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1일 토요일

신세기 저패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논쟁선언


출전: 『KINO (키노)』 1997년 2월호 (통권 23호) pp. 58–67.

출처: http://animate.kr/ 바탕으로 도서관에서 찾아보고 대조해서 교정함. 고유명사 오류는 원본 그대로 유지.


갑작스러운 ‘에반게리온’ 현상은 지금 동경-LA-런던-뉴욕-
서울을 하나로 연결한다. 지금 여기서 저패니메이션의 새로운
창세기가 시작된다. 인간 자아에 대한 내밀한 고찰과 신화적
요소와 SF적 세계관 위에 성립되어 새로운 세기를 꿈꾸는 2015년의
전사 에반게리온으로부터 97년 저패니메이션의 반동과
혁명을 꿈꾸는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다. 창조와 혁명적 저항으로

우리들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네오 사이버 그룹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단숨에 우리를 세기말로부터 새로운 밀레니움의
‘창조의 순간’에 개입시킨다. 당신이 지금 거리에 나서면
마주치는 바로 그 이미지들, 거리의 풍경이 되어버린
주인공들에 대한 모든 것. 이미 ‘에반게리온’은 우리를
포위하였다. 그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난다.


어떻게 해서 80년대 저패니메이션을 끝냈는가, 또는 새로운 시작

신세기 저패니메이션


에바, 안노 히데야키, 가이낙스 「신세기 에반게리온」 논쟁 선언

거리로 나가보라. 그 거리가 동경이건 서울이건, 뉴욕이건 LA이건, 런던이건 홍콩이건, 파리이건 상관없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지금 폭풍의 핵이다. 이 단 한편으로 80년대 저패니메이션의 전통과는 완전히 작별이다. 95년 10월 6일에 시작하여 26편의 텔레비전 방영을, 그리고 97년 영화에로까지 끊임없이 자기증식하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무엇보다도 혁명적이다. 지금 당신이 미처 모르는 사이에 저패니메이션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놀라운 폭탄 같은 선언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신세기 에반게리온」 현상을 읽는다.

인류보완계획의 책임자인 겐도오 박사와 이카리 신지의 외디푸스적인 갈등
▶1997년 저패니메이션의 현실; 저품질 메이저/고품질 오타쿠의 분할, 그리고 비평의 부재 일본에는 아니메(‘저패니메이션’이 아니라 그대로 ‘아니메’라고 말한다)에 관한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평가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평의 장(場)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재는 아니메에 관한 정보의 흐름이 분할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많은 부수의 아니메 전문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전문지들은 정보원으로서는 중요하지만, 주로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비주얼 중심의 프로그램 소개지에 지나지 않고, 지면의 구성에도 출판사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독자도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인기 아니메의 성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컴퓨터 통신의 포럼, 동인지, 거기에 SF나 가라지 키트(garage kit)의 일부 전문지 등에서 단편적으로 교환되는 정보망과 그것을 좇는 2, 30대의 아니메 팬이 존재한다.이들은 나름대로의 기준과 평가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로부터 얻어지는 정보에는 흥미로운 것이 많다. 그러나 ‘아는 사람만 안다’와 같은 식의 이 정보망은 극도로 폐쇄적이며, 작품비평을 허용하는 환경과는 매우 멀다. 더욱이 일반적인 사람은 이 정보망의 존재조차도 모른다.

