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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2일 화요일

나기사 카오루의 종교 상징성 정리

 『에바』의 종교적 상징주의는 거의 맥거핀이라고 이미 밝혀진 시점이다. (츠루마키 카즈야 “우리 그거 다 걍 멋있어 보여서 넣은 거에여” / 오카다 토시오 “에바에 종?교 그거 다 데빌맨 파쿠리한 거임ㅋㅋ 걔네들 철학 그런거 모름ㅋㅋ”) 하지만 이것은 외재적인 이야기일 뿐, 그럼에도 세계관 내부적으로는, 특히 제레(특: 광신자 집단)가 무슨 짓을 왜 하냐는 데 있어서는 종교적인 분석이 결국 필요하다. 특히 영지주의적으로.

  영지주의는 온갖 다양한 분파가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참된 신」이 있고 「거짓 신」 데미우르고스(조물주)가 있는데, 물질세계는 후자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악하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인간은 조물주가 사실 거짓 신임을 폭로하고 참된 신에게 도달하는 「영지」(영적 지식)를 갖추어 참된 신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에바』 세계관에서 누가 참된 신이고 누가 거짓 신인지는 자명하다. 아담이 참된 신이고, 릴리스가 거짓 신이다. 그리고 거짓 신 또는 잘못 배달된 신 릴리스가 만든 생명들이기에 지구의 생명들(릴림들)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인류는 「보완」하여 영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대충 제레의 인류보완계획이다. 영지주의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발렌티누스파는 영지를 받은 존재만이 뉴마틱스로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제레가 바로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구도에서 카오루의 위치는?

  『에바』에서 「예수」의 상징성을 가장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존재를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나기사 카오루, 엄밀히 말하자면 TVA 24회에 딱 한 번 나온 「원작 카오루」다. 후술하겠지만 만화판과 신극장판의 카오루는 전혀 그렇지 않다.

  카오루는 참된 신 아담 그 자체이며(성부), 아담의 열일곱째 아들 타브리스(성자)이기도 하다. 영지주의 중 예수 긍정파에서는 예수를 영지를 전달해주러 온 참된 신의 물리적 현현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카오루를 예수라고 하는 것은, 이단인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예수 뿐 아니라, 정통기독교에서 그리는 「예수님」의 행적과도 그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쪽이 메인이다.

  나기사 카오루는 TVA 24화에서 왜 죽었는가? 아니,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 카오루의 대사들을 보자.


뭐래는 거냐 쉽게 말해라 좀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카오루군…」
「 고마워, 신지군. 이호기는 네가 멈춰주었으면 했어. 그러지 않았으면 그녀와 계속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
「 내가 계속 살아가는 것이 내 운명이니까. …그 결과로 사람이 멸망한다 해도 」
「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도 있어. 삶과 죽음은 등가치니까, 나한테는 그래 」
「 스스로의 죽음, 그것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자유인 거야 」
「 유언이야 」
「 …자, 나를 없애 줘 」
「 그러지 않으면, 너희가 사라지게 돼. 멸망의 때를 모면하고, 미래가 주어지는 생명체는 하나밖에 선택되지 않아 」
「 그리고, 너는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야 」
「 너희에게는, 미래가 필요해 」
「 …고마워. 너를 만나서, 기뻤어 」

  “너”와 “너희”, “사람(인류)”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에 또한 주목. 카오루는 신지에게서 인류 전체를 겹쳐보고 있다.

