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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5일 금요일

「이시와라 간지의 사상과 일본의 서브컬쳐」 독후 주석

선정우 역, 『세계최종전쟁론』(2015 길찾기) 권말 보론 pp 176-191.

 붉은 글씨는 제가 글을 읽으면서 단 주석입니다.


 이시와라 간지의 ‘세계최종전쟁론’과 그 바탕이 된 다나카 지카쿠의 사상이 일본 파시즘의 원류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이시와라 간지와 다나카 지가쿠의 사상을 알아두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다. 특히 역자는 지금까지의 경력을 주로 서브컬쳐 분야, 즉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쌓아온 인물이다. 그런 역자가 뜬금없이 일본의 파시즘이나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이 책을 번역한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역자는 서브컬쳐를 포함하여 일본의 문화 안에 이시와라 간지나 그 원류에 해당하는 다나카 지가쿠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부분이 발견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우선, 이시와라 간지는 별달리 설득력 있는 논증도 없이 갑작스레 멀지 않은 장래에 ‘최종전쟁’이 일어난다고 이 책에서 말한다(이시와라 본인은 나름대로 논증을 했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본시 ‘논증’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본다). 또 실제로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이 책에서 예측한 미일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비행기의 발달이라든지 원자폭탄의 개발 사용 등 이 책의 내용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최종전쟁’이라 할만큼의 마지막 전쟁이 되진 못했다. 이 책을 읽어보아도 이시와라 간지가 예측한 전쟁이 ‘최종전쟁’이 된다는 근거에 대해서는 모호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일본인들에게 분명히 어떤 영감을 주었고, 그 상상력의 원천이 전후 일본의 서브컬처에도 동일하게 흐르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일본의 서브컬처 작품 중에는 어떠한 형태의 최종전쟁이라든지 세계의 종말, 혹은 ‘지구 전체가 통일된’ 세계정부가 등장할 때가 잦다. 특히 개인적인 일이 세계의 종말로 바로 이어지는 형태의 작품, 소위 ‘세카이계’라는 장르도 등장했는데, 물론 세카이계 작품이 이시와라 간지나 『세계최종전쟁론』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상상력의 원천에 유사점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일본 서브컬처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옴진리교도, 이시와라 간지 식의 세계종말론을 논했다는 점에서 역시나 ‘원천의 유사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 『에바』가 세카이계의 효시라고 평가받은 바 있으나, 사실 『에바』에서 주인공 측 인물들(아스카・미사토・신지)는 보완계획을 저지하고자 대결하거나 혹은 그 의의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에바』는 세카이계――세상의 존폐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청소년적 불안사고――의 원상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것의 극복마저 이미 다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에바』 이후 10여년간의 세카이계 트렌드는 그 극복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것이거나, 혹은 일면적으로 계승했던 것이 아닐까?

 게다가 실제로는 『세계최종전쟁론』 등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작품에도 이런(↓) 문장이 등장하는 점이 일본 서브컬처의 특징 중 하나로서 지적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 세상은 통일된 힘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떠한 힘이든 종래엔 파멸을 향해 폭주해 버리니까. 마법의 힘을 극대화하려다가 고대 왕국이 멸망한 것처럼 말이죠. 때문에 후안의 이상과 벨드의 야망 모두 위험합니다. 두 사람이 싸우다 힘이 쇠하면 세상은 빛과 어둠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겠죠. 세계는 항상 균형을 유지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종래에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달으니까. 하지만 저울이 균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저울을 흔들어보면 어떨까요? 한순간 분명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있겠죠.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저울은 균형을 잡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뜮임없이 역사에 개입해서 저울을 흔드는 이유는 모두 궁극적으로 로도스를 위한 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빛의 율법을 신앙하는 후안의 힘. 어둠에 따라 파괴로 귀결되는 벨드의 힘. 후안과 벨드, 어느 한쪽이 패권을 틀어쥔다면 로도스는 분명 단결된 힘 아래 안정을 되찾겠죠. 하지만 그 안정은 껍데기에 불과해요. 언젠가 그 안정이 무너지면 신들의 마지막 싸움을 연상케 할 정도의 철저한 파괴와 함께 문명이 붕괴해버리겠죠.” (로도스도 전기)

 물론 종말론 그 자체는 전세계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고, 1997년 미국의 헤븐스 게이트 사건 등과 같이 혜성이나 다른 거대한 자연현상을 종말론으로 갖다 붙이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그것은 불교적인 면이 많고, 어딘지 모르게 서브컬쳐적인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는 이런 부분이 전형적이다.