넬프의 또다른 여성 책임자 레이꼬
 이 이중의 불모성은 현재 아니메의 전체상황과 조응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아니메 작품은 어린이 대상의 텔레비전 아니메와, 일부 매니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OVA(오리지날 비디오 애니메이션)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메이저적인 것’과 ‘오타쿠적인 것’을 내용적으로 구별하는 이 경향은 사실 80년대 전반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80년대 초에는 아직 「우르세이야츠라」(81-86)와 같은 애니메이션이 분명히 존재했다. 총감독을 오시이 마모루가 담당했던 이 TV시리즈의 전반부(84년 4월 이전)는 원작 만화(타카하시 루미코)의 경향을 반영하여 실험적, 컬트적 경향이 강한 이례적인 작품이면서 동시에 일반 시청자층을 넓게 획득한 인기 ‘아니메’이기도 했다. 소위 오타쿠적 요소는 메이저 작품과 모순없이 공존하고, 오히려 그 질적 수준을 지탱하게 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이 급변하는 것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오고부터이다. 이 시기에 그 이전의 아니메 문화가 인접 장르(주로 SF를 포함한 문학, 만화, 영화, 현대사상)와의 사이에 열려 있던 정보나 상상력의 흐름은 돌연 폐쇄되기 시작하여 오타쿠적 요소의 도입은 작품의 수용자층을 한정하는 결과밖에 낳지 않게 되었다. 역으로 메이저의 유통 시장은 이미 오타쿠적 요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네아미스의 날개-왕립우주군〉(87)의 흥행적 실패는 그 변화의 일례로서 받아들여진다. 문화전반의 움직임(뉴 아카데미 운동의 종언 등)과 맞물린 이 변화의 결과가 바로 87, 88년을 경계로 하는 텔레비전 아니메의 질적 저하(방영작품 수도 감소한다)와 OVA의 붐이었다. 저품질 메이저/고품질 오타쿠의 이데올로기적 분할이 확립된 것은 이 시기이며, 그 이후 애니메이션은 정체기에 들어간다. 이제는 일종의 오타쿠적 경향(그것은 메타픽션적 실험성이라도 좋고, 언더그라운드적 상상력이라도 좋은 것이지만)을 갖고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방적으로 유통되는 일은 없다.

대(對) 사도 전투 책임자 미사토 현대 일본 직장여성의 페르소나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 「신세기 에반게리온」 1995년에 등장한 에니메이션 작품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메이저/오타쿠의 분할선을 모호하게 하고, 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지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폐쇄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가능한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어느 정도의 서론이 필요했던 것은, 이 작품이 단순한 감상과 정보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대한 비평을 요청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95년 10월 6일부터 96년 3월 27일까지 텔레비전 동경계(5국 네트)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반부터 7시까지 방영되었다. 텔레비전 시리즈 작품으로 전 26회로 구성되었다. 기획, 원작, 애니메이션 제작은 제작회사 가이낙스가 담당하고, 그 중 핵심 멤버인 안노 히데야키(庵野秀明)가 총감독했다. 스토리는 만화원작물이 아니라, 가이낙스 내의 그룹 ‘프로젝트 에바’에 의해 기획된 원작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스토리 설정, 캐릭터 설정, 각본, 연출 전반에 걸쳐 안노 히데야키 자신이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텔레비전 아니메로서는 이례적으로 작가성이 높고 일관된 경향을 지닌 작품으로 완성되어 있다. 상당한 화제작으로 아니메 전문지에 의한 앙케이트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높고, 방영 종료 후인 현재에도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두 회가 통상의 텔레비전 아니메에서 생각될 수 없는 결말이었기 때문에 오츠카 히데시의 「요미우리」신문에서의 코멘트(5월 20일 석간)를 시작으로, 찬반이 서로 교차하는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마지막 2회는 97년 2월 발매 예정인 LD와 비디오테이프에서 전면 재제작될 것이라는 것과 97년 여름에는 오리지날 스토리로 영화가 제작된다는 것이 발표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완전히 종료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승부욕이 강하고, 공주병 기질이 있는 에바 2호기의 조종사 아스카
 「뉴타이프」 96년 6월호는 이 작품을 「기동전사 건담」(79-80) 이래의 ‘장강의 새물결’이라고 평하고 있다. 「뉴타이프」의 출판사인 카도카와 서점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제작에 관여하고 있는 이상 그 평론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실제 이 작품이 80년대 후반부터 오랫동안 가능하지 않았던 다양한 계층에서 수용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아니메 팬을 초월한 광범위한 지지를 모으면서(이것은 관련 상품, CD-롬이나 비디오의 매상이나 일반 미디어에서의 반응에서 확인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컬트적인 팬을 끌어당기는 데에 성공했다. 게다가 현대사상 오타쿠, 밀리터리계 오타쿠로부터 미소녀 애니메이션 팬까지 그 수용층이 넓다. 연령층도 폭 넓고, 방영시간대로 인해 초등학생 시청자도 적지 않으며(아마 그 대부분은 스토리를 좇아가기도 곤란했을 것이다), ‘야마토’, ‘건담’ 세대라 불리는 30대 이상의 팬도 많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안노 히데야키는 80년대 후반 이후의 애니메이션을 지배했던 메이저/오타쿠의 분할선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다. 이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실제 이 작품은 근래 10년간 애니메이션에서 멀어져가고 있던 ‘80년대 전반의 아니메 팬’을 상당히 다시 불러들였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들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80년대 전반의 작품들의 경향을 느꼈을 것이다. 이 의미는 큰 것이다.

