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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안노 히데아키 × 노비 노비타

2022년 9월 17일 토요일

햄벨스 선생의 에반게리온 해석에 대한 첨언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한 지칠 줄 모르는 지적 성실성의 소유자인 햄벨스 선생께서 네이버 프리미엄 『혁명 읽는 사람』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글을 투고하셨습니다. 이 포스팅은 해당 글에 대한 보론 겸 일부 각론에 대한 반론입니다.

  해당 글에서는 『에바』를 전체적으로 정신분석학의 틀에서 분석해서, 어머니와의 합일(근친상간의 금기)를 중심으로 가부장제의 청산과 문명의 재구상을 그리고 있다고 독해하고 있습니다. 『에바』는 작중에서 직접적으로 정신분석에 관한 용어나 연출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이에 근거한 분석은 학계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익히 많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글의 내용도 그런 관점들을 적절히 종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글의 전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제가 반론할 만한 사항이 없습니다. 또 정신분석에 관해 시사상식 수준 이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제가 이론적으로 첨언하는 것도 건방진 일일 것입니다. 하여 제가 반론의 성격을 가진 첨언을 하고자 하는 부분은 작품 텍스트의 지엽적인 몇몇 내용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 점 감안 부탁드립니다.

1. 아스카의 「거짓된 부활」에 대해서


  햄 쌤의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여성들은 성기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와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 없고, 이 가부장제 구조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성기를 가진 유일한 존재인 여성화된 남성 이카리 신지만이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부장제의 재생산도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재생산과정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좋은 일반론입니다. 글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유이라는 어머니가 신지라는 아들과 아야나미라는 딸을 어떻게 차별하는지가 그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무라세 히로미의 1997년 논문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아스카에 대해서 같은 분석틀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딸은 “어머니와의 합일”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일까요? 아스카의 부활과 어머니와의 합일을 아스카가 자신의 인형됨을 인정하고 어머니의 인형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아스카의 부활에 대해서는 무라세의 논문에서 분석하는 것과 같이, 소녀가 어머니를 혐오함으로써 성인이 되고, 또 성인이 되고 나서는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성장의 통과의례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스카의 부활이 거짓된 부활이 된 것은 제레의 압도적 폭력 앞에 강제로 꺾이고 만 것이지, 어머니의 존재를 인지하고 합일한 것 자체가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스카와 신지에 대해서 이 분석들이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는 이상화되고 관념화된 어머니로서 정신분석학적 아키타입 그 자체(이것을 현종희 쌤은 “미야자키적 존재”라고 형용했던 것인데)이기에 절대 딸(아야나미)과 합일될 수 없지만, 작중의 다른 어머니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스카의 어머니 쿄코는 딸이 자신과 함께 죽어주기를 바라는 의지와 딸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혼재하는 인물입니다. 리츠코의 어머니 나오코는 직접적으로 그녀의 세 인격(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직업인으로서)이 분열되어 경쟁하고 있음이 명시되고 있습니다. 유이를 제외한 어머니들은 현실에 실재할법한 리얼한 어머니들이고, 현실의 어머니들은 관념의 어머니인 유이와 달리 아키타입 그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딸과 갈등하면서도 딸을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의 어머니이고, 아들이나 남편보다 딸이 더 소중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물론 나오코는 결국 리츠코를 배신해 버리지만, 그 경우에서도 “어머니로서의 인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혹을 버린 아스카는 최강 (드립 아님)
특히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은, 부활한 아스카와 이호기가 제레의 인류보완계획을 실질적으로 저지하는 최후의 선이었고, 심지어 거의 저지하는 데 성공할 뻔 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존속이 달려 있는 이 위대한 임무를 최후에 미사토에게 받아 수행한 것은 아스카입니다. 신지는 미사토에게 부탁을 받기는 했지만 아스카의 죽음을 보고는 다 포기해 버립니다. 말하자면, 딸과 어머니의 합일, 즉 여성과 여성의 유대야말로 아들과 어머니의, 남성과 여성의 합일로 재생산되는 파멸적 세계를 지향하는 늙은 남자들(제레)에게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유일하게 실질적인 위협이고(신지는 위협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도구로 이용됩니다), 늙은 남자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압도적인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유대를 꺾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스카의 부활이 어머니에 대한 종속으로서 실패가 예정된 것이었고, 그녀의 관계짓기는 아무리 여성화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남자에 불과한 신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여성의 입장에서 그것은 모녀의 화해, 레즈비어니즘 같은 여성간의 유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패배주의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에바』는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그것은 어디까지 안노의 성공/실패인가?


