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월 1일 금요일

새로운 화두 가이낙스・에바, 오타쿠들과 싱크로되다

출전: 박인하 외 지음, 『일본 애니메이션 아니메가 보고 싶다』 (1999년) pp. 241-254.

  인명 오류 등 오류는 원문 그대로입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캐릭터상품, 넘쳐나는 아니메 정보, 다양한 형태의 소비시스템…. 90년대 아니메는 다양한 상품으로 응용되는 컨텐츠(Contents)의 모습이다. 애니메이션 기획자들은 기획이 완료되자마자 잡지를 통해 정보를 계속 소개하며 TV판 방영이 시작되어 상품가치가 있으면(시청률이 좋으면) 캐릭터상품을 출시한다. 방영된 작품의 인기가 오르면 모든 영역에 걸친 상품화가 시작된다. 캐릭터상품으로 집중적인 개발이 시작되고, 성우는 또 다른 상품을 준비한다. 게임이 개발되고 필름 북이 출간되며, 주제가를 담은 CD가 나오고 라디오를 통해 또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한다.

 아니메에 대한 폭발적인 소비의 핵심에는 오타쿠가 있다. 자신의 모든 수입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사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해버리는 오타쿠들은 아니메 상품의 궁극적 타겟으로 떠올랐다. 기획자들은 자신들이 기획하는 새로운 작품이 오타쿠들에게 발견되기를 원한다. 이 와중에 기획자와 오타쿠가 싱크로된 회사가 탄생했다. 세기말 아니메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가이낙스(GAINAX)가 그들이다.

 1981년 오오사카 인근의 학생들을 주력으로 아마추어 SF 이벤트인 제20회 일본 SF대회 DAICON 3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화제가 된 것은 대회 전반부에 상영된 오프닝 애니메이션으로, 5분 분량의 이 필름은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을 가진 몇 명의 예술대학생을 중심으로 대회 자원봉사스탭들의 손을 거쳐 제작되었다. DAICON 3을 주최한 그룹의 중심 멤버가 이벤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오사카의 모모타니에 SF 전문점 ‘제네럴 프로덕트’를 열었고, 그곳에서 스스로 기획한 SF,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상품이나 조립 키트(개러지 키트, Garage Kit)를 제작・판매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제네럴 프로덕트 영업을 계속하는 한편, 아마추어 활동으로 이벤트 개최도 계속하였다. 1983년에 다시 오오사카에서 개최된 제22회 일본 SF 대회 DAICON 4에서도 오프닝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호평을 얻었다. 이들의 영상제작 노하우는 ‘DAICONFILM’이라는 아마추어 필름제작활동을 거쳐 더욱 축적되었고, 1985년까지 수년 동안 특촬물이 제작된다. 이 시기 제작된 작품이 황당한 영웅을 등장시킨 〈쾌걸의 라뎅키(快傑のらでんき)〉, 전대물의 새로운 해석 〈애국전대일본(愛國戰隊大日本)〉, 수십년 동안 계속되는 일본특촬물의 원조 〈울트라맨〉에 대한 오타쿠들의 오마쥬 〈돌아온 울트라맨〉, 〈야마타노오로치의 역습〉 등이다. DAICON 4가 끝나고 학교에서 제적당한 안노 히데야키(庵野秀明)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스탭으로 참여하며 현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한편, 당시 24세의 야마가 히로시(山賀博之, 現 가이낙스 부사장)는 상업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기획서를 들고 반다이와 협상을 벌이다 성공하여 가이낙스를 설립, 극장용 아니메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王立宇宙軍;オネアミスの翼)〉를 제작한다.

 가이낙스는 1983년 기획 후 4년만에, 그리고 1985년 파일럿 필름이 제작된 지 2년만에 1987년 3월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를 개봉했다. 영웅적이지도 않고 삶에 대한 목표도 없이 나태하게 살던 주인공 ‘시로츠크’나 거리에 나가 신의 소리를 들으라고 전단을 나누어주는 ‘라이쿠니’는 기존 아니메에서 볼 수 없었던 주인공들로, 특히 우주비행사를 자원하고 정부와 미디어에 의해 영웅이 된 시로츠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솔직함을 보여주었다.

