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기억상실인 척 해버렸지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특정 에피소드의 기억만 잃어버리는 사례가 보고된 적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자기 배우자만 새까맣게 잊었습니다. 따위는 부자연의 극치인 것.
전생활사건망증처럼 「여긴 어디? 나는 누구?」하는 것은 너무 과장이 심하고, 무엇보다 앞으로 할 일에 지장이 생긴다.
어느 일정 기간의 과거를 잊어버리는 역행성건망증이 가장 어울리겠지만, 이것은 보통 해마 장애로 인해 새로운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전향성건망증과 함께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증례적으로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아야나미의 말로 미루어 보면, 지금은 아마 에바와 접촉실험을 한 뒤일 것이다. 초호기에 빨려들어가 돌아오지 못했을 어머니가, 그 육체만은 돌아온 세계. 라는 것.
그렇다면, 에바 탓을 하는 것으로 다소의 부자연스러움은 얼버무릴 수 있을지도.
통곡하며 나를 부둥켜안으려는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말리고 있는데, 활짝 열린 문가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유이군이 눈을 떴다고 해서 와 봤는데, 이게 무슨 소란인가?」
실내의 꼴을 보고 초로의 신사가 얼굴을 찌푸린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은데, 과연 연륜이라는 것일까?
아버지처럼 약간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부사령이다.
「이카리. 기쁜 건 이해하지만, 절도를 차리게」
「후유츠키 선생니임, 큰일이 났습니다! 유이가아, 유이가!」
눈물은 물론이고 콧물까지 흘리는 아버지의 광란은 초호기를 잃었을 때, 그 이상 같았다.
「유이군이 뭐 어쨌다고. 보아하니 일주일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 치고는 건강해 보이는데?」
「저기…」
후유츠키 부사령, 이라고 부를 것 같아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기억상실인 척 하자고 마음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그러나, 유이군. 이카리가 이래서 말이 안 통하는군. 자네가 사정을…」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말문이 막힌 부사령이, 식초라도 마신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유이군. 자네의 그런 점은 품성으로서 좋지 않은 것은 아니네만, 때와 장소는 좀 분별해 주었으면…」
「초면인 분께 이름으로 불리는 건 아무래도….
아앗!? 형이상생물학자 후유츠키 교수님 아니신가요. 실례했습니다.
아무래도 입학식 이래로 처음 뵙는지라…」
재차 말문이 막히고 나서야 부사령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인식한 모양이다. 세제라도 마신 것 같은 표정을, 내게, 아버지에게
「이, 이카리. 큰일났구나!」
「아까부터 그렇게 말씀드렸잖습니까!」
「너는 그냥 큰일이라는 말밖에 안 했잖아!」
큰소리에 큰소리로 마주 언성을 높인 부사령이, 아아, 아니 있어 보자. 라며 얼굴 반쪽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한순간이었지만, 그 부사령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나잇값을 못하고 격앙해 버렸군. 미안하네.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
「그 말씀대로입니다. 후유츠키 선생님」
완전히 진정한 상태로 돌아온 부사령이 진지한 눈빛을 보내왔다.
「유이군. 농담이라면 슬슬 그만두지 않겠나. 늙은이는 좀 버티기 힘들군」
너무나도 애달프게 호소해오니 양심이 아프다. 나도 저번 생에 꽤 낯가죽을 두껍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사과할 뻔 했다.
「희망에 부응해 드릴 수 없어…」
그런가. 탄식한 부사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유이군. …아아, 이렇게 불러도 무방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부사령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럼, 유이군.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는 듯하니…, 올해가 몇 년도지?」
「장난치지 마세요, 후유츠키 교수님. 1999년이잖아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필사적으로 어머니의 기억을 뒤진 결과, 선택한 것은 후유츠키 부사령을 만나기 직전의 시기였다.
아니나다를까, 침통한 표정의 부사령은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눌렀다.
「유이군. 놀라지 말고 들어줬으면 하네만, 금년은 서기력 2004년. 자네는 결혼해서 아이도 있네. 게다가 저어기 있는 이카리군이 자네의 남편이라, 이카리 겐도가 되었고」
말하며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버지는 끈 떨어진 망석중처럼 수긍만 거듭했다.
아버지. 정말로 어머니를 좋아했나보네. 나쁜 짓 해버린 걸까.
놀란 척을 하면 연기과잉으로 부자연스럽게 보일까 싶어,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멍한 시늉을 했다.