  그렇다면 『에바』는 여성 간의 유대를 패배주의적으로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품인 것일까요? 저도 햄 쌤과 마찬가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에바』는 분명히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여주고 있고, 그 가능성들 가운데 여성 간의 유대와, (여성화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모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능성이 서로 분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에바』는 남자 따위 더 이상 필요 없는(아스카는 말합니다. 엄마가 있으면 아빠는 필요 없다고) 여성들의 가능성을 묘사하고, 폭력적인 가부장(겐도)과 무책임한 남성성(카지)을 부정적으로 그립니다. 하지만 결말을 짓는 것은 (햄 쌤이 지적해 주신 대로) 어쨌든 남자인 신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분열은 안노 개인의 분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에바』의 제작과정에 투하된 노동의 성격에 기인하기도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안노는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스태프들을 부릴 수 있는 그런 “오야지”(전자본주의적 장인master과 유사한)가 아닙니다. 안노는 신지처럼 “여성화”된 남자이고(시쳇말로는 번탈남 하남자라고도 할 것인데), 베이비붐 세대의 영감들과 달리 그 혼자서 작품을 다 만들어낼 정력이나 카리스마가 없습니다(엄밀히 말하자면 사실 영감들조차도 그런 능력은 없는 것이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집단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소설이나 만화와 달리 누가 어디까지 이 작품에 기여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사후에 관계자들의 회고담이나 증언이 나와서 그것들을 역사적으로 재구하지 않는 이상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이 노동이라 함은 애니메이션 동화 제작 같은 육체노동 뿐만이 아니라, 아이디어나 각본 같은 정신노동의 측면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증언들만 취합해 보아도, 쇼펜하우어의 우화를 인용해서 개아 사이의 소통의 불가능성이라는 테마를 제안한 것은 각본가 사츠카와 아키오였고, 리얼한 어머니 나오코의 분열된 인격의 서사를 쓴 것은 용병인 이소 미츠오였습니다. 이소의 경우에는 원래 작화만 도와주러 왔다가, 이름만 정해놓고 내용이 없었던 각종 SF 설정들(지오프론트를 비롯해서)의 구체화까지 도맡았지요. 물론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취합해서 승인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 하겠지만, 안노가 어디까지 의식적으로 그것을 수행했는지는 현재로서 미지수입니다.

  어쩌면 95년 시점에서 안노는 스승 미야자키의 모성찬양에 대한 관성적 추종과 폭력적인 자신의 친아버지에 대한 반감 정도만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떻게 대안을 만들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미야자키가 일방적인 모성찬양에서 벗어났던 『나우시카』 만화판을 안노가 극찬한 것을 볼 때, 안노에게도 모성의 찬양과 모성으로의 회귀만으로 가부장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인식 정도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 구체적인 대안을 생각할 상상력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결말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같지도 않은 결합)으로 귀결된 것이겠지요. 때문에 미야자키즘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안노의 기여분이고, 신선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단서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여가 더 크지 않았을까 저는 의심하는 것입니다. 안노가 전권을 가지고 만든 신극장판이 (스포일러 가림) 리얼의 여성을 다루기를 포기한 채, 이카리 부자를 중심으로 유아론적으로 폐색해 버리고, 다른 등장인물들은 남녀 한 쌍과 아이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을 의무적으로 이루는 결말을 맞은 것을 볼 때 이런 의심은 더욱 강화됩니다.