“우리가 만약 유럽이나 미주 지역과 결승전을 하게 되더라도, 결단코 그들을 증오하거나 그들과 이해관계를 다투는 것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잔학행위가 일어나겠지만 근본적인 정신은 무술대회에서 양쪽 선수가 나와 열심히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류 문명의 귀착점은 우리들이 전 능력을 발휘하여 올바르게 정정당당히 다툼으로써 신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동양인, 특히 일본인으로서는 끊임없이 이 정신을 똑바로 가지고, 적어도 적을 모욕하거나 증오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적을 충분히 존경하고 경의를 품고서 당당히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 말은 진짜인 것 같다. 진짜인 것 같으니 너무 널리 퍼뜨리지 말아라. 그렇게 퍼뜨리면 상대편도 준비를 하게 될 테니 몰래 진행시키라고. 그래서야 동아의 남자, 일본 남자가 아니다. 동방도의가 아니다. 결단코 황도가 아니다. 좋다, 준비하려면 해라. 상대편도 충분히 준비를 하고, 이쪽도 준비를 해서 당당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정당당하다느니, 최후의 선수권이라느니, 신의 심판이라느니, 전쟁을 무슨 스포츠 시합처럼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 시대의 우리로서는 읽으면서 실소를 금치 못할 수준이지만, 이시와라 간지 자신은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군인으로서 실제 전쟁을 겪고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하물며 단순한 자국 우월주의인 것도 아니다. 일본인은 정정당당해야 하고, 적에게도 경의를 품고 싸워야 한다는, 말 그대로의 ‘사무라이 정신’이다. 문제는 그런 ‘사무라이 정신’을 전체 일본인이 정말 모두가 다 동의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면 모를까, 식민지를 겪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황도’ 운운이 이상만 높지 실제로는 결코 실천할 수가 없는 뜬구름잡는 소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말 자체는 좋은 뜻이고 훌륭한 이상이니, 그 말이나 이상에 무작정 반대하긴 어렵다. 팔굉일우나 ‘전인류의 영원한 평화’나 단어 그 자체로는 당연히 전부 다 좋은 말 아니겠는가. 그런 명분을 내세운다면 누구라도 반대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들이 실천되긴 어려운데도 억지로 이상론만을 붙들고 있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서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일본에 있어서 그 모순이 극치에 달했던 기간이 만주사변으로부터 태평양전쟁까지를 일컫는 소위 ‘15년 전쟁’ 아닌가 한다.

 이런 이상론을 떠받들고, 현실론을 가지고 이상론에 반론을 펼치는 것을 뭔가 지저분한 뒷거래처럼 생각하는 것. 인간의 삶에서 그런 방향성이 가장 강력하게 발현되는 것은 아무래도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 즉 ‘사춘기’라는 시기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본래 아동들을 대상으로 했던 문화인 만화와 애니메이션 분야를 ‘청소년 대상’으로 끌어올린 나라가 바로 일본 아닌가.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바로 ‘애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이상도 볼 수 있다’는 점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특징이다. 이상론으로 가득한 『세계최종전쟁론』과 이상론을 끝까지 밀어붙였던 일본 군부. 그리고 현실에 굴복하는 것을 ‘어른의 사정’이라고 반발하고 이상에 빠져드는 사춘기의 청소년들. 그 청소년기에 가장 선호하게 된다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특성.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을 쉽게 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에 나서는 로봇의 탑승자가 대개 바로 그 사춘기 청소년이라는 사실은 왠지 아이러니컬하게도 보인다. 말하자면 『세계최종전쟁론』의 이시와라 간지나 당시의 우국충정어린 일본 군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는 것에 순진하게 그대로 따랐던 당시의 일본 젊은이들과 국민들, 이 모두가 ‘어른이 되지 못한’, 아니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 이 논평은 이시와라 간지가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다 잘리고 태평양전쟁기에 아무 실권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일제시대 일본 안팎의 행위자들을 단일한 파시즘으로 정의하고 적대하는 한국 독자의 정서를 고려해 엄밀한 구분을 뭉갠 것 같은데, 반론하자면 이시와라는 도조를 비롯한 통제파 군부야말로 자기 이상을 ‘더럽힌’ 어른들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에바』에서 겐도나 제레나 모두 악인들이지만, 제레가 자기 나름의 이상을 추구한 것과 달리, 겐도는 그 이상주의와 보완계획을 마누라 다시 만나는 사리사욕으로 등쳐먹은 것과도 유사하다 하겠다.

