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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안노 히데아키 × 노비 노비타

2022년 8월 28일 일요일

사랑스러운 아스카의 비극

 옛날부터 에바 보고 정신병 걸릴 것 같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유년기의 정신적으로 가장 위태롭던 시점에 에바를 봄으로써, 특히 아스카를 통해서 힘든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인지 조리있게 설명할 수 없었고,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거기에 대한 나름의 설명이 가능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에바 해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독하는 것 중 하나가, 카지가 아스카에게 철벽을 쳤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카지가 아스카가 자신에게 들러붙는 것을 교정해주기 위해 신지를 소개해 줬다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있다. 미성년자 여자애가 자신의 프라이빗한 선을 넘어올 때, 그녀를 선 밖으로 내몰고 다시 넘어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 위에 벽을 쌓는 것이 “철벽을 치는 것”이라면,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만화판의 카지는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원작 애니메이션의 카지는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다.

  원작의 카지는 아스카가 자기 선 안쪽을 드나들든가 말든가, 들락날락 할때마다 애 상태가 악화되든가 말든가, 관심이 없다. 철벽을 친 게 아니라 그냥 존재의 무시를 한 거다. 카지라는 캐릭터 자체가 원래 진실의 추구라는 목적에 매몰되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미사토나 신지에게는 관심과 연민을 느끼는 반면에 아스카는 억까 수준으로 무시한다. 대표적으로 제이십이화의 항공모함 장면. 아스카가 “미사토가 마중 오겠네. 아, 미사토가 누구냐면 카지씨 전에 내 담당〜”이라며 마치 카지가 미사토를 모를 거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하는데, 미사토의 전 애인인 카지는 미사토와 아는 사이라고 그것 하나 정정해주는 것이 귀찮아서 삼백안을 홉뜨고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카지는 아스카라는 개아(個我)의 바깥의 세상이 이 개아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사실 카지 뿐만이 아니라 네르프의 모든 어른들이 아스카를 무시한다. 결말까지 다 보고 나서 진상을 다 알게 되면 당연한 얘기인 것이, 초호기와 신지는 인류보완계획이라는 메인 이벤트의 주역이고, 이호기와 아스카는 매주 쳐들어오는 사도들을 꾸역꾸역 퇴치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서 아스카와 이호기는 자폭해버린 영호기 및 아야나미 클론과 동급의 폐기가능한 소모품이다. 작중에서 리츠코가 이호기의 코어를 교체할 것을 검토하는 것을 볼 때 아스카라는 인간의 가치는 이호기라는 메카의 가치보다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진실을 아는 인물일수록, 즉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계 그 자체와 일치되는 인물일수록 아스카에게 무관심하다. 반대로 진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던 미사토가 그나마 아스카에게 최소한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중반 이후로 미사토도 뒤져버린 카지의 뒤를 이어서 진실사냥꾼이 되면서 완전히 어른들의 세계로 가버리고(즉 아스카를 버리고 카지에게 가버린 것), 아스카와의 관계는 파탄난다.

  요약하자면 어른들과 어른들이 만들고 지배하는 세계・세상・운명은 아스카에게 무관심하다.

  여기에 대해서 아스카의 입장과 행동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아스카의 심리 기저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은 생존욕구다. 그리고 이 생존욕구는 인정욕구와 뒤얽혀서 거의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일체화되어 있다. 이 두 욕구가 뒤얽힌 원인은 당연히 유년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인데, 아스카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어야 마땅할 어머니에게 살해당할 뻔했고, 그 뒤 애비가 재혼한 계모는 “저 애가 당신 애지 내 애냐. 너무 어른스러워서 꺼림칙하다”고 말하고(실제로 한 말) 애비도 거기 동조하는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 생존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애비와 계모에게 계속 붙어 살아온 정황을 보건대 외가 친척도 존재하지 않는데, 애비와 계모에게 버림받은 미취학아동의 미래가 어떠한 것인지 명석한――게다가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해 보고 그것을 혐오하게 된――아스카는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스카의 목숨줄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에바 파일럿으로서 네르프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고, 아스카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는 자신의 실존과 에바 파일럿으로서 인정받는 것은 분리불가능하게 일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코어가 불량인 이호기로 제십오화까지 싱크로율 탑을 찍은 것은 아스카의 강렬한 인정욕구=생존욕구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세상에 인정받아서 생존하겠다는 아스카의 행동강령은 사실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세계는 음침한 어른들이 인류보완계획 따위 음모로 레일을 깔아놓은 부조리한 세계고, 그 세계에서 아스카와 이호기의 역할은 대체가능한 소모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의 분위기가 반전하는 제십육화 이후로 아스카는 에바 파일럿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사실 이 의구심 자체도 훈련 1도 없이 애미빨로 에바를 움직일 수 있는 신지의 존재 자체로부터 시작된 것인데――믿음이 흔들리자 싱크로율이 급락하고 급락하면서 믿음이 더 흔들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평생 세계를 상대로 생존을 위한 인정투쟁을 벌이던 아스카이기 때문에, 그 투쟁이 사실 불가능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과 일체화된 자기의 생존도 사실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삶의 의지까지 상실해 버리기에 이른다.