 감독 야마가 히로시를 비롯해 상업 애니메이션 제작경험이 거의 없던 20대 스탭들이 만든 이 작품은 탁월한 작화와 연출로 평범한 주인공이 무기력을 이기고 우주로 올라 지구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감동과 리얼리티를 보여주었으나 흥행에는 참패하여, 8억 엔이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회수하는 데 실패하는 비운을 겪는다.

 1986년 작품제작중 가이낙스는 제네럴 프로덕트와 함께 도쿄 기치쇼지(東京吉祥寺)로 이적하고 1987년 9월에는 록밴드 ‘BOOWY’의 프로모션 비디오 〈마리오네트〉를, 그해 12월에는 빅터의 TV 광고 〈하이퍼 로봇 콤보〉를 제작한다. 그리고 1988년 10월, 데자키의 스포츠 아니메 〈에이스를 노려라!〉를 패러디한 안노의 첫 작품 〈톱을 노려라!(トップをねらえ!)〉 OVA 시리즈가 출시된다.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가 열혈주인공이 등장해 승리를 구가하는 보통의 아니메와 달리 인간문제의 본질에 접근한 작품이었다면, 자신이 보고 즐긴 온갖 아니메와 특촬물, 일본영화를 패러디한 〈톱을 노려라!〉는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를 위한 ‘첫번째’ 오타쿠 아니메였다. 감독의 의도대로(인터뷰에서 안노는 적어도 세 번 이상 보아도 질리지 않을 작품을 만들려 했다고 밝혔다) 〈톱을 노려라!〉는 볼 때마다 또 다른 것을 발견케 하여 오타쿠들의 주목을 끌었다.

 가이낙스는 자신의 두번째 아니메, 안노의 첫번째 아니메 〈톱을 노려라!〉를 통해 자신들은 오타쿠이며, 오타쿠를 위한 아니메는 이러한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은 OVA 〈오타쿠의 비디오 1982〉, 〈오타쿠의 비디오 1985〉를 통해 ‘우리는 오타쿠’라고 더욱 당당하게 외쳤다.

 80년대 오타쿠를 주인공으로 한 이색적 청춘백수(!) 드라마 〈오타쿠의 비디오〉 시리즈는 아니메 황금기인 당시의 독특한 열기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에서는 치밀한 데이터로 오타쿠의 생태를 르포 형식으로 그린 ‘오타쿠의 초상’도 수록되어 있다.

 가이낙스와 안노는 NHK를 통해 해양 어드벤처 소설 〈해저 2만 리〉를 가이낙스 식으로 각색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를 발표, 미소녀, SF, 어드벤처, 개그가 혼합된 새로운 분위기로 광범위한 계층의 호응을 얻는다.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이 작품은 공중파 재방 이후 팬들의 요구로 케이블 TV에서 무삭제판으로 방영되었는데, 발명가 장과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신비의 소녀 나디아가 그들을 쫓는 그랑디스 3인조에 맞서 모험한다는 밝고 명쾌한 구조로 시작된다. 나디아는 인도 혼혈이라는 점만 빼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미소녀 캐릭터이며, 많은 발명품을 척척 만들어내는 장도 친근하다. 게다가 이들을 쫓는 그랑디스 3인조는 〈타임보칸〉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역에 대한 오마쥬이다.

 이처럼 수용자와 익숙하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베일에 감추어진 세력이 등장하고 나디아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며 급격히 방향전환한다. 가고일, 레드 노아, 네모 선장, 뉴노틸러스호 등이 등장하며 암시와 복선으로 잠복한 본래의 이야기(가이낙스와 안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선보이고 종래에는 작품 초반부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가이낙스는 PC 게임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 1989년 PC9801용 게임 소프트웨어 〈전뇌학원 1〉이 제네럴 프로덕트에서 출시된다. 퀴즈 형태의 어드벤처 게임으로 크게 히트하여 총 4편까지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이 중 가이낙스 최고의 히트작은 1991년 출시된 〈프린세스 메이커〉이다. 제목 그대로 한 소녀를 공주로 만드는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키우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낳는다(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특화장르를 발전시킨 원조격이다). 이로써 제네럴 프로덕트는 상품류의 제작판매와 페스티벌 주최를 중단하고 가이낙스와 합병해 기획・개발업무를 맡는다.