아스카는 레이를 견제하지만, 레이는 아무 생각이 없다
▶아니메계의 부조리를 타파하는 부조리극으로서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스토리의 기본적 틀은 흡사 부조리 소설과 같다. 수수께끼의 적이 도래하고, 그것을 수수께끼의 기계로 격퇴하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그 기계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선택된 14세의 어린이들뿐이며,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생사를 건 싸움에 말려들어가는 것이다. 실제 방영 초부터 이야기는 명확한 양면성을 지니고 진행되어간다. 인류의 존속을 건 전투와 거기에 부수적 드라마가 있으면서 또한 한결같이 자폐증적 성격을 지닌 주요 등장인물들의 인간관계와 그 심리의 집요한 묘사가 있다.

 무대는 2015년의 후지산 기슭, 제3동경시. 2000년에 ‘세컨드 임팩트’라는 대파국이 일어나고, 인류는 인구의 반수를 잃는다. 그 제3동경시를 향하여 ‘사도’(영어로는 angel; 천사)라 불리우는 존재가 단속적으로 공격해온다. 사도는 말하자면, 거대생물이거나 부유하는 피라미드 같은 것, 또는 컴퓨터 바이러스나 단순히 빛나는 고리 같은 존재이며, 그 정체도 의도도 전적으로 불명확하다. 그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거인형 생체병기인 에반게리온(통칭 에바)이 있을 뿐이다. 에바는 분명히 인류의 테크놀로지를 초원한 존재이지만 그 유래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에바는 3대가 있고, 각각에 14세의 소년, 소녀(신지, 레이, 아스카)가 전속 조종사로 선택되어 있다. 선정기준 역시 마지막까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데, 그 때문에 주인공 신지는 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소외감을 느낀다. 이 3명의 어린이들과 신지의 보호자이자 대(對) 사도전투의 책임자인 29세의 여성 미사토를 첨가한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각각 다소의 신경증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서투른 이 4명에 있어서 ‘왜 사도와 싸우는가/왜 에바를 조종해야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은, 인류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면의 문제로서 인식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전반부는 거의 잘 만들어진 SF 아니메로 진행된다. 각 에피소드도 단순한 구조이고, 기본적으로는 사도의 습격과 그 격퇴에 등장인물들의 인간관계가 얽혀드는 정통적인 것이다. 이 시기는 아직 코믹한 장면과 텔레비전 아니메 특유의 디포르메(deformation(왜곡)에서 유래된 용어)적 표정도 많고, 시청자는 ‘약속’을 배반당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거의 제16회 이후(96년 1월 방영분 이후) 각 에피소드는 돌연 처참해지기 시작했고, 안이한 결말을 피하는 심각한 스토리를 전개하였다. 연출, 작화, 동화, 음악 등도 보다 치밀해지고, 전체의 수준이 통상의 아니메를 크게 일탈하는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시리즈 후반부는 복잡하고 요약의 의미가 없으므로, 단편적 분위기만 알아보면 우선, 에바가 사실은 각 조종자의 모친의 ‘혼’을 투입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도라는 것이 거의 밝혀지게 된다. 세 조종사들은 모친의 태내에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제18회에서는 신지가 탑승한 에바가 신지의 의지로부터 벗어나 그의 친구를 목전에서 불구로 만들어버린다. 제22회에서는 아스카가 사도에게 ‘정신오염’을 당하고 유년기의 정신적 쇼크를 폭로당한 후에 폐인이 된다. 제23회에서는 레이가 신지를 지키기 위해 자폭하고 동시에 레이가 신지의 어머니의 불완전한 클론이었다는 사실도 알게된다. 더욱 외로워진 신지는, 제24회에서 어떤 소년과 유사 동성애적 관계를 맺게 되지만, 그 소년이 실은 사도라는 것이 판명되어 결국 죽이게 된다. 총괄하여 말하자면 이 시기의 에피소드는 죽음과 성적 함의로 가득 차 있으며, 복잡하게 등장인물 상호의 감정관계가 서로 얽힌 긴장감 있는 드라마이다. 에바와 사도의 정체와 신지의 아버지(대(對)사도 특무기관의 최고사령관)의 과거 등 스토리 상의 수수께끼도 가속적으로 증가하고, 작품세계 전체는 급속히 「트윈 픽스」적인 미궁으로 접어든다. 씬 구성도 매력적이다(가령, 비구름에서 새어나오는 한 줄기의 빛과 『메시아』 제44곡 「할렐루야」에 맞춰 아스카의 정신오염이 개시되는 일련의 씬). 애니메이션 팬 층을 초원하여 많은 지지자를 얻은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

