신지와 맺어져‘야만 하는가’”의 논쟁은 거의 저강도분쟁, 내전 수준이었잖아요?

  그랬지요. 그 끝이 결국 하렘인가?

  그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아스카와 아야나미를 비난하는 그 분쟁 자체에 대한 염증도 있었지만, 동시에 아스카나 아야나미를 “히로인”으로서 신지에게 당연히 부속하는 존재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생겼습니다.

  하기야. 확실히 연애물에서 히로인은 일종의 트로피지요.

  이것은 제가 신지보다 아스카나 미사토에게 더 감정이입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아뇨, 알 것 같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안티 미사토가 만연했을 때 저도 꽤 미사토에게 감정이입했으니까요.

  어쨌든 그런 와중에, 『자양화』의 접근법과 방법론은 제게 해갈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아까 『자양화』는 원작을 대사 단위로 해체분석해서 재조합한 것이, 마치 역사학 연구 같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선생의 집필 동기도 반박논문을 쓰는 것 같았다고.

  네. 들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단순한 사실의 시간적 나열이지만, “역사학”이란 그것과는 또 다릅니다. 역사학은 어떤 사실이 가능했던 이유와 맥락을 밝힘으로써, 조건이 달라지면 그 사실이 아닌 다른 사실도 충분히 가능했을 가능성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아포리즘으로 요약하자면,
- “있을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당연한 일”은 당연하지 않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니, 또 리츠코가 생각나 버리는데요. (웃음)

  『에바』 해석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자세로 임한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이야기일까요? 저는 『자양화』에서, 특히 『아스카³』에서 그러한 단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언급하신, 오리지널 신지가 각각의 우주의 아스카를 별개의 존재로서 취급했다는 부분도 여기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겠네요.
원작 우주의 카지의 원작 우주의 미사토에 대한 사랑과, 『신지³』 우주의 카지의 『신지³』 우주의 미사토에 대한 사랑의 형태가 같을 수 없다는 것도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특히 아스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따뜻하고 좋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아스카가 제일 고생했으니까. 행복도 다양해야죠.

  정말로 『자양화』에서 각각의 우주의 아스카들의 행복은 저마다 다 다르지요. 에이스 파일럿으로서의 자아실현에 성공해서 행복해진 우주도 있고, 사랑하는 엄마를 유이와 카오루가 되찾아 주어서 행복해진 우주도 있고, 신지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고 행복한 우주도 있고, 이호기 안의 모친을 자기 손으로 되찾아 오겠다고 결심해서 행복해지는 우주도 있고.

  이야기를 거듭할 때, 결과가 같으면 설득력을 잃는 것이 아스카였습니다. 원작에서 가장 소외된 역할을 배정받은 것이 아스카였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세계의 진실은 일절 접근할 수 없고, 그저 사도전을 반복하기만 할 뿐.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소한 변화(変化)로 도깨비가 된다(大化けする). 나비효과의 신불이 점지해 주신 아이랄까.

  사다모토가 이야기한 「아스카는 필요없다」에서 역으로 아스카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이군요.

  저는 2차창작을 함에 있어서, 캐릭터들을 모두 평등하게 접근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했습니다. 그렇게 플랫하게 아스카에게 접근했더니, 마이너스 요소가 모두 플러스로 전환되어 행복해진 아스카를 그릴 수 있게 되었네요.

  어딘가 미사토와 맺어져서 행복한 우주도 있을지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그런데 정말로, 카지가 아니라 미사토가 아스카의 첫사랑이라는 이론, 설득력 있지 않나요?
왜 항모에서 카지의 전 여자친구 미사토가 아니라, 미사토와 현재 동거하고 있는 신지 쪽을 신경쓰는지? 왜 그 전날 밤에는 카지와 미사토가 아는 사이인 줄도 모르면서 카지에게 미사토의 흉을 보는지? 왜 키 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여성스러워졌다고 미사토에게 어필하는지?
이거 정말 언제 진지하게 이론화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증거가 막 쌓여가네요 (웃음)

  역사학의 분석은 기본적으로 사실과 그 주변의 맥락을 수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증거를 스스로 제시할 수 없는 헛소리는 하면 안 되는 것이니까요.