 가이낙스는 1992년 PC 통신 BBS ‘GAINAX-NET’를 개설했고, 1995년에는 ‘NIFTY-serve’ 내에 ‘가이낙스 스테이션’을 설치하는 등 네트워크 서비스도 시작했다. 이벤트 활동도 강화해 1994년 가이낙스제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1995년도 제2회 가이낙스제에서는 행사장 내 LAN과 외부 BBS, 인터넷을 유기적으로 링크시켜 네트워크 내 가상 이벤트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984년 크리스마스에 설립된 가이낙스는 1995년 10월 6일부터 TV도쿄계를 통해 방영된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일약 논쟁의 중심부에 서게 되었다. 총 26화의 TV 아니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작품 초반 미소녀 캐릭터와 로봇 메카닉물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며 진행되다가 이리저리 비틀어버린 내러티브와 복잡한 배경사상, 모호한 캐릭터들로 일본의 다양한 오타쿠 시장을 통째로 접수한 초유의 작품이 되었다.

 아야나미 레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의 상큼한 교복과 동시에 등장하는 섹시한 슈트는 미소녀 오타쿠들의 표적이 되었다. 또 신지와 레이 그리고 아스카, 미사토의 불안전한 정신상태에 열광하는 오타쿠들도 있었다. 네르후, 제레, 아담과 리리스 같은 수수께끼에 열광하는 오타쿠들, 인류보완계획, 사도, 에바의 존재에 대한 음모론적 분위기에 열광하는 오타쿠들, 구약성서와 사해문서, 유태교 신비주의 같은 요소 역시 오타쿠를 겨냥하고 있었다. 제3동경시 빌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도와 에바의 전투는 특촬물 오타쿠를 겨냥한 것이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고 오타쿠들은 가이낙스가 집어넣은 모든 것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오타쿠와 완전 싱크로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가이낙스는 전작들의 흥행실패를 뒤엎고 경제적 안정을 누렸으며, 오타쿠의 아니메를 제작하는 가이낙스로 부상했다.

 자신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오타킹이 되기 위해 노력한 가이낙스는 치밀하게 준비했고, 새로운 시도를 계속했다. 그리고 오타쿠 시장을 목표로 치밀하게 마케팅을 전개했다(가이낙스는 자사의 홈페이지에 한글판도 마련했다. 한국시장의 오타쿠들에게까지 마케팅을 시작한 것이다!). 그 마케팅이 가장 화려하게 꽃 피운 것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에바 신드롬’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세기말 아니메 수용자들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다양한 오타쿠들에게 만족을 줄 치밀한 전략 속에서 잉태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오타쿠였고, 오타쿠를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ISSUE: 에바, 오타쿠들과 싱크로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은 1995년 10월 6일부터 1996년 3월 27일까지 TV도쿄계를 통해 방영된 작품으로, TV 시리즈는 총 26화로 구성되어 있다. 안노 히데야키 감독, 가이낙스 내 프로젝트 에바에 읳 ㅐ탄생된 스토리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에바 신드롬을 만들며 세기말 일본과 우리 나라 아니메 팬들을 사로잡았다. TV 방영시 평균시청률 7.1%에 불과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90년대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에게 발견되어지고 그들과 싱크로되며 폭발적인 힘을 보인 것이다.

 현실과 일치할 수 없는 이들이 에바와 일치할 수 있다. 국가, 기업,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중요성은 일본 구세대들에게는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붕괴되어가고 있다.
미야다이 신지, 《Japan Times》(1997. 5. 10) 인용


 에반게리온은 부모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부모들의 울타리 밖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강한 압력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사요코, 《Japan Times》(1997. 8. 1) 인용

 국가, 기업,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구세대의 가치라 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무엇’에 폐쇄적이라고 할 만큼 열광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 이들을 일컬어 ‘오타쿠’라 한다. 이들은 구세대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덕목에 일치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국가보다 가족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이 구축한 세계, 그리고 그것에 매달리는 자기 자신이었다. 이렇게 현실과 일치할 수 없었던 그들은 대신 ‘에바’와 싱크로할 수 있었다.

