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7월 21일 월요일

김지룡의 일본속으로

출전: 『중앙일보』 1997년 7월 21일자 - 1997년 9월 22일자 연재

1. 만화…발상 뒤집기


일본은 세계적인 만화.만화영화 (애니메이션).전자게임의 수출국이다.
한국의 청소년들도 일본이 내놓은 각종 오락상품에 심취해 있다.
반대편에는 일본만화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 이후로 '저질이다' '문화적 침략이다' 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많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속을 들여다 보자. 감춰진 비결을 알아야 대응책도 나올 테니까.
지난해말부터 올초까지 일본에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상품이 세가지 있다.
'다마곳치' '파이널 판타지7' '에반겔리온' 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내에서만 이미 7백만개 (1천1백20억원 어치)가 팔린 것으로 추정되는 다마곳치에 대해선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전자오락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7은 판매량 3백10만장 (1천7백억원 어치) 이라는 진기록을 넘어 계속 행진중. 그러나 아직은 놀라지 마라. '아!에반겔리온' 이라는 감탄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본의 지난해 레이저 디스크 (LD) 판매랭킹 10위권에는 세계적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인 '라이온킹' '포카혼타스' 조차 얼굴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낳은 천재 애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도 마찬가지다.
그런 판에 요즘 엔터테인먼트 전부문에서 온통 에반겔리온 '싹쓸이' 현상이 일고 있다.
에반겔리온은 만화 (4백6만부).LD/비디오 (2백76만개).극장판 영화 (1백20만명).전자오락CD (76만장).주제가CD (3백36만장).원화집 (3백60만부).캐릭터상품등 각부문에서 상품화에 성공했다.
총매출액은 2천4백억원. 최종작에 해당하는 극장판 영화가 공개되고 만화 단행본의 출판이 완결되는 내년말에 이르면 매출액은 4천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실적은 지난 4월말 기준, 관계기사 45면) . 에반겔리온의 히트 비결을 뜯어보기 위해서는 먼저 줄거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극 대륙에서 의문의 대폭발이 발생해 인류의 절반이 사망한 이후 15년이 경과한 서기 2015년. 일본의 수도인 제3도쿄시에 시토 (使徒) 라고 불리는 거대 괴물로봇이 습격해 온다.
지구 방어를 맡은 초법규 특무기관 '넬프' 의 사령관 이카리 겐도는 10년만에 재회한 14살의 아들을 불러 거대 로봇인 에반겔리온의 파일럿이 될 것을 명령한다.
이후 인류의 운명을 건 에반겔리온과 시토와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다.
이 정도라면 '마징가 Z' 보다 크게 나을 바가 없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스토리는 현재의 20~30대의 성인들이 자라온 환경과 철저하게 대응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 시토는 입시경쟁의 상징물이다.
주인공 소년 이카리 신지 (분노한 마음이라는 뜻) 는 결과적으로는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지만 정작 본인은 단 한번도 그런 자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에반겔리온을 조종해서 싸우고 있을 뿐이다.
이는 대학입시를 위해 무작정 공부해 온 젊은이들의 학창시절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부친은 회사 일에 쫓겨 가정을 내팽개친 아버지와 흡사하다.
소년이 바라는 것은 아들에게 시토를 물리치라고 명령을 내리는 사회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가정적이고 평범한 아버지, 그리고 그로부터의 칭찬과 격려다.
그러나 아버지는 26회의 스토리중에서 딱 한번 소년의 기대를 만족시킬 뿐이다.
당연한 일을 하는데 무슨 칭찬이 필요하냐는 식이다.
가정교사 역할을 상징하는 미사토는 에반겔리온을 조종하는 일을 싫어하는 소년에게 말한다.
"지구를 구한다는 자각을 가져라. "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알았어. 이기면 될 거 아냐. " 이는 마치 부모의 야단에 "알았어. 우등상 타면 될 거 아냐"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 시토의 파일럿인 카오르는 죽음을 맞는다.
이카리는 유일하게 마음이 통했던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미쳐버린다.
입시경쟁을 통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고뇌를 상징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에반겔리온은 젊은 날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갈등과 방황을 로봇 만화의 형식을 통해 충실하게 재현했다.
95년 에반겔리온이 저녁 6시30분에 TV 만화영화로 처음 방영되었을 때에는 시청률이 6%를 넘지 않았고 결국 중도에 하차했다.
초등학생들에겐 너무 어렵고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에반겔리온은 성인 팬들 사이에서 입으로 회자돼 공전의 금자탑을 쌓게된다.
다름 아니라 '성인용 전략' 이 적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 아닌가.
초등학생들 경우라면 용돈 1만원으로 무려 4천만명이 참여해야 가능할 시장이 1백만원을 쓰는 성인 40만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도 현대인의 급소인 '추억' 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2. 야하면 안 팔린다