▶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총화로서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적어도 오토모 카츠히로의 「아키라」(88) 이래의 충격적 작품이라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후 보다 넓게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유수의 걸작으로서 평가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지 않겠다. 여기에서는 이 작품의 이미지의 매력이 아니라, 오히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등장 자체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무엇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인가?

 안노 히데야키와 가이낙스는 상당히 치밀한 작업을 했다. 이 작품에서는, 80년대 일본 아니메의 최선의 요소가 거의 다 들어가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들은 우선 이 작품을 위해 (1)미야자키적 세계관(대파국 후의 세계, 멸망한 인류, 거신병, 천사)을 작품세계의 기본적 틀로서 채용하고, (2)이야기는 신화(구약, 그노시즘, 카발라)를 근간으로 채용하고 소년 주인공의 그 아버지와의 외디푸스적 갈등과, 인류와 사도의 전쟁을 유기적으로 대응시킨 메인 스토리를 구축했다. 한편으로 시대설정을 근미래로 하고, (3)오토메틱 장치(신경계 인터페이스로 조종되는 거대생체 로보트,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의 등장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4)거대 로보트 애니메이션으로서 전투 씬도 도입되고, 밀리터리계의 메카닉 묘사의 충실함도 잊고 있지 않다. 주인공은 (5)「건담」의 아무로를 전용하였으나 90년대적으로 보다 섬세하고 내향적, 자폐적인 소년으로 설정되어, 최근의 (6)심리, 철학 붐에 편승한 내면세계 중시의 영상작품으로 마무리짓는 방향성도 확보되어 있다. (7)미소녀, 미소년계 캐릭터를 각각 여러 타입 준비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특히 제24화에서 동성애 미소년의 등장은 명확히 특정 동인지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8)배경의 설정을 방영 당초부터 수수께끼투성이로 하여 일종의 추리소설적 즐거움을 팬에게 선사한 것도 크다. 문제가 된 TV시리즈의 마지막 2회는 (9)오시이 마모루적인 메타픽션적 요소까지 발견된다. 또한 이 작품은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에바 조종석의 디자인 컨셉트부터 맥주의 상표까지) (10)과거의 소설, 만화, 아니메, 영화, 음악으로부터의 철저한 인용, 참조의 묶음으로 만들어져 있다. 코드웨이너 스미스, 필립 K 딕, 이치가와 콘, 제임스 카메론으로부터 무라카미 류, 칸바야시 쵸헤이, 나리타 미나코, 오츠키 켄지 등의 80년대 작가들로 이어지는 그 참조 리스트는, 방대한 고유명을 담고 있다. 20대 이상의 팬 대부분이 그 장치를 즐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어떤 의미에서 80년대 애니메이션의 완성형태인 것이다.

신지의 남색 초호기, 아스카의 빨간색 2호기, 레이의 노란색 제로기와 파괴된 3호기 등 4대의 에바가 있다.

▶저패니메이션의 새로운 출발, 또는 자기회의의 반영으로서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미국의 온라인 아니메 매거진 「AM Plus(http://www.jurai.net:80/amplus/) 제2호는 장문의 소개기사와 안노 히데야키의 연보를 담은 본격적인 「신세기 에반게리온」특집을, 아직 그것이 일본에서 TV방영 중인 시점(96년 2월)에서 실었다. 특집 자체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아직 미국에서는 미공개이지만, ‘아니메’의 세계화는 예상 이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서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아니메는, 다양한 통로로 거의 동시에 외국의 팬들에게도 도달한다.