“각본 쓴 사람,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월간순정 노자키군』 치요)
  “2차창작 한 사람,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아스카, 그리고 다른 캐릭터들도 신지에게 부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행위자로서 존재한다는 것. 신지와 맺어지지 않는 행복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자양화』에서 얻은 가장 귀중한 밀알이겠지요. 에바를 타지 않는 행복이 존재하듯이요.

  그렇군요. 저는 저자로서 “캐릭터를 세운다”는 것에만 주력했을 따름입니다. 캐릭터를 세우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파고들어 고찰하고 묘사했던 것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밀알을 얻은 덕분에 『자양화』 이후로 커플링 중심의 가벼운 팬픽션도 비로소 가볍게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경쟁자를 헤이트하는 것은 그 뒤로도 못 읽습니다. 애초에 경쟁자라는 말 자체가 웃기지만요.

  뭐, 최근 들어서는 헤이트물이 많이 줄었네요.

  『아스카³』에 대한 제 의미는 많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선생의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총괄하면 어떨까요?

  그러게요……. 라이너노츠에도 쓴 것이지만, 『에바』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아스카지요. 그런 아스카의 보완에, 신지의 수호령이라는 입장이 좋다. 이런 건 『신지³』 집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다 보니 떠올랐다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아스카의 보완을 그려냄으로써 작가로서의 입지를 완수한 것 같습니다. 『에바』 최대의 피해자를 구제해냄으로써, 처음으로 한 사람의 어엿한 작가가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으로 나도 에바 팬픽 작가의 말석에는 드는구나. 라는 성취감을 얻었습니다.

  『초호기³』는 선생 스스로 “후일담”이라고 표현하신 만큼, 『자양화』의 공 자체는 여기서 멈춘 것이군요.

  그렇지요. 『초호기³』는 역시 예외라고 해야 할까, 3차창작이지요. 『신지³NC』나 『아스카³』를 넘고 오신 독자분들이라면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단독 작품으로서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스카³』 우주의 어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흐름이라면 특히 걱정되는 것이 리츠코인데.

  그곳은 완전히 여백이네요~.

  그러게요. 채우면 끔찍해지는 여백이군요.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터미널 도그마에서 시체 2구 발견, 이라던가.

  뭐, 카지가 리츠코에게 협력한 결과 어떻게든 잘 되었을 가능성도. 그 부분은 “좀처럼 잡히질 않는 아카기 박사와 동행할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말이야”라는 대사에서 암시한 것이네요.

  역시, 모든 캐릭터에게 상냥하셔.

“사랑입니다.”
(『메이드 인 어비스』 본도르드)
  “사랑입니다.”

  역사는 사람이라는 이 모인 이야기物語.
『테제』에서도 그러잖습니까? “사람은 사랑을 쌓으며 역사를 만들어 가.” 『자양화』라는 사서史書는 사랑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렇네요.

  선생은 『초호기³』을 3차창작이다, 오리캐다, 이렇게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저는 이것 역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아야나미와 신지의 포지션이 바뀐 세계의 사고실험으로 읽었거든요. 그리고 보완을 주도하는 것이 아야나미가 되면서,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조명하지 못한 부분들까지 보여줬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리츠코.

  확실히 리츠코가 현격히 각광을 받았지요.

  그리고 아스카와 아야나미의 관계. 아스카 합류 이후 『초호기³』는 거의 LAR이라고 해도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죠.

  그랬네요.

  마지막에는 소년만화처럼 “너한테는 한 번이라도 이겨 봐야겠다”라며 주먹을 날리는 전개. (웃음) 한편, 아스카 합류 이후 신지는 존재감이 줄어들었지요. 원작에서도 라미엘전 이후 아야나미의 존재감이 급속히 줄어드니까, 아야나미의 포지션을 가진 신지도 그렇게 될 법하지만.

  아니~, 그건 “이카리군에게는 에바를 타지 않는 행복이 있어”죠. 어떤 의미에서는 거울상입니다.

  “에고라고 그런 건!” 아니, 잠깐. 이쪽도 “레이”네, 그러고 보니.

  가져올 줄 알았어요, 후지타카 나스 선생 만화. (웃음)

  그러고 보니, 이거 『초호기³NC』 아닙니까? 나오코 어머니에 리츠코 언니. (웃음)

  그러게요~. (웃음)

  한국 독자들 중에, 아카기가에서 자란 리나레이가 활약하는 『초호기³NC』를 보고 싶다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초호기³NC』는 사도전 바리에이션을 다 써버려서 곤란합니다.