 오타쿠들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혼재된 복잡한 텍스트들을 자기 식으로 읽어냈다. 일본의 어느 출판사 편집장은 약 7천 개에 이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홈페이지를 제작한 오타쿠 중 15명 정도를 선발, 기획팀을 구성해 『신세기 에반게리온, 더 이상의 수수께끼는 없다』는 책을 펴내 30만 권 정도를 팔기도 했다. 이 책은 기독교신앙, 사해에서 발견된 고대구약성서, 칼 융의 심리학, 유전공학, 유태교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이론들을 동원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분석하고 있다.

 도망가면 안 돼!


 작품 초반부의 스토리는 매우 명확했다. ‘사도’라는 정체불명의 적이 매회 침공하고 14세의 ‘신지’, ‘레이’, ‘아스카’는 범용결전병기 인조인간 에반게리온을 타고 사도를 격퇴한다. 이러한 구도는 슈퍼로봇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즉, 정체불명의 적이 지구를 침공하여 지구를 구할 최신병기가 숨어 있는 연구소를 집요하게 공격하면, 열혈주인공은 슈퍼로봇을 타고 그들이 보낸 로봇과 싸운다. 늘 그렇듯 궁지에 몰리다 회심의 일격으로 승리를 거두고 펴오하가 찾아든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시작도 다른 슈퍼로봇물처럼 익숙했다.

 2015년, 아버지의 호출로 제3신동경시에 도착한 이카리 신지는 거대한 괴물 사도(제3사도 사키엘)의 습격으로 네르프에 도착하자마자 에바를 타고 출격해 사도와 싸우게 된다. 실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지는 사도의 무차별적 공격을 받고, 어느 순간 에바 스스로 폭주에 사도를 해치운다. 그리고 매회 새로운 사도가 네르프를 공격하고, 네르프는 그에 맞선 새로운 전략으로 사도에 대항한다.

 적(사도)이 연구소(네르프 본부)를 공격하고 이에 맞선 로봇(에바)이 적을 격퇴하는 로봇물의 기본 구도는 유지된다. 특히 거대한 빌딩 사이로 몸을 숨겨 사도를 공격하는 장면은 특촬물의 공격신처럼 박진감이 넘치면서도 슈퍼로봇물에서 볼 수 없었던 사실적인 묘사로 매력을 더한다. 신지와 아스카의 톡톡 튀는 개그와 레이를 바라보는 신지의 묘한 눈초리, 어른이자 연인이며 부모이기도 한 미사토의 존재도 그러하다.

제4사도 샴셸은 신지가 조종하는 초호기의 프로그 나이프 공격으로 격퇴되고, 지하의 네프르 본부를 공격한 제5사도 라미엘도 전국의 전력을 모아 거대한 라이플로 격퇴된다.
제6사도 가기엘은 아스카의 공격으로 격퇴당하고, 분리와 합체가 자유로운 제7사도 이스라펠은 초호기와 이호기의 동시공격으로 섬멸, 마그마에서 순식간에 부화・증식한 제8사도 산달폰은 이호기의 공격으로 격퇴된다.
거대한 거미모양의 제9사도 마토리엘은 성층권에서 공격을 시도한 에바의 공격으로 물리쳐졌고, 제11사도 이로울은 네르프의 컴퓨터 시스템인 마기에 침입해 자폭을 유도하지만 실패한다. 공중에 떠 있는 구체와 지상의 그림자 제12사도 렐리엘은 초호기를 빨아들인다. 내부전원이 다 끊겨버린 초호기는 스스로 재가동되어 그림자 모양의 본체를 찢어버린다.

 그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매회 해석을 강요하는 암시와 복선으로 수용자를 편안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느닷없이 인류보완계획이라는 화두가 던져지고 특무기관 네르프와 제레라는 비밀조직이 나오며, 사도가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무엇인지(인간과 99.9% 동일하다는 단서만 있다) 제시되지 않는다. 이들이 네르프 본부를 공격하는 이유도 알 수 없다. 또 사도에 맞선 에바의 존재도 오리무중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극히 단편적인 답이 매회 조금씩 제시될 뿐이다.

 왜 싸우는지 모르는 신지는 늘 회의한다. 지구를 지키는 열혈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등을 보고 외로워하고 쓸쓸해하는, 그래서 자기 폐쇄적인 주인공이다. “도망가면 안 돼!”를 외치며 싸우는 주인공은 슈퍼로봇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카리 신지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주인공들도 대인기피증 혹은 자폐증에 갇힌 듯하다. 세컨드 임팩트 때 남극에서 겨우 살아남은 미사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 갑자기 명랑해져 네르프에 들어와 사도와 싸운다. 그러나 미사토의 과장된 명랑함은 마음의 상처에서 시작된 반작용,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갈까 두려운 데서 비롯된 것이다.