레이는 훌륭한 조종사지만 폐쇄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본의 해설은, 메이저/오타쿠의 차이를 묻지 않은 채 작품세계 자체를 실체화하고 작가성과 작품 자체의 비평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아스카는 신지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에바의 수수께끼는 어떻다거나 하는 이야기(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올바른 수용이기는 하지만) 밖에 관심이 없다. 작가의 메시지가 문제삼아지는 일도 있으나 어느 것이나 사소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기동경찰 패트리이버 2〉(93)의 정치적 메시지(내용의 수준)는 받아들여지지만, 그러나 이 작품의 작화가 분명히 「우르세이야츠라」 이후 오시이 마모루가 품어온 ‘아니메적인 것’에 대한 결별로서 기능하고 있는 일(표현의 수준)의 의미가 문제되는 일은 없다. 이러한 비평적 빈약함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존재가 비평적으로 인식되지 않음에 기인하고 있다. 한편, 일본 이외에서의 수용은 영상표현으로서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왔으나, 그것은 일본의 외부에서는 하나의 영상 장르의 생성, 발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작가와 장르와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일본의 언론보다 민감하다. 「AMPlus」의 소개기사는 안노 히데야키/가이낙스의 과거의 작품이 ‘궁극의 로보트, 미소녀 아니메’인 것에 주목하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는 한편으로 그 ‘초오타쿠(super-otaku)’적 경향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한 깊은 자기회의가 이중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분석은 옳다. 거기에는 애니메이션 장르에 대한 안노 히데야키의 양면적 태도가 여실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80년대 일본 아니메의 완성형태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실은 이 작품이 80년대 일본 아니메가 의거했던 여러 ‘약속’들을 포기하기 위해 그것들을 충족시킨 작품이었기 때문임에 다름아니다. 무슨 뜻일까?

▶안노 히데야키; 오타쿠로 출발하여 메이저/오타쿠의 경계에 서다 안노 히데야키란 어떤 인물인가. 60년 생의 이 애니메이션 작가는 가이낙스의 중심 멤버로서 80년대(즉, 그 자신의 20대)에 일관된 아니메 오타쿠 문화의 가장 ‘열렬한’ 현장에 서 있었다. 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토모 가츠히로와는 크게 다르다. 가이낙스는 81년에 오사카 SF대회(통칭 다이콘)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모인 젊은 애니메이터 그룹(‘다이콘 필름’)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당시 학생이었던 안노 히데야키는 그 창립 멤버들 중의 한 사람이다. 다이콘 필름이 제작한 작품은 아마추어이면서도 높은 평가를 얻어 (83년에는 「아니마쥬」의 그랑프리를 획득) 현재도 전설적 존재로서 자주 이야기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미소녀가 등장하고 패로디로 가득한 작풍으로 인해 ‘오타쿠의 컬트 무비’라고도 간주되어 왔다. 안노 히데야키는 그 경력의 출발점에서부터 오타쿠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TV시리즈, 82-83), 「바람계곡의 나우시카」(84)의 제작에도 관여했다.

 84년에 다이콘 필름은 다이콘 필름의 프로듀서 오카다 토시오(후에 ‘오타킹’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는 오타쿠계의 프로듀서이자 평론가)와 함께 장편 애니메이션의 기획을 세운다. 그 제작을 위해 조직이 재편되고 설립된 것이 가이낙스이다. 반다이를 스폰서로 해서 이 기획은 실현되어 87년 〈오네아미스의 날개-왕립우주군〉(감독 야마가 히로유키)이 극장 공개되었다. 안노 히데야키는 이 작품의 작화감독을 맡았다. 이 작품은 영상과 스토리가 모두 뛰어났고, 또한 홍보도 대대적으로 행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적으로 실패했다. 이 시기는 메이저/오타쿠의 분할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다른 차원의 세계를 무대로 한 SF이면서 미소녀도, 로보트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 작품은, 그 분할선의 소위 경계에 위치해 버린 것이다. 80년대의 SF대회에서 출발한 가이낙스는 욕망 회로의 시대적 추이를 잘못 읽었던 것이다.