  그 질문자의 의도는 사도전이 아닌 일상물을 보고 싶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보간”이네요.

  소재가 없어요~. 모집 중이니 있으면 트위터(@dragonfly_lynce)로 제보해 주세요.

  아무튼, “에바를 타지 않는 행복”도 타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진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일까요. 아야나미가 에고(웃음)로 멋대로 떠넘겨주었으니까.

  그렇네요. 그래서 신지의 우울이 있고, 거기서부터 히카리와의 관계가 생겨나고.

  아야나미가 사람이 되는 과정 역시 타인과의 상호작용 과정.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여러가지를 짊어지고, 다양한 상처를 입고 입혀가며,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Homo homini ericius (인간은 인간에게 고슴도치다)

  그야말로 고슴도치의 딜레마네요.

  “사도シト”가 “사람ヒト”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초호기³』는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신극장판의 쿠로나미보다 더 잘 만들었어요. 기초적 감정의 개념조차 몰랐던 빙의레이가 끝내는 사람이 되고, 마지막에는 리나레이가 되어서 씩씩하게 달려가는 모습. 유아적 감탄만 연발하다가 결국은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 버린 신극장판의 쿠로나미보다 이쪽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요.

  그거야 뭐. 안노 감독보다 제가 더 아야나미스트니까. 쿠로나미는 확실히 “냉장고 속의 여자”를 느끼게 했습니다.

  남주인공의 정신적 각성을 위해 죽는 소녀라니, 이것은……, 그냥 너무 낡고 구태의연하지요. 캐릭터를 도구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보다 세련된 사용법이 있었을 텐데, 신지의 눈물을 쥐어짜는 최루탄(리터럴리)으로 폭발사산이라니……, 이건 뭐…….

  TVA에서 두 번째 레이가 죽는다고 신지가 각성하지 않았지요.

  아무튼 신극장판 욕은 이따 실컷 하고, “에바(메카)”란 무엇인가, 라는 점도.
제가 개인적으로 고찰하고 발전시키는, “일본 문화를 읽는 열쇠로서의 오니론”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일본 민속에서는 일상의 세계인 “이쪽”과 비일상의 세계인 “저쪽”을 구별한다지요. 그리고 “저쪽”에서 선을 넘어 “이쪽”을 침범해 오는 존재가 바로 오니. 에바의 세계에서는 사도가 이 오니겠지요.
오니는 기본적으로 일상을 교란할 수 있는 강대한 능력이 있는 존재. 그래서 사람은 오니에게 대항하기 위해 인조 오니를 만듭니다. “사람이 만든 것”인 에바를. 1996년 인터뷰에서 안노 감독이 에바는 오니를 모티브로 디자인했다고 하더군요.

  그랬지요.

  메카의 역사에서 에바는 마징가의 직계 후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에바의 후계가 되는 것이 『진격의 거인』의 “거인”이고. 이것들은 모두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역사와 민속은 오니가 단순히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무언가”일 뿐이 아니고, 보다 깊은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인 “이쪽”과 오니(사도)의 세계인 “저쪽”을 나누는 “선”이란 원래 인위적인 거예요. 헤이안시대의 요괴퇴치담은 원래 경도의 조정에 공순하지 않는 지방세력과 선주민족을 토벌하는 내용이었다지요.

  그렇지요. 에조라던가, 츠치구모라더가, 주탄동자라던가.

오니도 사람이야 사람!
  히노 히데시나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분들이 이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모노노케 히메』를 보면 늑대나 멧돼지만 모노노케인 게 아니거든요.
사실은 조정에서 파견나온 승병들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모노노케=오니”입니다.
“선=헤이안쿄 성벽” 안쪽 존재의 안전을 위해 선 밖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들을 오니라고 부른 것이니까. 호족(에보시)・선주민족(아시타카)・금공사(토키)・나병환자. 그것이 바로…….

  그것이 바로 오니의 진짜 모습인 것이군요.

  그래서 히노 히데시는 공포만화를 통해서 귀신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도 귀신이 되는 것을 긍정하는 호러 휴머니즘의 세계를 펼쳤지요.
『초호기³』에서 초호기가 “사람”이 되려는 것, 그럼으로써 사도와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모습에서, 저는 그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신도 악마도 아니고 사람이 되기를 선택하는.