「우선은 그렇게 좀 알아주었으면 하네만」
기억력이 나쁜 학생이 알아듣도록 타이르는 듯한 말투. 시선을 돌리며 애매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자네 아무래도 기억이 혼란한 것 같으니,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만, 어떠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 뒤, 1시간도 되지 않아 기억상실을 연기하기로 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두부혈관조영, 두부CT스캔, 뇌파검사, 혈액검사, 심리측정검사 등 온갖 검사를 받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똑같은 것들을 질문받았다.
끝없이 반복되는 각종 검사에, 거짓말한 벌을 받고 있는 건가, 하고 좌절할 뻔한 것도 여러 번.
검사 결과, 정신오염에 의한 역행성건망증을 진단받았을 때는 안도와 동시에 드디어 풀려난다는 기쁨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역시, 도망치면 안 되는 거다.
안내받은 병실은 계속 이어지는가 싶더니, 소파 등이 마련된 응접실이 나왔다. 훌륭하게 갖춰진 비품류는 고가품 같고, 마치 호텔 스위트룸이다. 융단의 모족도 대단히 길고, 좀 정신사납다.
창밖을 보니 밤의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돌려졌던 걸까.
전속이라는 간호사에게 재촉받아 소파에 걸터앉았고, 후유츠키 부사령과 아버지가 맞은편에 앉았다.
「진정이 좀 되었나, 유이군」
수긍하려다 그만두었다. 기억상실 연기중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이 안 됨을 알고도 남음이 있네. 일단 자네가 쓴 논문, 연구보고서를 모아서 정리해 두었네」
부사령이 가리킨 쪽에는 다리에 작은 바퀴가 달린 캐비닛. 서랍장 같은 상자들에 바인더들이 실려 있는 것이 유리문 너머로 보인다.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진정되면 읽어보게」
테이블에 놓인 클립보드에는 프린트아웃이 여러 장. 이쪽은 이카리 유이의 신상조사서 같다.
「아직 일이 남아 있으니,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네」
「…후유츠키, 뒷일은 맡긴다. 나는 유이를 수발들겠다」
「이카리, 잘 생각하게. 지금의 유이군에게 너는 본 적도 없는 남일세」
짧게 신음한 아버지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짚고, 언제나의 그 포즈를 취했다. 안경 너머로 던지는 눈길이 친절하고 슬픔으로 가득한데, 받아줄 수가 없다.
「…그런가」
아버지, 미안.
약속한 듯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 퇴실하는 모습을 눈길로 쫓지 않으려 노력한다.
멈춰서서 돌아보는 기색을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 이카리 유이 】
【 소화 52년 3월 30일 출생 】
신상조사에 적힌 정보를 실마리로, 어머니의 기억들을 준설한다.
…대학 입학, 후유츠키 부사령과의 해후 등 이벤트가 계속되다가, 아버지와의 첫만남이 있었다.
대학 졸업, 게히른 입사, 결혼의 기억을 쫓아가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음을 이해했다. 다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선명하게 기억해 봤자, 결국 타인의 기억이다. 실제로 체험한 감동 같은 것까지 살아나지는 않는다.
…
그리고, 도저히 시선을 마주하기 어려운 한 줄에 도달한다.
거기에 적힌 것은, 여기 오자마자 내가 저지른 과실의 상징. 아니, 그 저지른 이유가 자신의 감정과 보신에 지나지 않았던 이상, 거의 죄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
【 평성 13년 6월 6일 장자 신지 출산 】
아버지의 배우자라는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고른 안이한 방법은, 그에게서 모친을 매앗아가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
임신을 알았을 때의 어머니의 기쁨이 스쳐간다. 출산의 고통에 임했던 어머니의 결의를 알게 된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에 대한 생각을 깨닫는다.
자신이 원해서 태어났음을 더 이상 확실할 수 없는 형태로 제시받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었음을 틀림없이 목격하면서.
그에 대해 털끝만치도 생각지 않고 자기 생각만 했던 자신은, 이 얼마나…
…
토독토독 눈물방울이 종이를 두드린다. 【 신지 】라는 글자가, 눈물에 번졌다.
계속 つづく
2007.04.02 PUBLISHED2021.10.01 TRANSLATED
2021.11.24 TRANSLATION REVISED
원본 シンジのシンジによるシンジのための補完 NC 第壱話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