 이 실패 이후, 가이낙스는 타겟을 오타쿠에게 한정한다는 의미에서 ‘오타쿠화’로 방침을 전환하였다. 가이낙스가 게임 소프트웨어 업계로 진출한 것은 이 무렵이다(이것은 후에 미소녀 육성 소프트웨어 ‘프린세스 메이커’(91)로 결실을 맺는다). 동시에 안노 히데야키는 가이낙스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의 중심이 된다. 그의 첫 번째 감독 작품 「톱을 노려라!」(OVA, 전3권, 88-89)는 가이낙스의 방향성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었다. 미소녀와 로보트를 ‘여하튼간에’ 등장시키고, 과거의 여러 아니메 작품 및 SF의 인용과 패러디로 가득찬 이 작품에는 이미 스토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백히 일부 오타쿠만을 타겟으로 한 작품이고, 실제 안노 히데야키는 이 작품에서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에로틱한 새로운 기법(소녀의 유방이 몸에서 독립하여 흔들리는 ‘가슴 흔들림 작화’로 불리워지는 것으로 당시는 혁명적이었다)까지 고안해낸 것 같다. 이 작품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OVA의 명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안노 히데야키는 애니메이션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가 유형화된 것(미소녀를 그리면 잘 팔린다) 및 그것에 의지하는 애니메이션 업계 전체를 향해 위기감을 강조하고 있었다. 즉 이미 그는 「톱을 노려라!」의 제3권에서 기묘한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거기에는 무의미하게 찬란한 음악이 울리고, 무의미하게 스케일이 큰 전투 씬이 전개되며, 무의미하게 화면이 흑백의 비스타 사이즈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당시 안노 히데야키가 처해 있던 폐쇄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넬프는 써어드 임팩트를 불러 일으킬 사도의 침략에 대비한다.
 안노 히데야키의 두 번째 작품인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TV시리즈, 전 39화, 89-90)는 안노 히데야키에게 보다 큰 성공을 주었다. NHK에서 방영된 이 텔레비전 아니메는 미소녀 주인공과 SF적 스토리 장치, 과거 아니메의 패로디를 사용함으로써 오타쿠의 반응도 좋았던 한편, 잘 만들어진 ‘어린이용 아니메’로서도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영화화도 되었으나, 거기에는 안노 히데야키/가이낙스는 관여하고 있지 않다). 이로 인해 그는 아니메 팬에게 ‘작가’로 인정받는 소수의 인물 중 한명이 된다. 그러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이후로, 안노 히데야키는 돌연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해버린다. 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애니메이션 장르와 팬 층 전체에 대한 깊은 실망이 그 근저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최근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안노 히데야키는 반복하여 작품을 향한 ‘아니메 팬’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성공은 조금도 애니메이션 전체의 상황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이후의 침묵에 대해, 안노 히데야키는 “4년 동안 파괴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죽어 있을 뿐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 긴 침묵으로부터의 극히 의식적인 복귀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 비판인 것은 처음부터 운명지어진 것이다.

신지, 레이 아스카는 어머니의 혼이 투입된 에바를 조종하면서 자기 자신과 싸운다.