  “2차창작 한 사람,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히노 히데시라던가는 무서워서 읽어보지도 못한 걸요.

  이 작품에서 초호기=빙의레이는 사도들을 꼬박꼬박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그랬었지요.

  그리고 에바를 인형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말도 그렇고. 저는 그런 부분들에서 이런 것들을 떠올린 것입니다.

  뭔가 기저에서 통하는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독자는 만화판 『키카이다』가 떠올랐다, 인간이 아닌 것이 고뇌하는 모습이 비슷하다.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저도 원작 『키카이다』는 미이수인데, 선악의 차이를 모르면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 같아요.

  저는 이것이 고대로부터 일본 문화를 규정한 큰 틀이었다고 생각해서, 드래곤플라이 선생 역시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문제시하는 측면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떠올려 보면 “사람이 만든” 사람 아닌 것이 사람이 되려는 이야기는 이외에도 많은 것 같은데, 에바의 경우 그것이 “사람의 적”, “오니”인 사도의 카피라는 점 때문에 이 고찰이 더 깊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게요. 그래서인지 아르미사엘만 마지막에 발할라까지 따라오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원작에서부터 아야나미와 인연이 깊었고,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사도니까요. 이지러졌지만 그래도 아야나미의 마음을 베껴보인 아르미사엘이기에 더욱 합격입니다.

  또한 원작의 아르미사엘전에서 나왔던 “반전 AT필드”가 『자양화 유니버스』 전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네요.
“오렌지색 물이 가득한 수면과 붉은 하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곧은 수평선.”
원작을 상당히 주의깊게 본 사람이 아니면, 이 심상이 어디서 왔는지 한번에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프지? 이 봐, 뺨이 아프지?”

  사실 이 장면도 아야나미를 퇴장시키면서 그 내면을 빠르게, 제시하듯이 드러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서 연출된 것일 텐데, 이것을 그렇게 해석한 것도 놀라웠습니다. 정확히는 “이게 그거다” 하고 깨닫는 순간 놀라웠다는 것인데요.

  그렇군요. 꼼꼼히 보지 않으면 모르는 독자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게시판이 아닌 블로그에서 번역을 제공하는 것이 이런 부분에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작을 삽화로 제공함으로써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어서요.

  그러게요. 연재 당시에는 그런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지금 번역을 통해 그렇게 호화롭게 발표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하하하. 저도 무언가 “새로움”을 덧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각설하고, 『초호기³』는 커튼콜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읽을 가치가 있지요. 거기서 그렇게 리나레이를 등장시켜 대단원을 장식하다니, 어느 독자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결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초호기³』는 아예 쓰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엔딩은 진짜 걸작입니다. 캐릭터, 원작, 그리고 독자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충만해서, 더 이상 뭐라고 말을 덧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 부끄럽네요. 솔직히, 이야기의 최후를 장식할 때 팬픽의 신이 내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맹자』에 보면 “”한 것이면서, 어째서 그런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경지를 가리켜 “”이라 한다더군요.

  그 경지가 두 번 돌아오지는 않겠지요. (웃음)

  선생의 재능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돌아올 겁니다. 하지만 『자양화』의 다음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도 『초호기³』의 결말인데요. 커튼콜 말고, 최종화. 이 최종화는 『자양화 유니버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경계조건을 규정하는 역할도 하는 것 같습니다.
붉은 바다를 “발할라”라고 불렀잖아요? 그 말대로, 원작 우주의 캐릭터들은 이제 인간이라기보다 신적인 존재에 접근했다고 느껴진 것입니다. 원작에 기초한 “새로움”을 창출하기는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자양화』의 세계는 이제 액자에 갇힌 것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완결”했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닫힌 액자를 다시 넘어설 수 있다면, 그것은 보다 높은 경지로의 도약이겠지요.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완결성을 가지고 닫힌 세계라서, 대단한 드래곤플라이 선생 자신도 이것을 과연 넘을 수 있겠는가?

  아니 뭐, 신극의 저 꼬라지를 보면 앞으로 한 10년 후쯤엔 어쩌면…….

  그것은 즉,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다는 의미인가요?