흔히 선정적인 장면이나 폭력성이 짙은 작품에 '성인용' 딱지를 붙인다.
그러면 더욱 잘 팔릴 것이라는 역설이 이상한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하면 팔린다" 는 생각은 뿌리 깊은 착각일 뿐이다.
일본은 성적 (性的) 으로 한국보다 훨씬 개방된 사회다.
아무런 규제도 없이 편의점에서 누드잡지를 팔고 있으며, 주택가의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AV (adult video) 라는 포르노 비디오를 쉽게 빌려 준다.
이런 피상적인 사실만을 보면 누구의 말처럼 "심야의 흐름에서 돈이 보인다" 는 단세포적인 발상을 하기 십상이다.
우리 돈으로 연간 1백억원에 이르는 일본의 포르노 비디오시장은 거대 시장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2조원 상당의 전체 비디오시장의 0.5%에 지나지 않는다.
성인용이란 어른을 유인하거나, 적어도 참고 봐줄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갖춘 작품을 말한다.
단순히 선정적인 작품은 - 물론 성인용이지만 - 아이들이 봐서는 안된다는 의미의 성인용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모든 어른이 즐길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 이라는 찬사가 '훈장' 처럼 따라 붙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블루시걸' '용병이반' 같은 작품은 성인용으로 실격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만한 내용도 아니므로 결국 '이런 걸 왜 만드나' 라는 공허한 의문만 남기고 만다.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성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만화.애니메이션에도 등급을 매기고 시청 연령과 방송 시간대를 제한할 필요성은 있다.
그러나 왕자웨이의 '타락천사' 는 괜찮고 꼭 그만큼의 선정성.폭력성밖에 없는 '에반겔리온' '드래곤 볼' 을 문제삼는 것은 '만화 = 애들용' 이라는 고정관념의 발로다.
'세일러 문' 의 경우를 보자. 내용이 너무 유치해 성인이 보기에는 대단한 참을성이 필요하다.
비록 선정적 장면이 난무하고 있긴 해도 성인 시청자를 확보하기는 커녕 '유해만화' 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을 뿐이다.
야하기만 하면 팔릴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미신이 여지없이 깨지는 셈이다.
2년전부터는 '연애 시뮬레이션' 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전자오락이 일본의 젊은 남성들을 사로잡고 있다.
화면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과 1년간 (게임 속의 시간) 대화를 나누고 데이트를 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의 게임이다.
무대를 전부 고등학교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마치 다시 한번 옛날로 돌아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듯한 환상을 주기 위해서다.
이 분야 최대의 히트작은 1백50만개 이상 팔린 걸작 '도키메키 메모리얼' 이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여러명의 여주인공 중에서 '후지사키 시오리' 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가상의 그녀는 올 2월에 정식으로 가수 데뷔앨범을 발표했을 정도다 (노래는 성우가 담당) . '도키메키 메모리얼' 은 20~30대 남성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선정적인 장면은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게임의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해 제작사인 코나미측에서는 매달 한장씩 '도키메모 소식' 이라는 CD롬을 발표하고 있는데 딱 한번 팬 서비스라며 수영복 차림의 후지사키 시오리의 컴퓨터 그래픽을 선보였다가 곧바로 팬들의 항의에 부닥쳤다.
이에 코나미사는 다시는 수영복 사진을 싣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했다.
팬들이 원했던 것은 거의 '멸종상태' 에 있다고 느껴지는 원초적으로 순수한 여성상이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인 '하급생' 이라는 게임. '도키메키 메모리얼' 을 표절하면서도 선정성과 도덕적 타락을 강조한 것이었다.
뛰어난 그래픽 처리에다가 내용도 충실했지만 판매량은 20만개로 저조했다.
CD롬은 물론이고 여주인공들의 캐릭터 상품도 만들 수 없었다는 점에서 참패랄 수도 있다.
사회가 혼탁해질수록 오히려 도덕적인 상품이 많이 팔리는 것일까. 마구잡이로 선정적인 만화나 게임은 "얼마나 내용이 시원찮으면 그렇게 벗길까" 라는 비난만 남길 뿐이다.