 오츠카 에이지는 『이야기 체조』에서 일본 문학의 특징으로 ‘Bildungsroman(성장소설)의 부재’를 들었다. 등장인물이 스스로 자아실현, 즉 ‘성장’(=어른이 된다는 것)을 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바로 빌둥스로망인데, 원래 독일에서 시민사회가 성립하고 계몽주의가 유포되면서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필두로 하여 이런 종류의 소설이 유행했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등이 빌둥스로망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오츠카 에이지는 일본문학에는 그런 ‘성장소설’의 전통이 없고, 그런 특징이 ‘사소설’로 대표되는 일본적 문학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체조』나 『캐릭터 메이커』에서 설명했다. 반대로 오츠카 에이지는 자신이 일본에서 만화나 애니메이션 분야의 평론가로 여겨지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개별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비평을 잘 하지 않는다고 2012년 역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는데, 그러면서 유일하게 ‘비평을 통해 맞서지 않으면 안 될’ 가치가 있는 작품은 지브리 애니메이션과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신카이 마코토 작품 정도라고 언급했다. 이들 작품에는 ‘성장’이 그려져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앞서 언급한 ‘빌둥스로망’의 대표작 중 하나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장편 『바람이 분다』로 이어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바람이 분다』에는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공격하지만 다 잊었고 독일과 일본은 파멸을 향해 가고 있다는 발언을 하는 독일인 카스토르프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의 산』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와 똑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오츠카 에이지는 미야자키 감독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통해 보여준 인물의 ‘성장’이, 다른 일본 문학이나 서브컬처 작품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평가한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그런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에 성장소설의 대표격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 문화의 원천 중에 『세계최종전쟁론』과도 이어지는 ‘성장에 대한 거부’ 측면이 있다는 역자의 의문이 일견 너무 과장된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동화작가 미야자와 켄지가 다나카 지가쿠, 나아가서는 이사와라 간지와도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런 생각이 완전히 얼토당토 않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미완의 파시즘』에는 미야자와 켄지가 다나카 지가쿠가 만든 국주회에 입회했던 사실이 밝혀져 있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미야자와 켄지나 그의 작품 자체가 소위 말하는 ‘우익적’이라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본 문화 안에 『법화경』과 일본의 승려 일련의 소위 ‘일련주의’가 상당히 깊이 내포되어 있다는 그 자체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앞서도 언급했듯 일련주의가 그 자체나 다나카 지가쿠의 사상 자체가 곧 우익이라고 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더 깊은 사고를 제한하는 일종의 ‘사고정지’가 될 수 있다. 역자는 그런 표피적인 문제보다도, 이런 일본 문화 속의 이상주의적 요소가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하고 ‘성장’을 거부하는 ‘사춘기’ 특유의 현상이고 일본 문화의 상당부분이 그런 ‘성장을 거부하고 언제까지나 청소년이고 싶어하는’ 특성이 기대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더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중략) 이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에서는 ‘성장’이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오츠카 에이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를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호평하는 작품’으로 손꼽는데, 그 이유 역시도 그런 통과의례를 통한 성장의 모습과 제작진들의 작가로서의 고뇌를 제대로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성장을 거부하는’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본 서브컬처 분야에서 성장을 거부하는 모습이라고 할 때 문득 바로 떠오르는 것은 ‘영원한 학원제’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영화 『시끌별 녀석들 2』은 일본에서 오타쿠 사이에 상당히 호평을 받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위 ‘게임적 리얼리즘’(아즈마 히로키가 정의한)의 대표격인 작품으로서,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반복되는 시간’을 그렸다. 그런데 『시끌별 녀석들 2』에서는 그 반복되는 시간의 내용이 마침 고등학교의 축제, 즉 일본에서 ‘학원제’라고 부르는 기간이었다. 역시나 ‘청소년기’, ‘사춘기’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또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한 TV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2기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방학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 오시이의 『시끌별 녀석들 2』와 『하루히』의 엔드리스 에이트도 결국 루프를 깨뜨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원한 사춘기’를 문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에바』에서 인류보완계획이 결국 부정의 대상인 것과 같은 것이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간의 달리는 소녀』에서는 여고생인 주인공이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자신의 연애감정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백을 받기 전 시간으로 계속해서 ‘타임리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인공 마코토가 남자친구 둘 중에서 애인을 결정하지 않고 남녀 간의 감정없이 친구로서 셋이 계속해서 지내고 싶어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성장을 거부하는’ 행위로 보인다. 하지만 마코토의 그런 ‘타임리프’는 곧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게 되고, 결국 마코토는 성장을 택한다. 오츠카 에이지식으로 설명하자면 이 역시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사례에서 벗어난, ‘비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데,
  • 글쎄, 호소다의 작품은 청소년기의 이상주의를 통과의례로써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청춘과 이상주의의 가치 자체를 냉소하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호소다가 내세우는 가족주의가 청춘예찬의 건전한 대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예컨대 『늑대아이』에서 모종의 사디즘적 관음이 읽히지 않는가?
이런 사례들이 존재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작품도 현대 일본에는 상당히 많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라이트노벨의 주인공은 아무런 통과의례 없이도 처음부터 강한 존재이고, 주변의 여자들은 별다른 이유없이 주인공 남자에게 반하며, 작품의 스토리에 완결이 찾아오지 않아 단행본이 100권이 넘어가도 영원히 끝나지 않거나, 애니메이션의 경우 1기, 2기의 끝이 곧 그 작품 전체 ‘스토리의 끝’을 그리지 않는 경우가 즐비하다는 이야기다.