 에바 제로기 파일럿 아야나미 레이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법이 없는 레이의 존재는 마치 가면을 쓴 인물 같다. 태어날 때부터 에바 파일럿으로 태어난 레이, 자신이 죽고 나면 다른 복제 레이가 그 자리를 대치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감정이 없다. 신지의 어머니 유이의 복제인 레이는 신지에 대해 미묘한 감정변화를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마음, 이카리 군과 함께 있고 싶어”라고 깨닫지만 결국 사도와 맞서 죽게 되고 또 다른 새로운 레이는 앞선 레이가 각성한 마음의 깨달음을 알지 못한다.

 밝고 명랑한 것 같은 소류 아스카 랑그레도 어머니가 자기 앞에서 자살한 상처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강함으로 무장하려 한다. 제22화 ‘적어도 인간이 되어라’에서 아스카는 사도에게 기억을 침범당하는 정신공격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정신을 엿보지 말라며 괴로워한다. 사도에게 당한 정신공격, 그리고 자신보다 뒤져 있다고 생각하는 신지와 레이에게 구원되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아스카는 자신의 마음으로 깊게 숨어버린다. 제23화 ‘눈물’에서 아스카는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러 에바를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결국 폐인이 되어버린다.

 네르프의 책임자이자 이카리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우 역시 어떤 인물인지 종잡을 수 없다. 마기 컴퓨터를 책임지는 리츠코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관계도 복잡하다. 겐도우와 유이는 사랑하는 부부였고 유이의 혼은 에바 초호기에 복제되었으며 레이는 유이의 복제이다. 리츠코의 어머니는 겐도우를 사랑했고 마기 컴퓨터에 이식되어 있으며 리츠코도 겐도우를 사랑하며 미사토의 애인인 카지와도 미묘한 관계이다. 아스카는 카지를 좋아하고 카지는 미사토의 전 애인이었으며 미사토는 여전히 카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들은 상처를 통해 서로 얽혀 있다. 모두들 “도망가면 안 돼!”를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전반부는 잘 짜여진 슈퍼로봇물처럼 보이나 순간순간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의 상처는 수용자들을 다른 방식으로 흡인한다.

레이에게 겐도우 사령관은 ‘모든 것’이다. 신지는 어머니의 클론인 레이에게 묘한 모성의 감정을 느끼고 이러한 신지의 감정은 레이에게도 전이된다. 신지와 레이가 서로 에바를 바꿔 엔트리 플러그에 들어갔을 때 신지는 그 안에서 레이를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는 엔트리 플러그 안에서 어머니 유이를 느낀 것이다. 결국 신지와 레이, 겐도우와 레이의 관계는 묘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구조이다. 그래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중요한 것은 모성이고 어머니이다. 즉,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오타쿠에게 없는 것, 그리고 그들이 갈구하는 것을 안노 히데야키는 모성이라고 보았다.

 내면의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부터


 작품 후반부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심리극 형태를 취하며 신지가 겪어야 하는 첨예한 갈등을 보여준다. 신지는 작품 전반부를 통해 왜 싸워야 되는지, 왜 에바를 타야 하는지를 되묻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를 만나려다 갑작스런 제3사도의 침입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에바를 탔던 그때부터, 신지는 의문을 제기하며 괴로워한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 그리고 커다란 가방 옆에서 울고 있는 신지. 이 모노크롬의 플래쉬백은 신지가 버려진 아이였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14세 되는 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았을 때, 분노와 그리움이 뒤범벅된 마음의 자신을 아들로 부른 것이 아니라 에바 초호기의 파일럿으로 부른 것임을 알고 신지가 더욱 절망하고 분노했으리라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특별한 목적이나 불타는 정의감 없이 에바를 탄다는 서글픈 비극을 느낀다.