  원작의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만화판 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2009년 신지에게 남자의 우정은 토우지가 있고 히로인은 아야나미가 있으니 아스카는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소 뒷발에 쥐 잡은 격으로 원작에서 아스카의 비극이 어떻게 완성되는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스카는 이 세계에 “굳이 없어도 되는 존재”인데, 자신이 생존할 가치가 있음을 인정받기 위해 세계를 상대로 불가능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각본가로서 무능한 사다모토는 아스카의 비극의 구조와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화판의 카지를 아스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철벽을 치는 참된 어른으로 만들어 놓았다.
(* 여담이지만, 원래 창작물의 주제, 메신저로서 창작자의 역량이 드러나는 부분, 장르적 최소요구치 뿐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이야기를 부여하고 싶을 때 그것이 들어가는 공간이 바로 “왜 굳이”가 아닐까? “장르법칙상 없어도 되는데 넣은 것(없어도 되는데 왜 굳이 넣었느냐?)”, “장르법칙상 있을 만한데 뺀 것(있어야 할텐데 왜 굳이 뺐느냐?)” 말이다. 이런 “왜 굳이”야말로 작품의 심장이고, 그것이 없는 작품은 심장 없이 뼈만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사다모토의 만화판이 그렇다는 소리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아스카는 어떻게 해야 이 비극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어딘가나무위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아스카는 몰락이 예정된 불행한 파일럿이니까 에바를 타지 않는 행복을 찾아야 했나? (* 00년대까지 신지가 찌질이라고 까인 것에 대한 반작용인지, 나무위키에서는 신지의 파일럿으로서의 기량과 인성을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 시쳇말로 ‘억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반대급부로 아스카의 파일럿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부정되다시피하고 있다) 그 물음에 답을 내놓기 위해서는 일단 아스카에게 에바를 타지 않는 선택지가 존재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스카의 에바에 대한 집착은 곧 삶에 대한 집착이고, 이건 분리되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착 때문에 아스카의 인생이 망했다면, 그건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인생이 망한 것이라는 이상한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이호기 파일럿이 되지 못했다면 아스카는 생존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꽤 많은 에바 2차창작, 심지어 공식매체인 만화판과 신극장판마저 “에바에 타면 불행해지니까 에바가…… 에바가 없어야 할 것 아니냐?”는 테제를 내세우고 있는데(ㅆㅂ 공식매체가 팬픽들하고 동급), 나는 그런 테제를 혐오한다. 아니, 에바가 없으면 사키엘 선에서 인류 대충 망했다니까?

  잘 생각해 보면, 아스카의 투쟁은 특이한 것이 아니고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문제다. 그래서 아스카가 인간 개아의 상징으로서 보완계획을 거부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학업이든 노동이든, 인간이 매진하게 되는 경로들은 대부분이 자발적 의사로 결정하기보다는 세계 외부에서 이미 깔려져 있는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뿐이냐? 사람이 소속감을 가지게 되는 민족・계급・성별・연고・정체성 같은 것들도 다 주어지는 거지, 자의로 선택하는 게 아니다. 그 경로를 거부하고 틀을 벗어나 굳이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극히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삶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포기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정신적 대범함이나 물질적 기반 둘 다 없는 보통 사람들은, 주어진 역할 위에서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아스카의 에바를 통한 인정투쟁이자 생존투쟁이 그 자신을 갉아먹은 측면이 있지만, 우리 모두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학업・노동・기타등등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사회적 활동 중에 안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고 가르침 받았지만, 자본제 사회에서 직업은 나 아닌 다른 자에게 돌아갈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며, 나는 내 직업과 그 산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고, 내 자리는 얼마든지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투쟁은 보편적인 투쟁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투쟁이다.