  햄 쌤의 말씀처럼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년-1997년)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열렬히 동의합니다. 실패한 것은 안노 히데아키입니다. 본인이 밝힌 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시달린 소년 안노는 가부장제에 대한 반감은 가지고 있었으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실패했고, 더 이상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에바』라는 텍스트의 생명력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이 작품을 안노로부터 분리해야 한타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바』를 안노의 사소설・그림일기라고 해석하며 텍스트에 내재된 모든 의도를 안노의 심급으로 돌리려 하는 사람들(그리고 이 텍스트를 퇴보된 형태로 사유화하려 하는――어느새 “늙은 남자”가 되어 버린 안노 그 자신)과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서는 내재적으로는 여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제공되는 급진적 재해석의 여지에서, 외재적으로는 안노 이외의 스태프들의 구체적 노동의 기여분을 재구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햄벨스 쌤의 『혁명 읽는 사람』에는 이번 에반게리온 글 말고도, 유료구독할 가치가 있는 다양한 재미있는 글이 많이 올라옵니다. 제 블로그 방문자 분들도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되신다면 방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追記: 햄 쌤께서 재반론을 해 주셨습니다.

  우선 딸이 어머니와 화해하게 되는 것은 그저 어른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남성과 연결된 존재인) ‘어머니’가 되어서 가능한 것이라는 지적은 제가 백합충 레즈비어니즘에 치우쳐 일부러 뭉개고 지나간 지점을 정확하게 찔러주신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와의 진정한 화해는 어머니를 타자로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러므로 (딸과의 자폭을 찬성한) “어머니로서의 어머니”보다 (겐도를 살리기를 선택한) “여자로서의 어머니”가 더 중요하다는 재반론 역시 수긍할 만한 것이고, 저도 생각은 했던 부분입니다. 아무리 자기 논변의 예상되는 약점을 대충 뭉개고 넘어가려 해도 날카로운 논쟁 상대는 역시 다 포착해내는군요…….

  한편, 생물학적 한계로 인하여 인류종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사회재생산의 최종 단위는 결국 여성과 남성의 한 쌍일 수밖에 없다는 반박은 더 이상의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가불기인데――그래서 햄 쌤 본인께서도 이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시는 거겠지요――결국 이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날 길이 없다면, 성소수자・장애인・분리주의자 등 정상가족을 이루지 않는 (또는 이루지 못하는) 기타의 온갖 존재들은 재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부스러기(Geschlechter-abfälle: 엥겔스의 Völker-abfälle를 의도한 표현입니다)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인데, 저는 이런 결론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햄 쌤이 제 두 가지 반론을 함께 연결해서 1+2로 재반론하셨듯이, 거기에 대한 제 반응 역시 1+2 입니다. 정말 「어머니」가 되는 것 i.e. 어떤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 외에는 어머니와 화해할 방법이 없는가? 여자는 남자와 결합하지 않으면 재생산에 기여할 수 없는가? 본문에서 말했듯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성에게 패배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없을까요? 리얼의 현상계에 그것은 “정말로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노가 인류가 남녀 한쌍만 남기고 싹 멸망한 언리얼한 관념의 세계를 들이민 것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극단적인 관념계가 아니고서는 남녀의 결합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미사토가 구축하고자 했던 유사가족의 시도를 비롯하여 『에바』에 나타나는 모든 비-정상가족적 양태들이 가치있는 실패로 탐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스카와 미사토의 관계를 독해함에 있어서, 종래의 통설들처럼 이 두 여자를 남자(카지・신지)를 사이에 둔 연적으로 볼 것이 아니고, 오히려 카지의 등장으로 인해 미사토가 정상가족으로 포섭되고 유사가족이 붕괴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1개:

  1. 파도를 타고타고 들어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안도가 전권을 잡은 이번 신극장판의 결말을 보고 전체적으로 품고 있는 담론이 퇴보했다고 느꼈습니다. AT필드라는 자아-타자+타인과의 벽의 허물어짐(인류보완계획)을 보여주며 생각할거리를 던져주었던 엔드오브에반게리온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갠적으로 저에게 마지막 에반게리온은 여전히 EOE입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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