▶아니메계의 ‘약속’과 문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그것을 파괴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 장르에 있어서는 내용(스토리)과 표현(작화)이 밀접하게 연결된다. 만약 3등신의 등장인물을 그린다면, 이미 그 작품은 미소녀물도 SF액션물도 될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의 애니메이터는 스토리 내용으로부터 역산하여 작화경향을 선택한다. 눈과 얼굴의 크기와 비율, 머리카락 색깔, 손발의 길이 하나하나가 스토리를 한정한다. 팬층의 세분화를 필연적으로 끌어내는 이 부자유스러움이 80년대 후반 이후의 애니메이션 장르의 전체적 폐쇄(한편으로 이것은 세련화의 귀결이다)를 낳고 있다. 오시이 마모루의 경우,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2〉에서 중후한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해, 유키 마사미와 타카다 아케미가 만든 TV, OVA시리즈의 「패트레이버」를 지탱하고 있던 ‘아니메 그림’적 등장인물의 작화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그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극화조의 작화를 선택하면, 확실히 중후한 스토리의 전개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수용자층을 한정시키기도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폐쇄성은 변하지 않는다.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이 광범위하게 보여질 리는 없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출현이 진정으로 사건이었던 것은 이 점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안노 히데야키는 놀랄 만큼 잡다한 작품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는 80년대 일본 아니메의 대부분의 ‘약속’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것들을 다른 요소들과 동시에 병치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약속’의 종류를 각각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미야자키 아니메와 「소녀전사 세일러 문」은 같은 장르에 속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면, 안노 히데야키에게는 조바심이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 결여는 (안노 히데야키와 가이낙스의 이력이 명백히 드러나듯이) 80년대 전반의 틈새 산업적 추이성의 연장으로서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는 메이저/오타쿠의 분할선을 아직 모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는 확실히 모순되는 설정과 요소가 채워져 있다. 우리들은, 이 애니메이션이 극히 무거운 테마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면서, 동시에 동인지 시장을 석권하는 종류의 ‘미소녀/로보트 아니메’일 수 있었던 것에 놀라야만 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시리즈의 처음 부분에서는 시청자 중 아무도 토지를 중요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칸사이 사투리로 말하고, 늘 저지 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정된 등장인물은 보통 스토리내의 갈등을 화합으로 이끄는 보조인물로 결정되어 있다. 그것이 일본 아니메의 문법이다. 그러나 안노 히데야키는 그런 류의 규칙을 여지없이 침범한다. 제18회에서 토지는 신지의 에바에게 한쪽 다리를 빼앗기는 스토리 상의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혹은 토이구치 신지(〈가메라-대괴수 공중결전〉(95)의 특수 기술감독이기도 하지만)가 그림 콘티를 담당한 제8, 9회를 예로 들어도 좋다. 이 두 회에서의 신지와 아스카의 코믹한 말다툼은 이미 작화적으로 명백히 시리즈 후반의 분위기와 편차를 일으키고 있다(이것은 많은 팬으로부터 지적당하고 있다). 또 제9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그램 영상의 아스카가 신지를 치는 씬이 있는데, 통상 이런 종류의 데포르메가 허용되는 작품 공간에서는 심각한 스토리의 전개가 불가능하다. 이 작품에는 동일한 종류의 ‘어긋남’이 무수히 관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안노 히데야키는 이 작품에 모든 아니메적 ‘약속’을 투입하기 위해 장르 전체의 암묵적인 양해를 파괴하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약속’을 파괴하기 위해 그것을 만족시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80년대 일본 아니메가 서서히 규범화 시켜온 ‘나눠 쓰기’ = ‘나눠 살기’는, 안노 히데야키에 의해 철저하게 교란된다.

▶오타쿠적 세련미와 폐쇄성을 가진 80년대 아니메의 악순환의 종언; 「신세기 에반게리온」 과거 작품의 집요한 인용, 패러디라는 형태를 띤 메타장르적 시도는 아니메계에서 넘쳐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결정적으로 뛰어난 것은, 이 작품이 그 표현상의 어긋남을 작품의 내용적 수준으로 반영시키는 스토리 구조의 설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18회(토지를 향한 에바의 공격)와 제22회(아스카를 향한 사도의 침입)의 충격과 절박감은, 명백히 시리즈 전반에서의 ‘코믹 터치의 학원드라마적’ 토지/아스카의 존재에 의해 증폭되어 있다. 거기에서는 작품에 대해 메타 레벨에 있을 터인 표현상의 어긋남이 오히려 객관적 내용을 직접적으로 지탱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색다른 구조를 채용한 작품을 진정한 메타픽션이라고 한다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극히 양질의 메타픽션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은 조금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스토리가 뛰어나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형 사도 카오룬은 레이와의 우정으로 자폭하는 길을 택한다.
 지금까지 작품을 우회한 이야기는 이 작품이 창출시킨 기묘한 ‘감동’의 구조에 접근하기 위해 불가피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매력은 스토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표현매체의 물질성과, 그 작품이 소속된 장르 전체와의 긴장관계로부터 규정된다. 95년에 이와 같은 스토리가 애니메이션을 매개체로 하여 등장했다는 것의 의미를 우선 포착하지 않으면 안되고, 다음에 그 메타레벨의 의미야말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스토리의 매력을 새롭게 지시하는 것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애니메이션에 관해 현재 유통되고 있는 대부분의 해설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작품과 장르 공간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인식이다. 오츠카 히데시에 의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마지막회 비판도 이 일례이다. 오츠카 히데시의 코멘트는 마지막회에 관한 것이다. 오츠카에 따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성장소설이려다가 실패한 작품이며, 마지막 두 회의 전개는 ‘성숙으로부터의 도피’로서 오타쿠적 폐쇄성의 전형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렸다. 왜냐하면 안노가 여러 인터뷰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또 방영 종료 후 팬들이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이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듯이 폐쇄적인 오타쿠들이야말로 이 작품의 성장소설로서의 완결을 가장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지의 성장기를 훌륭하게 묘사하는 일은, 그들에게 현실로부터의 도피구(자율적 환상세계)를 제공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안노는 그러한 폴 드망적인 ‘실언’에 민감했던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팬 층은 이미 작가에게 직접적인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츠카에게는 그것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등장은, 일본 아니메가 유치한 세련됨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오타쿠화를 탈피하고, 겨우 어떤 성숙에 들어왔음을 알리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방영 종료 후에 행해진 안노 히데야키의 인터뷰를 인용해보자. 그는 여기에서 마지막회에 사용된(실제는 마지막회뿐 아니라 다른 회에서도 보여진) ‘실험적’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카오룬, 신지는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상호공감한다.
 “셀화가 아닌 부분, 그림 콘티의 그림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일부러 그랬습니다. 시간에 늦었다든지 그러한 문제가 아니죠. 아무튼 셀 애니메이션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단지 기호의 문제이죠, 셀화 따위는. 마카로 아스카의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도 거기에서 미야무라 유코의 목소리가 나온다면, 이미 충분히 아스카인 것이죠. 셀에 관련되는 것 자체가 싫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CG로 간다는 것이 아니죠. (셀화를 요구하는 아니메 팬은) 페티시즘에까지 가버리고 있죠.”