  솔직히, 팬픽이라는 것은 원작에 대한 불만족이 원점인 것이므로, 신극의 그 꼴로부터 새로운 싹이 들 가능성이 제로는 아닙니다. 실은 『신지³』가 나온 뒤로 역행빙의라는 장르가 생기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었는데……. 그로부터 저를 뛰어넘는 재능이 나오기를, 누군가 졸작을 뛰어넘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아아, 다른 후학 누군가가?

  그렇지요. 나는 그냥 처음 마중물 역할이면 족하다고 생각했고, 후진이 이어 준다면야.

  하지만 신극으로는 해내기가 힘들겠네요. 세계의 깊이가 구작에 비해 천박해졌고, 캐릭터들의 서사도 이카리 부자에게만 집중되어 다른 캐릭터들은 “달리 아무 것도 없”어졌으니까요. 선생처럼 철저한 연구를 토대로 작품을 전개하는 사람에게는 의도치 않은 역상성이랄지? 다시 역사학에 비유한다면, 사금파리 몇 개 던져 주고 세계를 복원하라는 느낌이네요.

  그러게요. 그만큼 팬픽계가 발흥하면 신작의 싹도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갱지更地입니다.
아무튼 『초호기³』의 총괄을. 모조사도였던 초호기가 사람이 되는 『초호기³』는 원작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바치는 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원작에서 할 수 없는 것, 원작이 제공하지 못한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팬픽이니까요.

  다음은, 『구극³』 이야기를 핑계로 신극 욕을 하는 순서인데요.

  그 비중이 더 높을 것 같네요.

  욕할 것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무엇부터 욕을 하면 좋을까?
그러고 보니, 이번에 완역을 하면서 신경쓰인 것이 있는데요. 신극장판에서 특징적이었던 여러가지 장면에, 왠지 『자양화』에서 이미 나온 것 같은 느낌, 들지 않았습니까?

  에바의 주박이라던가?

  늙지 않는 에바의 주박이라던가, 사람됨을 배워가는 쿠로나미라던가,

  응응.

  옥상에서 다함께 식사, 요리 연습하다 손가락 다치는 아야나미.

  그러게요.

  뭔가 주술에 해박한 히카리, 차포 떼고 두는 장기.
이렇게 꼽아보니 꽤 많은데……?

  듣고 보니…….

  우연의 일치겠지요?

  그거야 신(안노 감독)만이 아신다. (웃음)

  신은 죽었다.

  니체!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그대 몸의 도구이며.” (웃음)

  (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신극장판은 사실 이렇게까지 질질 끌릴 프로젝트가 아니었습니다. 『서』가 언제 나왔는지 기억하세요?

  2007년이었던가? 솔직히, 그게 발표되었을 때 “(내 팬픽이) 아슬아슬하게 안 늦었다”고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솔직히 말해서 『자양화』가 신극장판보다 훨씬 잘 만들어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커플링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것도 이해는 되지만, 작품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팬들이 원하는 커플링 던져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면 저는 더더욱 용서하지 못했을 거 같고.
이건 그냥……, 그냥……, EOE의 자기표절 아닌가?

  으ー음, 자기표절은 원작자의 특권 아닌가 싶지만…….

  안노 감독은 신극장판을 처음 만들 때, 오락으로서의 『에반게리온』, 새로운 『에반게리온』을 보여주겠다고 공약했었습니다.

  그랬었지요.

  하지만 실제 결과물은 새롭지도 않고 오락적으로 즐겁지도 않아요. EOE에서 말한 소통의 부재 같은 테마는, 그동안 충분히 변주되고 해석되었고, EOE는 자기완결적으로 끝난 이야기입니다.
『신에바』는 결국 EOE와 똑같은 이야기에, 뭔지 모를 고유명사를 잔뜩 붙여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 고유명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인류의 존속을 위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막아야 하는 임팩트는 대여섯번 되풀이되며 동네 불꽃놀이가 되어 비장감이 사라졌습니다.

  듣고보니 그렇네…….

  그와 동시에, 캐릭터의 서사는 이카리 부자를 중심으로 블랙홀처럼 축퇴하여 폐색되었습니다. 그들 부자 이외에는 제대로 된 서사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없어요. 해석이나 분석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해석이나 분석의 대상이 될 서사 자체가 부재하니까요.

  영문 모를 것들도 너무 잔뜩 있고요.