3. 힐링(healing) 산업


몇년 전부터 일본에선 원예상품.애완동물 같은 게 인기다.
애완동물과 관련상품 시장규모는 무려 연간 7조원을 넘어섰고 전자 애완동물 다마곳치 열풍은 익히 아는 바 그대로다.
또 지난해엔 부드러운 악장만을 모은 클래식 콤팩트디스크 (CD) '카라얀 아다지오' 가 레코드 판매순위 10위에 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모든 현상을 해석하는 키워드는 힐링 (healing) 이라는 개념이다.
영어로 병을 치료한다는 뜻이나 일본에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풍요롭기는 하지만 행복을 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좌절과 분노, 평생 쉴 틈없이 닥치는 스트레스, 익명성이 강조되는 대도시의 불안과 고독에 지친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는 것이 '힐링 상품' 이다.
이 유행은 마음의 상처, 이른바 트라우마 (trauma) 를 지닌 '어덜트 칠드런' 이 많다는 증거다.
〈본지 7월28일자 39면 참조〉 한 시대 전까지만 해도 여주인공은 별달리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캔디.샐리.오스칼 등 우리의 뇌리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만화의 여주인공들도 있지만 그들은 전부 소녀용 순정만화의 주인공들이었다.
'아톰' 이나 '도전자 허리케인' 에는 여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징가 Z' '타이거 마스크' 에는 주인공 주위에 청순가련형의 여성이 등장하고 있으나 역시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대개는 납치를 당하거나 적으로부터 도망칠 때 넘어지거나 부상을 당해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존재에 불과했다.
'람마 1/2' 로 대표되는 학원 로맨스 만화에서도 여주인공은 여전히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20~30대 남성이 여주인공에게 '힐링 효과' 를 원하기 시작하면서 여주인공의 성격이 1백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주인공 후지사키 시오리처럼 아직도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이 인기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보호와 헌신' 이라는 새로운 힐링 개념의 여주인공 인기는 가위 폭발적이다.
올 최대의 히트작은 3백10만개가 팔린 게임 '파이널 판타지' .여기에는 에어리스.티파.유피라는 세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대지를 뜻하는 단어 'earth' 에 'i' 를 추가해서 이름을 붙인 여성 에어리스 (Aerith) 는 대지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전투중 그녀가 맡은 임무는 공격이 아니라 같은 편의 치료다.
특히 죽은 동지를 살려내고 체력과 마력까지 회복시켜주는 그녀의 최후 마술 '생명의 고동' 은 감동적이다.
다른 여주인공 티파. 그녀는 단 한순간도 주인공 곁을 떠나지 않고 최후까지 함께 싸운다.
철저하게 헌신적인 인간형이다.
그러면서도 한 시대전의 이른바 내조형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녀는 공격형 인간이다.
때리기.던지기.돌려차기를 포함한 6연타 공격을 퍼부으며 주인공과 대등한 위치에서 적을 물리친다.
발랄하고 영악한 현대 여고생 같은 세번째 여주인공 유피가 남성들 사이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따뜻한 모성애와 공격적이고 헌신적인 동지의 개념을 동시에 포함한 여주인공은 바로 '에반게리온' 의 헤로인 아야나미 레이다.
탁월한 전투력으로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무기질적인 성격의 그녀는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주인공 이카리 신지에 대해 묘한 보호본능을 느낀다.
이것이 애정으로 바뀌는 과정은 남성 팬들을 사로잡기 충분해 보인다.
그녀가 캐릭터 상품의 모델로 활약 중인 것 또한 요즘 시대가 요구하는 여주인공상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4. 스토리 시대