 특정 개별 작품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지기를 바라진 않기 때문에 굳이 사례를 들진 않겠다. 하지만 그런 ‘성장을 거부하는’ 작품에 쉽게 빠져드는 계층이 혐한이나 반여성주의에도 쉽게 동화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매스컴이나 정치인들이 뒤에서 한국과 손을 잡고 억지로 한류 열풍을 만들었다든지, 주류 역사학계에는 어떤 특정한 힘을 가진 세력이 있어 그들엑 반대하는 이론을 묵살하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에 빠져들기 쉬운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의 청소년기를 돌아보더라도, 어른이 되는 것을 ‘성장’보다는 ‘부패’로 바라보고, ‘20살이 넘으면 자살하겠다’고 하며 성장을 거부하는, 즉 어린이인 채로 있는 것이야말로 ‘순수’하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 아니겠는가.
  • 여기서 평자는 오타쿠적 사고와 음모론적 사고에 동형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두에 언급된 옴진리교는 80-90년대 일본에서 독버섯처럼 유행한 오컬티즘을 자양분으로 삼은 위사(僞史)운동, ‘픽션 속의 삶’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과거 일부 서양 오타쿠들이 『에바』에 등장하는 유대-기독교 신비주의를 맥거핀이 아닌 작품의 핵심으로 해석하고, 『에바』를 기독교 상징주의를 도구로 사용한 애니가 아니라 기독교 상징주의 애니 그 자체라고 결론내리던 행위는, 90년대 일본의 역사적 맥락을 생각해 볼 때 『에바』에서 표상하면서 동시에 극복하고자 했던 그 90년대적인 무언가――옴진리교적이고 음모론적인 무언가――를 긍정해 버리는 행위라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츠루마키가 직접 나서서 “우리는 철학을 모른다”고 부정한 것도 곱씹어 볼만하다. 『에바』 제작진이 정말로 철학을 하나도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미야자와 켄지로 대변되는 일본 문화 속에 대포된 이상주의가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청소년기에 머무르려 하는 ‘성장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일본의 작품들을 살펴볼 때에 한번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나 밀리터리와는 거리가 멀고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 중심으로 활동해왔던 본 역자가 이 『세계최종전쟁론』을 번역하게 된 계기이다. 이시와라 간지나 『세계최종전쟁론』이 실은 일본의 종교, 사상,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실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와도 연관지어 생각할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런 부분이 좀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 이 평론은 『에바』 구작이 왜 가치있는 이야기였는지 설명하는 동시에, 평론가들이 왜 신극장판에 그렇게 열광하는지 포인트도 읽어낼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 구작에서 보여주기만 했던 것을, 신극에서는 신지를 그냥 몸땡이까지 어른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말해주기’로 들이대고 있는 것이, ‘성장의 가치’, ‘작가로서의 고뇌’를 명시화한 것으로 보인 것일까?
    하지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로 떠드는 것은 단순한 픽션으로서의 기교의 퇴행은 아닌가? 신극에서 인물들이 거친 사건들이 제대로 된 성장의 통과의례가 맞기는 한가? 예컨대 쿠로나미가 터져죽는 게 소년의 통과의례라면 그건 정말 모욕적이지 않은가? 구작에서 아스카의 입을 빌어 철저하게 가치를 부정해야 했던 인류보완계획을, 왜 신극에서는 뭉개고 넘어가면서 겐도(구일본군 같은 새끼)를 소원성취시켜 줬는가?
    이런 부분들에서 우리는 신극에 대한 비평가들의 호평을 파훼할 수 있는 대항논리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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