  마지막에 재고정리하듯이 “보완”하는 장면은 실소가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폐점세일이었지요.

  예컨대 아스카에게 부모가 필요했다고? 그런 것을 헤아릴 수 있는 정황이 신극 4부작 통틀어 어디에 있었습니까? 구작에서의 소류 정도의 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잖아요.
시키나미 타입 클론이라는 설정을 생각하면서 신극을 다시 보면 터무니없는 장면도 있는데요. 엘리베이터에서의 “에바를 타지 않는 행복” 기억하시나요?

  레이와 아스카의 장면?

  소류 아스카라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지요. 하지만 시키나미에게 “에바에 타지 마”라니, 폐기당해 죽으라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지요.

  하나같이 사기 수준이었던 예고편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온 제네시스”로 설정과 설명을 구작에 전가합니다. 이 장면에서 신극장판은 구작으로부터 독립적인 스탠드얼론 시리즈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확실히 그래요. 처음 볼 때는 추억보정으로 기뻤는데, 특별히 의미가 없어서 볼 때마다 시들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작과 신극이 이어진다면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무엇보다 아스카의 문제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클론? 무슨 의미? 애초에 이름은 왜 바꿈?

  아스카의 취급, 너무했지요.

악역으로서 격이 다른
두 명의 겐도
  겐도도 문제입니다. 구작의 겐도는 악역으로서 완벽했지요. 비열함 그 자체. 하지만 카리스마. 용서받을 수 없는 악. 결국 마지막에 패배하고 부정당하는 것까지. 하지만 신극은, 뭐야 이게.
겐도가 악행의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고, 소원하던 대로 아내와 재회해서 성불하는 것을 납득할 수 있습니까? 세계의 대부분 왜 죽은 것인지?
서사적으로도 구태의연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문제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악인정기悪人正機라는 것이 있어서, 일단 구제받고 나서 회개해도 늦지 않다는 느낌이네요.

  그리고 미사토. 이미 『큐』에서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미사토였지만, 『신에바』에서 그녀가 어머니가 되었다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저는 이해를 포기했습니다.

  맞아.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10월에 장문으로 불평을 한 적이 있었네요.
미사토가 어른이 되어서 굳이 어머니가 되었어야 했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이 고작 그것이었나? 어른이 되는 것과 부모가 되는 것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것, 너무 구태의연하고 퇴행적.
결핍이 무엇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독의 감각이 엄청나게 무뎌져 버린 것이다. 구작에서 세컨드 임팩트 세대가 안고 있던 거대한 상실이 “결혼해서 애 낳고 사람 구실 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니.
신극장판 전체가 구작의 키치한 자기표절, 구작의 함의의 축소의 연속이지만, 이 핵심적인 문제를 혈연상 가족의 문제(미사토 뿐 아니라 이카리 부자도 염두에 둔 말), 남자와 여자의 당연시되는 결합의 문제 따위로 축소시킨 것은 괘씸하다.
신지와 피가 이어졌지만 아버지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겐도와 달리, 미사토는 피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신지의 어머니가 되어주고자 “노력”했던 사람. 그것이 잘 되었는지는 둘째치고, 혈연이 아닌 유대를 모색하고 실천하려 노력한 자체가 중요하다.
하지만 신극장판에서는 그런 미사토에게 피가 이어진 아들을 붙여 놓으니, 겐도 같은 포지션이 되어 버린다.
  응응. 정말이지 카지 주니어의 존재는 불가해입니다.

  미사토를 세상이 망하는지 마는지 하는 도중에 피임도 하지 않은 정신나간 여자를 만들어 놨어요. 이런 무리수를 써가면서까지 이 캐릭터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결국 도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저 미사토가 카지 따라 죽지 않게 붙들어놓기 위한 닻에 불과하죠. 미사토는 신지를 감싸고 대신 총을 맞은 시점에서 이미 신지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폭사한 것도 EOE에서 폭사했으니까, 그 외에 폭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죽이는 전함에 자동항법장치 하나 없냐고?

  자동항법장치야 있겠지만, 창 생성이 수동이 아니었을까요. (일단 옹호)

  신극 생각만 해도 복장이 뒤집힌다……!