  그리고 이 투쟁이 불가능한 투쟁이기 때문에, 아스카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세상은, 그리고 그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겐도・후유츠키・리츠코・카지・제레 등등 에바 세계의 「어른」들)은 아스카가 죽든 말든 관심이 없다. 왜냐?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부속품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스카는 이호기 코어가 불량품이기에 스펙상 성능은 토우지・켄스케・히카리보다도 떨어졌을 것이다. 10년 동안의 강박적인 노력으로 그걸 억지로 메꿔왔을 뿐. 하지만 아스카가, 즉 우리가 노력을 하든 말든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을 만들고 지배하는 자들이 관심이 있느냐? 그들은 1도 관심이 없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세상이 나를 억까한다는 현타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한 번 꺾인 아스카는 손목을 긋고 뒤르켐이 말한 숙명론적 자살을 기도한다. 물론 여기서 아스카가 죽어버렸다면 이야기는 끝이겠지만, 우리가 다들 알듯이 아스카는 부활한다. 아스카의 부활은 두 가지가 겹쳤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당연히 이호기 안의 친모의 존재를 느껴 완전한 싱크로를 이룰 수 있음으로써 10년 훈련의 경험치를 400%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모든 세상의 억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무서운 것, 싫은 것이고, 나는 살고 싶다는 강렬한 삶의 의지다.

  세상이 나를 억까해서 나는 살 수가 없다.
  나는 객관적으로 무가치하다.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살고 싶다.
  내가 아니라 나를 억까하는 세상이 문제라는 의지.
  개인이 아니라 너무 거대해서 개인에게 거의 숙명처럼 보이는 세계가 잘못된 것이라는 절규.

  에바 자체가 재앙의 근원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는 수단인 노동이나 학업, 소속감 자체가 악이니까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니다. 에바가 없으면 사키엘 선에서 인류 망했고, 노동이 없으면 생산과 생존도 없다. 진짜 재앙의 근원은 개인의 존엄을 도외시하는 인류보완계획 같은 거대한 구조,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어른들인 것이다. 에바는 보완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이호기의 한마리당 20초 무쌍에서 보듯이 그것을 잠시나마 막아서는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제레의 압도적인 폭력 앞에 아스카의 부활은 「거짓된 부활」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나무위키에서 말하듯이 아스카가 엄마나 에바에 대한 집착을 못 버려서 그리 된 것이냐? 그럼 아스카가 그 시점에서 에바를 포기하고 전자대가 네르프 동료들을 도륙하건 말건, 제레가 인류멸망을 획책하건 말건 손놓고 있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거야말로 타자들과의 연결과 거기서 발생하는 책임 사이에서의 인간의 실존을 부정하는 말도 안 되는 유아론이다. 그래서 나는 아스카가 에바를 타지 않게 해주겠다며 의사도 안 묻고 사출해 버린 신극장판이나, 아스카를 그루밍해서 신지와의 섹스밖에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놓은 Re-take를 내가 끔찍하게 싫어한다. 나한테 아스카는 꺾이고 또 꺾여도, 또는 여러 번 꺾여 봤기 때문에 오롯이 가치있는 나로서 생존하고 싶다고 절규하는 존엄한 인간 개아의 상징이니까.
(*사실 아스카의 인생은 꺾이고 부활하고의 반복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엄마의 동반자살 시도 때 한 번, 싱크로율 제로로 자살시도했을 때 한 번, 그리고 양산기에게 유린당했을 때 또 한 번)

  그래서 비록 압도적인 폭력에 다시 한번 꺾였음에도, 보완계획(행동 뿐만이 아니라 정신마저 합일시키겠다는 전체주의의 극치)에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유일한 목소리를 아스카가 부르짖은 건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큰 울림을 남긴다. 세상과 어른들이 이끄는 대로 「달콤한 죽음」에 몸을 맡기는 건 「죽어도(실제로 죽은 상태였고) 싫다」고.

  소류 아스카 랭글리는 세계를 상대로 불가능한 투쟁을 했다. 그는 비극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원래 모든 인간들은 세계를 상대로 불가능한 투쟁을 벌이고 있고, 그 불가능의 원인은 인간 개아의 책임이 아니다. 꺾이고 또 꺾일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진짜 원흉――세계――에 맞서 생존과 인정을 요구하는 불가능한 투쟁을 계속할 수 있다. 또한 계속해야만 한다. 그것이 존엄한 인간으로서 실존하기 위한 조건이다.

나는 불가능을 갈망하는 자를 사랑한다.
Den lieb'ich, der Unmögliches begehrt.

ㅡ 괴테 ㅡ

댓글 1개:

  1. 에바 TVA에서 아스카가 리타이어한 이후 카오루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 시점부터 급격하게 재미가 없어지고 카오루조차 퇴장하고 나서는 내러티브가 동력을 잃고 붕괴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글을 보니 에바 TVA의 진정한 안타고니스트는 사도도 제레도 아닌 아스카였다고 해석하면 TVA 종반부의 난맥상이 완전히 이해가 됩니다. 안노도 그걸 나중에라도 깨달았기 때문에 EOE의 결말에 신지의 카운터파트로 아스카를 배치했던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데 선생님이 요즘 신극 욕하시는거 보면 그냥 얻어걸린건가 싶기도 하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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