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게시물

대담: 안노 히데아키 × 노비 노비타

2022년 10월 16일 일요일

허구적 사실성과 사소설 사이의 긴장과 그 파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파탄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잘 이해되어서, "이 캐릭터들로 할 수 있는 이야기, 해야 할 이야기가 고작 이딴 거냐?" 는 쪽이 문제인 것이지.

  원작 『신세기 에반게리온』(나는 1995-1997 NGE를 가리켜 ‘구작’이라는 말보다 ‘원작’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선호한다. 이것만이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의 캐릭터들은 독립된 세계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얻고 실존하는――그야말로 창작자의 손을 벗어나서 날뛰는 괴물들이었다. 안노의 오토픽션이 가장 강하게 개입된 이카리 부자가 그나마 그 정도가 덜하고(그래서 이 두 남자야말로 사실은 이 세계 가운데서 가장 수동적인 존재다).

  광기에 가까운 캐릭터들의 파토스, 소외된 존재에게 허락되지 않는 실존을 갈구하다 파멸하는 하마르티아 같은 괴물성 때문에 그들에게 매료되는 것인데, 감독 안노의 사소설의 대변자로서의 주인공 신지의 이야기로 극을 마무리하려면, 그 나머지 인물들은 결국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 『EOE』가 마지막에 유아론적 세카이계로 마무리된 것도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 긴장이 파열된 것이다.

  그래서 신극장판이 그 유아론적 한계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느냐? 그러기는커녕 이제는 아예 대놓고 신지가 신적인 존재――즉 “작가”가 되어서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갈등(그런게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겠지만)을 초월적 위치에서 매듭지어줘 버린다. 결국 그들은 신지를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는, 주체성과 사실성을 상실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오히려 구작의 모순을 더 키운 셈이다.

  각자 실존하며 각자의 맥락과 서사를 가지던 인물들이 그 독립성을 상실하고 모두 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이와 비슷한 작법을 우리는 이미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만화판에서 본 적 있다. 심지어 사다모토는 처음부터 신지가 주인공인데 웬 잡것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많냐고 불만스러워했는데, 그래서 사다모토는 주인공 신지가 인류보완계획에 이용당한다는 메인 플롯과 한 발짝 떨어져 존재하던 아스카를 유독 싫어하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아스카의 비극의 성격을 이해 못한 사다모토가 머저리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어찌 보면 사다모토는 신지를 중심으로 펼치는 오토픽션과 신지 바깥에 생명력을 갖고 구축되어버린 세계 둘을 모두 가지고 가려다 결국 후자를 버리게 되는 안노를 비웃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욕심부리지 말고 처음부터 사소설답게 굴면 되지 않냐고. 그래서 오로지 신지만을 중심으로 전개된 (심지어 리츠코 서사의 등뼈인 이로울전은 신지가 하는게 없다고 통으로 컷당했다) 만화판이 애니판에 비해서 좋은 이야기를 보여줬느냐? 전혀 아니었다.

  신극장판의 결말은 결국 『에바』는 안노의 사소설이라는 것을 쉽고 노골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구작 시절부터 『에바』의 등장인물들은 이미 안노라는 창작자의 역량을 벗어나 생명력을 얻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는 것이고, 사소설이 이 세계를 잡아먹는 것은 엄밀히 말해 그 생명력의 박탈이었다는 것이다.

  『EOE』의 결말은 비록 방법론적으로 유아론적이었지만 이 박탈을 명시하지 않아 해석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세계의 파탄이 노골화되지 않았다. 심지어 등장인물들 가운데 최대의 괴물인 아스카는 그 와중에도 너(=신지=안노=창작자)에게 존재론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죽어도 싫다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안노가 신극장판에서 아스카의 이름을 바꾸고 설정을 바꾸고 외모 말고는 공통점이 없는 아예 다른 인물로 만들어 버린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안노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오토픽션으로 투영하고자 하는 창작자 안노는, 소류 아스카 랭글리라는 괴물을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신극장판은 사소설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EOE』의 결말을 “쉽게 설명함(=해석의 여지를 없앰)”으로 인해 『EOE』에서는 은폐되었던 파탄 역시 노골화시켰다. “안노의 『에바』”와 “아스카, 미사토, 신지, 레이, 리츠코, ……의 『에바』”는 양립할 수 없다. 양립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게 『EOE』였고, 양립할 수 없음이 폭로된 게 신극장판이다.

  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게 무조건 글러먹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연구는 첨예한 긴장을 돌파하는 데서 나오는 법이다. 사다모토처럼 진작 포기해버리지 않고 그 긴장을 최후까지 놓지 않았다는 점은 원작 『에바』의,, 그 당시의 안노의 미덕이자 성취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안노는 이 긴장을 끝내 돌파해낼 능력은 없었고, 최후의 양자택일의 순간에는 항상 사소설 쪽을 선택했다. 『EOE』는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김으로써 작품이 안노의 의도를 넘어서 의미를 확장할 수 있었지만, 신극장판은 그런 여지를 안노 스스로 없앰으로써 살아 날뛰던 캐릭터들의 생명력을 압살했다. 그래서 원작의 캐릭터들을, 그들의 생명력을 기억하고 거기 매료되었던 관객이라면 신극장판을 받아들고 황망할 따름인 것이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생명력이 정말 아예 끊어진 것이냐? 신극장판의 캐릭터들은 그렇겠지만, 한참 전에 안노로부터 독립되어 버린, 여전히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텍스트로서 원작 『에바』는 멀쩡히 존재하고 있다.




  ……사실 신극장판은 세계와 사소설 사이의 긴장과 양자택일을 논하기 이전에 세계와 인물의 빌딩 자체가 허접하다는 느낌이기는 하지만, 맥락상 여기서 더 붙여서 할 얘기는 아닌 듯.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