  솔직히 신극은 뭐가 뭔지 모를 것이 너무 많아서, 분노라기보다는 체념이라는 느낌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해요. 그런 느낌을 눌러담은 것이 『구극³』였지만요.
우선 첫 번째는 쿠로나미가 냉장고에 들어간 것. 너무 슬프고 불쌍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스카의 보완 때 튀어나온 인형탈 켄스케.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렇게 보여준 적이 없는데, 거기서 켄스케가 나오는 것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네온 제네시스도 그래. 리빌드를 천명했던 신극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렇다고 구극을 보완하는 것도 아니야.
유이가 신지를 감싸고 내보낸 장면은 그 자체로는 감동적이었지만, “내 안에 있었다”가 뭐지?

  그 부분은 아마 신지의 반쪽은 유이에게서 왔다, 그런 의미였겠지요.

  그리고 마리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알 수가 없어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을 이룬 것인지?
최대의 문제는 공백의 14년. 왜 14년이나 걸렸는지, 왜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지, 완전히 이해불능입니다.
화까지 나지는 않지만, 여러가지가 버려져서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건 쓸쓸함이라는 걸까요?

  한국에서는 신극장판의 납득되지 않는 것들은 대부분 울트라맨의 오마주로 설명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던데요. 예컨대 아담이 아담“스”가 된 것도 그렇고. 켄켄과 마리도 울트라맨의 부모 이름이라던가?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이 작품 그 자체 속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네요. 울트라맨을 본 사람만 『에바』를 볼 리가 없잖아? 당장 나부터 울트라맨 하나도 보지 않았는데.
결국, 신극이 구작과 달라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 것인지, 왜 달라져야만 했는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네요.

  그렇습니다. 웃물을 떠서 만인을 대상으로 하고 싶었던 것인가? 구극은 코어한 애니 팬들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더 넓은 층에 호소하는 (돈이 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일까?

  뭐, 100억 엔 벌었다고는 하는데요. 하지만 『에반게리온』의 완결편이 100억 엔이면 좀 초라하지 않습니까?

  에이~, 니치한 로봇 애니로 100억이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들끼리 다함께 보러 갈 수 있는 『귀멸의 칼날』 같은 거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신에바』의 내용은 구작보다도 모를 것 투성이입니다. 이것이 대중성을 지향한 결과는 아닌 듯 하고. 이것을 형용하기에 가장 좋은 표현은……, “제출일 하루 전에 하기 시작한 학부생의 숙제” 아닐지.

  대중성이라기보다는 그림의 임팩트로 호객했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은데요…….

  NHK의 다큐멘터리를 보니, 『신에바』 제작이 얼마나 엉망으로 되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캐릭터들을 이해해야 하는 성우들도 마지막 순간까지 결말을 전달받지 못하고.
미야무라씨는 『신에바』에 영어 부제가 있다는 것도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고 처음 알았다던가요.

  좋게 말하면 브레인스토밍인데, 그야말로 IT계에서의 애자일agile 개발을 방불케 했지요.

  부하 감독들이 만들어 온 각본이나 스토리보드를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거부하고. 이 “각본 뒤집고 처음부터 쓰기” 상황은 『큐』 제작 때부터 반복되어 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본인한테 명확한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에다 마히로 감독이 만든 스토리보드 보셨나요? 『큐』의 블루레이 특전으로 제공되었던 것인데요.

  아, 아직 못 봤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찾아 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내부적인 정합성 면에서도,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도, 결과물 『큐』보다 훨씬 훌륭한 스토리보드였는데, 이걸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폐기했다더군요. 8년 전에 그 스토리보드대로 만들었으면 시간이 모자랄 일도 없었을 테고, 기승전결이 붕괴하지도 않았을 텐데.

  안노 감독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했던 것일까요?

  대담 처음에 말했던 “새로운 것”의 문제가 있겠네요. 안노도 역시 프로. “새로운 것”의 의미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에바』의 성공 이후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기복제만 반복하고 있다는 자각도 있었을 테고. 예컨대 『신고지라』는 『에바』의 야시마 작전의 실사화에 불과하지요.
동시에 그 “새로운 것”을 부하 스태프가 아닌 자기 손으로,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으니 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최후에 시간에 쫓겨 부실공사를 한 뒤 완결 자체에 의미를 갖는다고 정신승리하게 된 게 아닐까.

  늙었나…….