성공한 엔터테인먼트 작품의 공통점 셋 - '탄탄한 스토리' '주인공에의 감정이입' '뛰어난 영상 (그래픽) 처리' 다.
만화.애니메이션은 물론 전자오락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갤러그.제비우스.테트리스가 전자오락을 리드하던 시대, 플레이어는 게임의 규칙에 따라 버튼을 조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사용자가 주인공 자격으로 전투를 행하고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RPG (role playing game) 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시뮬레이션 게임이 등장하면서 전자오락에서 스토리가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다.
에반겔리온처럼 만화를 토대로 한 게임이 등장하고 드래곤 퀘스트처럼 게임에서 만화로 이어가는가 하면 도키메키 메모리얼같이 게임에서 출발해 영화로 재생산되는 것은 게임의 중심이 스토리로 옮겨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이와는 무관했던 전통적인 게임에도 스토리가 도입되고 있다.
특수공작부대의 멤버가 우연히 낡은 서양식 주택에 들어가는 것을 계기로 좀비형 괴물과 공포의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바이오 하자드' .두 남녀로부터 플레이어가 조작할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고 그것에 따라 스토리 자체도 크게 변한다.
결국 총을 쏘는 슈팅게임이지만 스토리 삽입으로 근래 보기 드물게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2' (1991년)가 격투게임의 붐을 일으키고 '버츄어 파이터' (1994년)가 3차원 폴리곤 격투게임의 새로운 장을 열 때까지만 해도 스토리가 필요없었다.
오로지 격투만이 유효했을 뿐. 그러나 '철권' '투신전 (鬪神傳)' 의 성공이 보여주듯이 포화상태의 격투게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토리를 부여해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소니가 자체 제작한 RPG '아크 더 래드' 는 요란한 TV 광고는 물론 로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게임용 교향곡을 배경음악으로 깔아 화제가 됐다.
하지만 판매에는 실패. 이유는 스토리가 초등학생의 작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고서도 프로그래머가 중심이 돼 만드는 게임으로 승부수를 띄울 수 있을까.

5. 만화 주인공의 성격변화


무언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을 남자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던 시대가 있었다.
배신당할지도 모르는,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리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도 남자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무언가를 위해서 살았다.
그 '무엇' 은 국가와 인류이기도 했고 스포츠이기도 했고 때로는 사랑일 수도 있었다.
일본만화 '거인의 별' (1966년작) 의 주인공 호시 휴마는 한 시합에서의 완전연소를 이상으로 삼고 살다가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순간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는 폐인으로 전락했다.
야구에서도 무사도 (武士道) 를 추구하는 '애스트로 구단' (1972년작) 의 야구시합에서는 사상자가 나왔다.
우리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공포의 외인구단' 은 오직 승리만을 위해 존재했고 주인공 오혜성은 사랑을 위해 야구장에서 죽음을 맞는다.
또 "난 한대씩 맞을 때마다 죽고 싶도록 심한 고통을 느꼈다.
내게 링은 지옥이었다" (이현세작 '지옥의 링' ) 라는 말이 절절한 사랑의 고백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도 경제성장와 학생운동으로 대표되는 역동의 시절, 만화 주인공들은 모두 그 '무엇' 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또한 그 시대 SF의 영웅들도 불굴의 정신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서 이길 수 없을 때는 마징가 Z와 함께 죽을 뿐입니다" 라는 쇠돌이의 대사처럼 그 시대의 영웅들은 단순했다.
그들은 어떤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인류를 지킨다는 고귀한 목표를 위해 '특공대 정신' 하나만으로 전투에 임했고 한 소녀를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부터 이런 맹렬형 인간에게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당초 주인공 반열에 올라 있었던 그들은 주인공 주변의 편집증 환자로 전락해 공포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81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만화 '타치' 는 맹렬형 인간에 대해 혁명적인 이별을 고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고교 야구선수인 주인공 소년은 또 한번 승부를 요구하는 라이벌의 말에 "그만하자. 피곤하다" 고 말하고 아무 생각없이 집으로 가버린다.
어떤 가치있는 일에 목숨을 걸기보다는 자기 생활을 즐기는 것이 더욱 의미있는 일이라는 관념이 만화에 도입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드래곤 볼' 의 주인공 손오공은 인류를 몇번이고 구해낸 영웅이지만 본인 스스로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거리가 멀다.
강해지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싸움에 임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사회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하기 시작하던 80년대에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즐기는 스타일의 작품들이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90년대초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정신적인 공허함을 물질적인 풍요로 대리만족하는 현상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덜트 칠드런.트라우마와 더불어 '경계성 인격장애 (정상인과 정신병 환자의 경계 영역에 있는 불안정한 정신상태)' 가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자리잡은데서 알 수 있듯 일본사회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엔터테인먼트 상품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은 '자신의 의미찾기' 다.
처음부터 인류를 구할 운명을 타고난 영웅, 별다른 노력없이 탄생한 스포츠 천재, 팔방미인 주인공 스토리들이 최근 들어 참패를 거듭하는 것은 그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결과다.
자폐증 증상이 역력히 보이는 '에반겔리온' 의 주인공 이카리 신지, 정신분열증 환자로밖에 해석이 안되는 '파이널 판타지 7' 의 주인공 크라우드. 두 작품이 대성공을 거둔 이유는 스토리가 주인공이 자신의 정신상태 (현대 젊은이들의 정신상태) 를 해석하면서 내부에 숨어있는 광기를 제거하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 아닐까.

