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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안노 히데아키 × 노비 노비타

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아스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EOE』가 좋은 메타픽션이었던 이유

 올해 마지막 포스팅이 이거네요. 제가 아스카를 사랑하는 이유를 말로써 정리하는 노력의 하나의 매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스카의 비극」이 작품 내재적으로 아스카가 좋은 이유를 설명한 것이었다면, 이번 글에서는 외재적・메타적인 이유를 설명해 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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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저는 늘 에바 구판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그 좋음을 설명할 수 있는 기교를 얻을수록, 그 좋음이 사람들이 뻔하게 생각하는 것과의 다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읍니다.

 “아스카가 『에반게리온』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주인공은 신지지 무슨 소리냐;;고 황당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각자 나름의 이유로 그 말에 수긍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생각하는 “아스카가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가 주인공에게 종속되지 않은 인물 각자의 서사가 살아 있는 군상극적인 측면, 거기서 비롯되는 허구적 사실성이라는 점은 다른 포스팅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아스카의 자기서사는 특히 강렬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모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충격적인 과거. 등장 이후 이후 다른 인물들과의 풍부한 상호작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결말. 전인류가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가는 코스믹 호러의 와중에서 아스카는 혼자 그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아스카는 겐도와 제레가 준비하고 아야나미로 표상되는 폭력적 합일에 저항하여 개별자로서의 존엄성을 보존하려는 인간 개아의 대변자라는 상징성까지 챙기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아스카가 이미 신지-미사토 더블 주인공에 다음가는 서브주인공으로서의 비중과 위치를 점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스카가 주인공”이라는 말에 동의할 사람들은 대개 이런 맥락으로 그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물론 아스카가 서브히로인이 아닌 서브주인공이 된 것이 극의 완성도를 해치는 짓거리라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에바알못들도 있지만(예컨대, 사다모토 요시유키라던가 사다모토 요시유키 같은), 그런 헛소리는 빠르게 거르고 넘어가자.

 하지만 내가 말한 “아스카가 주인공”이라 함은 서브주인공 정도를 의도한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스카는 신지를 넘어서 완전한 주인공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및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메타픽션으로서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에바』의 메타픽션적인 성격은 언제 드러나는가? 나는 그것이 (종래의) 주인공 신지가 작가 안노 히데아키와 일체가 될 때라고 규정하고 싶다.

 안노는 1996년 인터뷰에서부터 신지는 자기자신을 의식적으로 반영한 캐릭터라고 말해왔다(이런 점에서 신지의 찌질함은 00년대까지의 통설이었던 “오타쿠 비판”이라기보다 “안노의 자기혐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화된다. 애자일한 제작환경으로 인해 안노의 정서가 피폐해짐과 시기를 같이하여, 주변인물들의 죽음 또는 리타이어로 궁지에 몰리던 신지는 결국 정신적으로 무너져 버린다. 『EOE』 후반부에서 신지가 아담 카드몬(대충 전능한 신적 존재)이 되어서 전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생겼을 때, 이 전능자 신지가 무엇이겠는가. 다름아닌 안노 본인이다. 작품을 하나의 세계라고 할 때, 그 작품에 대하여 전능한 권능을 가지는 것은 바로 작가 아니겠는가?

 세기의 문제작을 만들어냈다며 주변의 엄청난 기대를 받았지만, 안노는 이 작품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었고, TVA 최종화 방영 이후로는 관객들에게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 작품이 지긋지긋해진 작가 안노 = 이 세계가 지긋지긋해진 주인공 신지는 전능자가 되어 지구 위로 부상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굽어보며 생각한다. 이놈의 거 어떻게든 좋으니 그냥 확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세계(작품)는 멸망한다.

 신지와 안노가 일체화된 순간부터 『에바』의 세계가 붕괴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필연이다. 군상극인, 또는 적어도 군상극적 성격을 장점으로서 취하고 있는 『에바』의 세계는 비슷비슷한 서사의 길이를 가진 인물들을 기둥삼아 올려져 있는 쟁반과 같다. 그 가운데 신지라는 기둥이 혼자 절대성을 얻고 치솟아 버리면, 쟁반은 뒤집어져 버리고, 이야기는 장점을 상실한다. 오로지 신지(안노)만이 중요한 존재가 되는 유아론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물론 TVA 최종화도 이런 유아론의 혐의가 있지만, “나는 나를 사랑해도 좋다”며 유리를 깰 때 신지 뿐만이 아니라 미사토와 아스카의 목소리도 겹쳐 나오는 것을 보면, 알아먹기 힘들어서 그렇지 궁극적으로는 유아론을 부정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에바』의 유아론은 『EOE』 후반부에 와서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작품을 뒤엎어 버리는 이 거스를 수 없는 폭력에 의해 LCL로 환원당한 다른 인물들은 신지에게 말한다. 편해지고 싶냐고.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고. 대표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 전체주의적 세계관의 표상인 아야나미, 그리고 신지와 함께 더블주인공이었던 미사토다. 하지만 거기서 아스카가 끼어든다. 죽어도 싫다고.