  안노 자신의 크리레이터로서의 역량이 EOE 완결 시점에서 소진했음을 인정하고, 프로덕션과 경영으로 물러나 후배들의 크리에이팅을 지원하는 역할로 전향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투자자로서의 솜씨는 있는 것 같고.

  실제로, 처참하고 비도덕적인 경영상태로 인해 유령회사로 전락한 가이낙스로부터 『에바』의 판권을 구해낸 것은 안노의 경영자로서의 역량 덕분이었지요.

  그렇죠 그렇죠.

  그런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산하의 후배 감독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파』에서 손을 떼고 『큐』에서부터는 츠루마키와 마에다에게 맡겼으면 이런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총감독이 아니라 프로듀서 안노의 활약을 보고 싶었어요.

  이미 다 끝나 버린 것. 부질없다…….

  하지만 희망은 남아 있어요. 어떤 때라도. 팬픽이라는 희망이…….

  정말이지, 신극 욕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런 축적이 반복되면 다음 싹이 틀 가능성은 있는 거예요.

  그렇네요. 포기하지 말고 대항논리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팬픽 쓰기란 늘 그래 왔어요. (웃음)

  한국에서는 일부 팬들이 구작 시대 안노 감독 이외의 스태프들의 공헌을 추적해서, 구작에서도 안노감독의 공헌이 어느 정도였는지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각본가인 사츠카와 아키오씨를 평가하려는 부분이 있네요.

  과연. 저는 개인적으로 하다메 키이치씨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본명은 사토 쥰이치. 『세일러문』으로 유명한 분인데, 메카물에는 가명으로 참여하셨죠. 연출가로서 『에바』에서는 주로 미사토네 집 같은 따뜻한 장면을 담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따뜻한 장면, 누군가는 슬픈 장면을 전담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히라마츠 타다시씨가 우울하고 슬픈 장면을 담당했다던가요.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시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에바』를 “특정인의 천재성”의 산물이 아니라, 복수의 인간의 “집단적 노동”의 산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바』는 생산 뿐 아니라 소비 역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큰 그림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에바』는 안노만의 것이 아니라는 그림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안노 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스탭롤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하청 노동자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에바』를 보고 감동해서 해석하는 우리들까지, 모두가 만들어낸 것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이런 관점을 만들고 싶습니다.

  찬성입니다. 공교롭게도, 안노 감독이 제창한 “라이브 감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겠지요.

  요는 집단적 노동과 대중적 참여를 중시한다는 것인데, 이런 기획을 위해서는 『에반게리온』이라는 노동과 참여의 블랙박스를 여는 역사적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총괄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라는 블랙박스의 뚜껑을 땄듯이.

  24시간 동안 다양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네요.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까 싶은데, 며칠 전(12월 1일) 『신지³』 최종화에, “익명”님이 이런 댓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어디 보자…….

 
와……, 이걸 지금에서야 보다니……. 뭔가 싶어서 보기 시작했는데 며칠에 걸려서 시간날때마다 봤습니다. 빙사토가 뭔지 했다가 하기도 하고 정말 깔끔하고 아름답네요. 남은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읽겠습니다ㅠㅠ 이 소설은 신이야
라는 사연이었습니다.

  솔직하고 정직한 감상. 고맙네요.

  나는, 이런 말을 듣기 위해 이 작품군을 완역한 것일지도 몰라.

  좋아한다는 거야

  드래곤플라이 선생이 제 마음 속에 옮겨붙인 촛불, 늦었지만 이로써 더 많은 한국의 『에바』팬 여러분에게도 제가 옮겨 붙일 수 있다면,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지막으로, 최종적인 감상이랄지, 하고 싶은 말이랄지, 각자 하나씩 남기고 대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네. 『신지³』을 썼을 당초에는, 설마 이것이 번역되어 확대되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심지어 현해탄을 건너 읽히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팬픽이란 원작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을 보완하는 행위입니다. 『에바』에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에바』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런 한국의 『에바』팬들에게 위로를 드릴 수 있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요.
번역, 정말로 감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계라는 우주를 항해하는 여행자VOYAGER입니다.
각자의 출발지도 도착지도 모두 다르지만, 그 여행의 경로 도중에 이 작품을 조우했다면, 이 작품이 제공한 추체험은 기억의 일부가 되어, 도착지까지 잊히지 않고 함께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깨닫고 이야기하게 되겠죠.
내가 당신의 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내가 당신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자랑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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