6. 대중가요 … '감상용' 실종·노래방 가요만 활개


표면적으로는 수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한국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를 접하는 것은 이미 특별한 일은 아니다.
강남에는 일본가요 전문카페들이 수두룩하며 이대앞에는 일본 CD를 파는 전문점들이 성업 중이다.
속칭 '길보드 차트' 로 불리는 길거리 손수레에서도 일본 불법복제 테이프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문화위기를 말한다.
문화 식민지니 정신적 식민지라는 말을 써가며 일본문화 유입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일본가요를 표절한 노래가 연일 방송을 타는데도 그것이 표절임이 밝혀지기까지는 거의 무신경한 게 한국 대중가요계의 현실이다.
개중에는 일본 것이라면 무조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인 경우가 많다.
일본가요가 전면개방되면 설땅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의 발로인 셈인데 정말 그럴까. 분명 일본가요는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서 있다.
레코드 판매의 인세나 방송 출연료 등에서 가수들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관행이 정착되면서 재능 넘치는 아티스트들이 대거 가요계에 참여하게 된 게 일차적인 요인이다.
그 결과 한국처럼 인기가요 1위에 오르면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짓던 일일랑 진작에 마감했다.
90년대초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최근의 일본가요에는 수준 미달작이 양산되고 있다.
주범은 노래방의 확산이다.
노래방의 시장규모는 한해 10조원에 달한다.
이는 당연히 노래방용 CD나 LD시장의 폭발적 확대를 가져왔다.
일반 CD시장규모의 40%에 육박하는 거대 시장이 형성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래방에서 부르기 쉬운 노래' '노래방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를 만드는게 음반산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됐다.
결과는 뒷걸음질. 일본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고무로 데쓰야를 꼽는다.
작곡가 겸 레코드 프로듀서인 그가 제작한 CD 23장 전부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고 총판매량도 1억장 이상이다.
지난해에만 5천만장 이상을 팔아치웠다.
그의 지난해 납세액은 80억원, 개인 납세부문 4위에 랭크됐다.
부동산 재벌이나 대기업 회장의 전유물이었던 고액납세자 1백위안에 대중문화인이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고무로의 곡은 대개 '고무로 사단' 인 최정상 가수들에 의해 불려진다.
현 일본최고의 가수로 꼽히는 아무로 나미에를 비롯,가하라 도모미.글로브.맥스.스피드 등이 그 멤버들이다.
주로 10대 소녀들인 이들은 '더 격렬한 밤에 안기고 싶어' '내 몸은 비상구를 느껴' '한번 안으면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거야' 등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가사들을 극히 단조로운 멜로디에 담아낸다.
이들의 노래는 발매와 동시에 판매량 1위를 기록하기 일쑤다.
고무로의 성공은 결국 '노래방 가요' 를 재빨리 개척한데서 비롯했다.
이 점에서 고무로는 천재적인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잡아낸 천재적 상인에 가깝다.
일본어를 모르는 대부분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곡이 대부분이다.
한국시장을 위협할 만한 존재는 아니라는 얘기다.
고무로 사단에 못지 않게 대중 가요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게 탤런트들의 노래다.
연예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탤런트가 노래하고 가수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탤런트의 노래는 그의 고정 팬들이 사준다는 점에서 일정수준의 판매량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수준미달이기 십상이다.
이처럼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가 부른 노래' 를 앞세운 전략 역시 일본 대중가요의 수준을 떨어뜨리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지라 감상용 대중가요를 찾는 팬들은 서브컬처나 얼터너티브 컬처를 찾게 된다.
멜로디가 살아있는 '듣고 즐기는 대중가요' 가 오히려 대중가요의 하위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들은 유행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귀에 따라 듣고 싶은 노래를 찾는다.
한국 주주클럽이나 룰라의 노래를 애청하는 일본인이 나오는 것은 아직 한국가요에는 멜로디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7. 끝. 서브컬처 대중가요