 그럼 그는 앞으로 실사로 가는 것일까(예전의 오시이 마모루처럼)? CG로 가지 않는다면, 그런 일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셀 애니메이션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은 오히려 80년대 일본 아니메가 다듬어온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는 폐쇄적이 된) 여러 장르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스토리에서 마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그 상황을 우선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실제로 안노 히데야키는 상당한 일을 해치웠다. 그의 자유로움은 확실히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후도, 이 작가는 셀 아니메를 계속 만들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세련미와 폐쇄의 악순환을 체현하고 있던 ‘80년대 아니메’는 겨우 끝난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종언은 단순히 애니메이션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1년의 저패니메이션에 관한 예고편 「신세기 에반게리온」 마지막 두 화에서 안노 히데야키는 작품세계 내의 스토리 진행을 돌연 포기하고 신지의 독백과 내면세계의 묘사만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TV시리즈를 종결했다. 제24화까지 뛰어나게 구축되어 온 일체의 서비스는 제25회 시작부터 아무 코멘트도 없이 명백히 무시되어 버려진다. 특히 마지막회에 삽입된 또 다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장면(거기에서 에바는 존재하지 않고, 신지를 비롯한 인물들은 행복한 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다)은, 작품 자체를 메타픽션화함과 동시에, 일부 팬들의 욕망을 조소한 명확한 장르 비판이었다. 이 종결 방식은 아니메 팬 사이에 상당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고, 통신상에서는 한때 안노 히데야키를 향한 비난이 횡행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었다. 이 ‘에바 마지막회 쇼크’는 일본 아니메사(史)에서도 특이한 사건이며, 그것은 그것대로 고찰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본질적인 중요성은 여기에는 없다. 특히 TV판의 마지막 두 회의 어디까지가 본래의 기획이었는지 애매하고(오리지날 각본이 처참하다고 방송국측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더욱이 LD/비디오테이프판에서 스토리상의 완결이 다시 만들어진다고 보고되고 있는 이상, 그 너무도 적나라한 메타픽션적 전략을 안노 히데야키의 최종적 의도로 간주할 수는 없다. 확실히 TV판 마지막 두 회의 전개는, 안노 히데야키의 방향성을 직접적으로, 즉 내용의 레벨에서 나타냈다. 하지만 그 두 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중성은 표현의 레벨에서 명백하며, 그 급진적인 비평성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마지막회는 오히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은폐해버린다. 그리고 결말의 메시지를 긍정하는 의견도 부정하는 의견도 우리에게는 동등하게 ‘작가’의 관점이 배제된 불충분한 독해/감상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들은 오히려, 왜 안노 히데야키는 그러한 결말을 거기에 두었던 것인가라고 묻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는 왠지 기묘한, 게다가 박력있는 위기의식이 있다. 그 마지막회에서 놀란 것은 그 점이다. 메시지가 아니다.

레이는 아니메 오타쿠들의 자기 폐쇄적 성격을 반영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저패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위기에 빠진 저패니메이션을 구하려는데 그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력은 천재적이면서 혁명적이었다. 만일 저패니메이션이 다시 시작한다면 2001년의 우리는 돌아보면서 그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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