  종합하면 이런 소리다. 카오루는 불멸자로서, 참된 신의 아들(성자)이자 참된 신 그 자체(성부)로서 (마찬가지로 불멸자인 릴리스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 운명이다. 굳이 도식화해 보자면, 「아담(성부)〜타브리스(성자)〜카오루(성령)」이 참된 신의 삼위일체고, 「릴리스(성부)〜초호기(성자)〜아야나미(성령)」가 거짓 신의 삼위일체로 쌍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카오루가 생존하면 사해문서 이본에 계시된 종말인 서드 임팩트가 일어나서 인류는 싹 망한다. 그러나 카오루는 인류가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인간들에게 미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포기한다. 이 마지막 꽈짖 시퀀스에서 카오루는 요한복음 12장 23-25절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알의 밀알」의 비유로써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암시하는 부분이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혼자서 있고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카오루는 인류를 멸망시켜가면서까지 생존해야 하는 운명인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였다. 인류가 멸망하고 임팩트 이후의 지구에 자기 혼자 (어쩌면 릴리스도 함께) 생존한다면 그것은 「한 알 혼자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진 뒤 썩어서 “밀알로서는 죽어야” 싹이 트고 자라나서 더 많은 밀을 맺는 것처럼, 밀알이 죽지 않고 방부처리되어 혼자 살아있어 봤자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카오루에게 생과 사는 등가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카오루는 자기 생명을 미워한 나머지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릴림=인간이라는 많은 열매가 계속 번성할 수 있도록 「희생」했다. 퐁당 떨어지는 카오루의 머리통이 한 알의 밀알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가 죽음을 자청해 처형됨으로써, 인류는 원죄를 대속받았다. 그 원죄가 정통기독교식으로 사과서리 좀 했다 걸린 죄인지, 영지주의식으로 조물주가 악신이라서 악신이 만든 우리도 본성이 사악하다는 그런 중2병 돋는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죄는 이제 용서받았고, 인류가 집단으로 육신(특: 더러움)을 버리고 할복해서 원죄를 속죄하자는 제레의 자살쇼는 티끌만한 정당성도 상실하게 된다. 아담(성부)이기도 한 카오루에게 인간의 대표로서 신지가 「호의를 산」 시점에서 EOE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TVA 24화에서 카오루가 신지=인간에게 갖게 되는 「호의」는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카리 신지라는 특정인에게 갖는 별애(別愛)가 아니다. 성애(에로스)는 더더욱 아니다. 카오루가 인간이 심판받지 않고 계속 번성하도록 인간을 대속한 예수이고, 예수는 곧 신이기 때문에, 카오루가 인간에게 품는 호의는 겸애(아가페)다.

  흔히 카오신 커플링을 (약간의 호모포비아와 함께) 부정하려는 일부 독자들이 카오루가 신지에게 “아가페적 사랑을 품었다”고 주장할 때가 있는데, 이 때 그들이 사용하는 「아가페」란 성욕이 배제된 상태에서 신지 하라는 대로 다 해줘 같은 의미로 오용되는 경우가 잦다. 이런 유아적인 사랑은 신극장판 카오루에 가깝다.

  원작 카오루의 진짜 겸애(아가페)는 「하느님 아버지」 입장에서 지상의 모든 자식=인간에게 평등하게 미치는 사랑이다. 카오루는 비록 남의 자식이지만 인류라는 종 자체에 호의를 품었고, 그 종의 지속을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을 명심하자.

  신으로서의 겸애를 베풀었던 원작 카오루에 비해, 신지 하나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생명의 서인지 루프인지 지랄염병을 하는 신극장판의 카오루는 얼마나 격이 추락했는가?

  신지 하나만 싸고 돌며 집착하는 신극장판 카오루나 육성계획 카오루는 이런 상징성과 무게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원작 카오루는 인류 전체와 자기 목숨을 저울에 달아 인류를 선택했는데, 어느새 카오루가 신지와 자기를 저울에 달아 신지를 선택한 것처럼 오독되더니, 그것이 카오루를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캐릭터성으로 굳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불쏘시개에 가까운 만화판에서 카오루는 고양이를 목졸라 죽이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보여주는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외”라는 의도로 그렇게 연출한 것 같으나, 이해하기만 쉬울 뿐 서사적으로 구태의연하고 원작의 주제의식은 개나 줘 버린 꼴이다.

  그러니까 카오루가 예수라서 신극장판에서 부활한 거라는 일각의 해석들은 다 개소리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속했으면 그길로 저승 한 번 찍은 뒤 승천을 하셔야지, 자꾸 관뚜껑 열고 나오는 건 예수님이 아니고 푸닥거리 해서 쫓아내야 하는 드라큘라다.

  하지만 사람이란 헷갈리는 동물인지라, 「사랑(love)」이라고 하면 이것이 겸애(아가페)인지 우애(필리아)인지 성애(에로스)인지 다들 헷갈리기 마련이며, 당장 위에서 거론한 “(게이가 싫은) 일부 독자들” 역시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넷플릭스판 이 대사를 스튜디오 카라측의 요청으로 like 로 번역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난 적도 있다. 겸애라는 측면에서 love 가 맞다고 나도 생각은 하지만[하느님이 당신을 like하신다고 하면 얼마나 웃기게 들리는가?], 왜 그런 요청을 했을지에 대해서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람인 신지 역시 카오루에게 얼굴을 붉히며 헷갈려한다. 카오루의 겸애에 대하여 신지가 돌려준 것이 우애인지 성애인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백합충이라 관심이 없다.




credit: 밀알에 관한 해석은 『자양화 유니버스』에서 처음 제시했고, 거기에 삼위일체론으로 살을 붙인 정도가 내 독자적인 발상이다.

사실 카오루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데빌맨』의 료는 정체가 사탄인데, 카오루는 반대로 예수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에바』에서 변주된 독자적인 부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 물론 이것도 『데미안』 뚜룩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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