 물론 제19화 ‘남자의 싸움’에 이르러 신지는 자신이 싸우는 목적을 발견한다. 카지와 이야기를 나누다 사도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도를 공격하던 에바의 에너지가 떨어지자 가련하게 에바를 기동시키려는 신지의 표정은 불타는 정의감을 소유한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집착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20화 ‘마음의 형태, 사람의 형태’에서 신지는 다시 에바에 타는 이유를 자문한다. 신지는 초호기가 폭주하자 싱크로율 400%를 넘어서고 엔트리 플러그 안의 LCL 용액에 용해된다. 그 안에서 신지는 누군가와 질문을 주고받는다. 그것은 자신과의 질문일 수도, 수용자와 신지 혹은 안노와 수용자의 실문일 수도 있다.

 적, 적, 적, 적 모두가 적이야! … 나를 지탱하는 건 에바에 타는 것.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잘해준다. 그래서 타야 돼. 그리고 적하고 싸워서 이겨야 해. 그게 아니면 난 아무 것도 아니야.… 난 아버지에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거야.

 인간을 공격하는 사도, 그리고 사도의 공격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에바, 에바를 조정하는 14세의 소년소녀 레이, 신지, 아스카, 그리고 그들의 마음,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들 14세 칠드런의 내면이야기는 계속되어 제24화 ‘마지막 사도’에서는 인간형 사도 ‘카오루’가 등장한다.

 돌연 등장한 카오루는 신지에게 “난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카오루가 마지막 사도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에바를 타고 카오루를 쫓아간 신지는 카오루를 죽인다.

 수용자들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후반부를 통해 주인공들의 내면(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고, 신지가 자신을 이해한 마지막 사도 카오루를 죽이는 고통까지도 지켜봤다. 그리고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베일에 감추어진 인류보완계획과 서드 임팩트, 그리고 네르프와 제레의 베일이 벗겨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지막 제25화, 제26화는 지금까지 이야기전개를 중단시키고 아무런 해답 없이 등장인물 내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25화 ‘마지막 세계’에서는 신지는 “날 버리지 말라”고, 미사토는 “날 떠나지 말라”고, 아스카는 “혼자 있고 싶지 않다”고, 레이는 “날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26화 ‘세계의 가운데서 나를 소리치는 것’에서 보완되는 신지의 마음이 보여진다. 인류보완계획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마음, 마음속의 공허에 대한 보완, 마음과 영혼의 도움에 의한 보완”으로, 마치 사이코 드라마처럼 모든 사람들이 신지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신지는 그것에 대해 대답하고 불안과 쓸쓸함을 해소한다. 그러한 신지에게 모든 사람이 박수를 보낸다.

 날 버리지 말아, 날 떠나지 말아,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날 죽이지 말아…. 이것은 그들만의 갈등이 아니라 현대인의 갈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없애는 것, 그것이 마음의 보완이다.

죽음과 부활 그리고 진실


 1997년 3월 극장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사도신생(シト新生:DEATH and REBIRTH)〉가 개봉되었다. 극장판 1편격인 이 작품은 TV 시리즈 제1화부터 제24화까지 주요 장면을 편집한 ‘DEATH’와 그 뒤 새로운 이야기를 담은 제25화격인 ‘REBIRTH’로 구성되어 있다.

 최후의 사도 카오루가 죽자 제레는 인류보완계획을 시작한다. 인류보완계획은 “실패한 군체로서 이미 결판이 난 인류를 완전한 단계의 생물로 인공진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서드 임팩트이기도 하다. 제레는 각국의 마기를 동원해 네르프에 있는 오리지널 마기에 해킹을 시도하고, 네르프는 마기의 강탈을 막으려 리츠코 박사를 복귀시킨다. 제레는 마기의 해킹이 실패하자 전략자위대를 투입해 네르프를 차근차근 접수한다.

 미사토는 폐인이 된 아스카를 이호기에 태워 호수에 감추고 카오루를 죽인 후 어딘가에 숨어 있는 신지를 찾아나선다. 겐도우는 후유츠키에게 뒷일을 맡기고 레이와 함께 터미널 도그마로 향하고, 에바 이호기에 탄 채 자위대의 공격을 받던 아스카는 새롭게 각성해 전략자위대의 수많은 병력을 처참하게 부수어버린다. 순간 아홉기의 양산형 에바가 나타난다. 그리고 엔딩.