일본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군단은 뭐니뭐니해도 프로야구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다.
자이언츠의 팬은 무려 4천만명. 전 경기는 전국으로 생방송되며 항상 2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다.
그런데 올해 이 구단의 개막전 시구를 맡은 사람은 '텔레비전의 꽃' 으로 불리는 아무로 나미에였다.
이에 반해서 인기 최하위의 '일본햄 파이터스' 와 '롯데 마린스' 의 개막 시구식에는 성우 시이나 헤키루가 참석했다.
시이나 헤키루는 성우이면서 4장의 CD앨범을 1백만장 넘게 판 가수다.
그러나 그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TV같은 대중매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마이너 트렌드형이기 때문이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는 프로야구 구단과 가수의 만남. 이는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마이너 트렌드가 엄연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단면이다.
성우 출신 가수로 앨범판매 순위 10위 안에 진입한 사람은 10여명이나 된다.
이들의 인기비결은 일본의 게임기와 관련이 깊다.
엄밀하게 말하면 전자오락기의 주류가 닌텐도에서 소니 (플레이 스테이션) 와 세가 (새턴) 로 바뀐 것과 큰 관련이 있다.
닌텐도의 패미콤 시리즈는 기억용량이 최대 8메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94년 소니와 세가가 개발한 32비트 게임기에 CD롬 방식을 채용함에 따라 기억용량이 일거에 6백40메가로 확대되었다.
이제 성우의 육성을 게임내용에 담는 것이 가능해졌고 히트한 게임의 여주인공 목소리를 담당한 성우들이 덩달아서 인기를 얻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시각을 더 넓혀서 보면 성우가수들의 출현은 서브컬처 혹은 얼터너티브 컬처 (대안문화) 라고 부르는 마이너 트렌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TV나 신문같은 대중매체를 장식하고 CD판매차트의 상위를 점령하는 메이저 트렌드의 가수들과 달리 소수의 열광적인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가수들은 많다는 의미다.
만화영화의 주제가들을 헤비메탈로 편곡한 애니메탈 (애니메이션과 헤비메탈의 합성어) 의 CD판매량이 이미 20만장을 넘어섰다.
오랫동안 소극장을 주무대로 활동해 온 현란한 의상의 '비주얼 록' 그룹의 음악이 소극장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올해는 인기순위 1위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대형 레코드점들은 이제까지는 거들떠 보지 않았던 라틴아메리카.홍콩.한국.동남아시아 음악 별도매장을 설치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모두 TV와 히트 랭킹의 상위만 봐서는 인식하기 어려운 마이너 트렌드의 일부분들이다.
20~30대 서브컬처의 소비군단은 60년대말 미국의 히피문화 또는 카운터 컬처의 지지자와 비슷한 성향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대중매체를 동원한 현란한 대량선전에 현혹되지 않으며 심지어 기피현상마저 내보인다.
대신 동호인끼리 정보교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다.
여기에는 인터넷이 큰몫을 한다.
미국의 히피와 하나 다른 점은 그들의 구매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2백24만원 상당의 에반겔리온의 여주인공 '레이' 인형이 팔리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가요를 소개하는 일본어 인터넷 홈페이지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중의 하나인 이치노바시라는 자칭 한국가요 전문가가 띄운 사이트는 올들어 9천6백명 이상이 접속한 기록이 있다.
이는 '노래방에 가자 - 코리안 팝스의 현재' 라는 동호인 잡지 (20페이지 가량의 조악한 잡지로 가격 1만5천원) 의 선전용으로 개설한 홈페이지다.
이게 한국의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일본인을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면…답답하기만 하다.
서브컬처를 향해 내닫는 일본의 새로운 경향이 우리에겐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 시장을 그냥 버려두긴 아쉽다.
열린 사이버공간 인터넷, 그리고 홈페이지를 통해 실제 거래를 행하는 통신판매 - .방편은 많은데도 우리는 무관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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