 “죽어도 싫다”는 아스카(죽어 있는 상태였음)의 절규는 작품 내재적으로는 개인의 존엄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시쳇말로 자신을 억까하는 세계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이 분석은 내재적인 것이므로, 이 세계란 어디까지나 작품 내부적인 세계, 픽션의 세계다. 그럼에도 그 세계가 허구적 사실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픽션을 리얼과 겹쳐서 공감하고 이입하며 작품을 독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외재적으로 이 절규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바로 안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신지와 합일되는 것은 죽어도 싫다는 것은 곧 이 시점에서 신지와 일체화된 존재가 되어 있는 작가 안노에 대한 거부이기도 한 것이다. 등장인물이, 작품이 감히 작가에게 존재론적으로 귀속되기를 거부한다는 독립의 선언인 것이다.

 물론 신지는 결코 안노만의 것은 아니다(단, EOE 시점에서는 안노만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노가 신지에게 빙의했다). 신지라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유별난 성우 오가타 메구미가 안노가 써온 각본의 캐해가 자신과 다르면 안노에게 대들어가면서 이의를 제기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라디오에서 “안노!! 우리 신쨩 괴롭히지 말라고!!”라고 소리치기도 했다던가. 하지만 그렇게 따질 것 같으면 오가타 이상으로 안노에게 할 말이 많을 사람이 아스카 성우, 미야무라 유코일 것이다. 다른 포스팅에서 분석했던 것처럼, 아스카는 세계에게 억까당하는 존재 아닌가. 그 세계의 조물주 안노가 신지의 몸을 빌어 세계에 강림했다. 그와 대면한 아스카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무슨 개쌍욕이 안 나오겠는가?

 안노=신지의 유아론적 난장판으로 끝나 버릴 뻔한 『에바』는 아스카의 일갈을 기점으로 서서히 하강하고 제정신을 차려간다. 세계의 모든 진실(i.e. 배경설정)을 알고 있는 존재(즉 작가의 전지성을 표상하는 존재)인 이카리 유이가 떠나감과 동시에, 신지에게 빙의했던 안노귀신도 떠나가면서 신지는 전능성을 상실한다. 전지하고 전능한 신=작가는 떠났고(아스카의 일갈에 쫓겨났고), 작품은 이제 홀로 남은 것이다. 『에바』는 안노로부터 독립되어 자기만의 생명을 얻었다. 원래부터 생명력을 가지고 날뛰는 괴물 같은 캐릭터였던 소류 아스카 랭글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온몸이 창에 꿰뚫리고 비둘기떼가 사지를 찢어먹어도 아스카의 생명력은 굴하지 않는다. 안노는 “아스카를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식의 작가 vs 작품의 메타픽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작가에게 저항하는 것은 대개 주인공의 역할이 아닌가? 그렇다! 바로 그 시점에서, 바로 그 순간에서, 아스카는 서브주인공을 넘어서 메인 주인공의 자리에 등극한다. 미사토의 사망과 신지의 신들림으로 인해 비어버린 메인 주인공의 자리를, 이 세계의 구원자로서 정당하게 계승한다. 이런 식의, 작가/독자와 작중 인물의 상호작용에 대한 메타픽션은 많은 경우 유치하거나 키치해지기 쉬운데(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이라던지, 악명높은 『정의소녀환상』, 그리고 널려 있는 책빙의계 웹소설들을 생각해 보자), 기존의 주인공이 작가와 일체화된 매개체가 되고, 서브주인공이 새로운 주인공으로서 작가(마귀사탄)를 쫓아냄으로써 『에바』는 메타픽션으로서 세련된 쓰리쿠션을 선보인 것이다.

 『에바』가 안노의 사소설로서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에바』는 결코 안노의 사소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모든 텍스트가 기본적으로 독립된 존재자로서 실존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다양한 이유들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주인공’ 소류 아스카 랭글리가 작가 안노의 유아론적 마수를 악령퇴산했기 때문이다. 아스카는 내재적으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불가능한 투쟁에 매달림으로써, 외재적으로는 작가로부터 자신과 세계의 독립성을 지켜냄으로써 작품에 만연해 있는 유아론의 안개를 떨쳐낸다.

 물론 아스카의 이러한 대사를 쓴 것과 아스카의 역할을 부여하고 배치한 것 역시 안노의 노동이었던 바. 이것을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이라는 프레임으로 설명하자면, 아스카가 안노를 죽인 독립선언은 안노가 안노를 죽인 것, 즉 “저자의 자살”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이런 점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년-1997년)의 메타픽션은 유아론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여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 때의 안노는, 작품을 자기만의 것으로 귀속하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끝내는 것이, 그것도 끝내기 위해 끝내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면 지양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신극장판에서는 그 누구도 안노와 일체화한 신지에게 반항하지 못한다. 신지가 권능을 휘두르는 대로 무력하게 서사 바깥으로 내팽겨쳐질 뿐이다. 『EOE』에서의 아스카처럼 그 힘을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픽션 속에 실존하는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분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서의 『에바』를 “안노의 사소설 에바”가 신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집어삼켜 버리는 순간이 이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고, 이 붕괴는 원작과 신극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원작은 주제의식과 연출로, 안노를 물리치는 아스카로써 그 붕괴를 커버해냈지만 신극에서는 그게 없다. 마치 이 픽션 세계의 붕괴 자체가 목적이고 주제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댓글 3개:

  1. 이제 포스팅 없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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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딱히 블로그 놓은 건 아니고 요즘 현생이 바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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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레후...전 매주 찾아와 다시 보고있어요 늘 기대합니다 레훼에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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