 1997년 7월 극장판 2편이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마지막편 〈에반게리온의 종말 ; 에어/진심을 너에게(END of EVANGELION;AIR/まごころを君に)〉가 개봉되었다. ‘AIR’는 전작 ‘REBIRTH’에 해당되므로 ‘REBIRTH’와 같은 제25화이고 ‘진심을 너에게’는 제26화인 셈이다.

 아스카가 아홉기의 양산형 에바를 죽이는 순간 제레가 만든 복사판 롱기누스의 창이 이호기의 눈을 관통하고 죽어 있던 양산형 에바가 부활하며 이호기를 공격한다. 미사토가 찾아낸 신지가 초호기 앞에서 아스카의 비명을 듣고 고통스러워하자 초호기 스스로 전략자위대의 봉쇄를 뚫고 신지 앞에 선다. 초호기에 타고 지상에 오른 신지가 본 것은 뼈와 내장만 남은 이호기, 신지의 절규는 초호기의 울부짖음으로 바뀌어 달의 표면에 꽂힌 롱기누스의 창을 돌아오게 하고, 롱기누스의 창을 손에 넣은 제레는 인류보완의식을 시작한다.

 한편, 지하 터미널 도그마의 겐도우는 레이를 이끌고 리리스에게 가나 레이는 겐도우의 명령을 거부하고 리리스와 합체한다. 이로써 십자가에서 벗어나 제레의 가면이 벗겨지고, 유이의 얼굴인 리리스는 지상으로 올라간다. 롱기누스 창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초호기는 양산형 에바에 둘러싸여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자, 세휘롯 나무(카바라 사상의 상징. 겐도우 집무실의 천장과 바닥에 그려져 있고, 시리즈 오프닝에 등장하는 문양)의 모습으로 변한다.

 인류보완은 시작되고 모든 사람은 원시의 바다(LCL 용액의 성분과 같은)로 돌아가 인간 혼이 해방된다. 신지는 에바 속에 보완된 완전한 인간, 아니면 괴롭지만 불완전한 인간 중 무엇을 택할지를 놓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화면은 실사로 변화한다. 1997년 도쿄, 성우들의 모습, 영화를 보기 위해 늘어서 있는 오타쿠들의 모습, 그리고 다시 신지의 모습으로. 신지는 아스카에게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부탁하나 아스카는 신지의 부탁을 거절하고 신지는 아스카의 목을 조른다.

 신지가 백사장에서 눈을 떴을 때 바다에는 에바가 서 있고, 옆에는 아스카가 쓰러져 있다. 신지가 아스카의 목을 조르자 아스카는 손을 들어 신지의 뺨을 쓰다듬는다. 목을 조르던 손을 멈추고 신지는 눈물을 흘리고 아스카는 예전과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기분 나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도망가면 안 돼”, “다 죽어버리면 좋을텐데”, 그리고 “진심을 너에게”? 그렇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인류보완계획, 사도, 네르프, 제레, 에바, 신지, 레이, 아스카, 미사토, 겐도우…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의 마음을 발견하는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오타쿠 문화가 피어낸 꽃


 온갖 화제를 모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허망하다.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없었던 내면묘사, 자의식의 표출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자기파괴적이기도 해서 반대의견도 많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내면갈등을 인물의 독백 혹은 자의식과의 대화로 풀어내고 있다. 관계로 상처를 푸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문제를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다시 마음으로 깊숙히 들어가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끊어지고 상징적인 화면이 삽입된다. 작품의 상징과 수수께끼들도 몇 개의 대사를 통해 해답을 찾아야 한다. 신의 문제, 세컨 임팩트, 서드 임팩트, 인류보완계획, 아담, 리리스, 리린, 네르프, 제레, 사해문서, AT 필드 등에 얽힌 의문은 작품 곳곳에 즉흥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오타쿠들이 열광할 만한 패러디를 목표로 온갖 다양한 작품들을 뒤섞어놓은 〈톱을 노려라!〉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한마디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오타쿠 문화의 정점이다.

 20세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신드롬 〈신세기 에반게리온〉. 세기말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청소년들도 리얼타임으로 사로잡았다. 오타쿠 문화에서 피어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꽃은 우리 나라에도 피어났다. 아니메는 우리 나라에 건너와 청소년들의 문화를 보완한 것이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보완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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