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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안노 히데아키 × 노비 노비타

2000년 1월 18일 화요일

「스칼렛」

 

 

Scarlet

 

WRITTEN by Kei (2000.1/18)
Piratically Translated on (2021.9/11)

 


 

평소와 다름 없는 점심시간.
평소와 다름없는 세 명이서 둘러앉아 점심밥을 먹고 있었다.
안전히 먹어치운 도시락 상자를 챙겨넣기 위해 내가 가방에 손을 뻗었을 때, 켄스케가 말했다.
「근데, 신지. 너하고 소류는 결국 어떤 관계야」
「……뭐라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어떤 관계라니, 반 친구잖아」
「그카고 집이 옆집이라가 얼라 때부터 붙어댕긴, 마 소꿉친구 관계구마잉」
즉각 토우지가 고의적인 티가 나는 첨언을 달았다.
내 대답에 만족할 수 없는지 켄스케는 틀려ー었어, 라며 과장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딴 거야 이미 알고 있지. 내가 묻는 건 좋아한다거나, 사귄다거나, 그런 방면의 문제라고」
「…………」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진절머리가 났다.
토우지와 켄스케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때면 곧잘 이 화제를 꺼낸다.
그리고 내가 곤란해 하면, 그 모습을 안주 삼아 히죽히죽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녀석들과 알게 된 지도 벌써 1년 하고 5개월이 지났다.
역시 최근 들어서는 나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적당히 다루는 요령이라는 것을 몸에 익혀가고 있었다.
「별로,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정색하면 두 사람이 바라는 바.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정말이야? ………야, 신지. 농담 아니고 묻는 건데, 소류한테,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는 거야?」
켄스케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가며, 확인하듯이 물었다.
그 말에 무심코 얼굴을 보았더니, 켄스케는 꽤 진지해 보였다.
「……………뭐야, 왜 그런 걸 묻는 건데?」
평소와 달리 장난치는 기미가 전혀 없어서, 조금 당혹스럽다.
일단 되물어서 켄스케의 태도를 엿보자고 생각했다.
………만, 그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켄스케가 안경을 고쳐 쓰는 시늉을 하면서,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순간을, 나는 확실히 봤다.
「아니 뭐, 실은 어제 3학년 선배가 나한테 신지하고 소류에 대해 묻는 거야. 어떤 관계냐고.
너희들은 부정하지만, 주위에서 보면 사귀는 사이로밖에 안 보이니까」
「아, 아니라고 하잖아……」
「네이네이,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어 보라고. ……그래서 본인에게 물어보고, 정말 사귀는 게 아니라면, 그 선배 소류에게
고백하겠다던데. 그래서 정말 어떤지 나한테 알아달라고 부탁하더라고」
아스카에게 고백한다고?
……무슨 벌칙게임인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을…….
「차ー암내! 그런 광폭녀가 어디가 좋다는 기고. 눈이 삔 빙시가 다 있네」
나도 살짝 생각한 부분을, 토우지가 대신 말해 주었다.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토우지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뒷담을 하면 싫잖아?」
「크음, ……마, 그것도 그렇나」
「그래도 뭐, 그럭저럭 잘 생겼다고 생각해. 여자애들 사이에 인기도 높은 선배 같고」
나는 짚이는 것이 있는지 상상해 보았다.
3학년에, 잘 생기고, 인기가 있는……….
하지만, 전혀 모르겠다.
알 리가 없지.
동아리 활동 따위도 하지 않는 내가, 3학년 선배를 알 리가 만무하다.
그래도 중2 주제에 사진으로 용돈을 쓸어담고 있는 켄스케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믿을만할 것이다.
「그니까네 알맹이는, 한눈에 소류한테 반해부렀다, 그기가……. 카문, 닌 우얄낀데, 신지」
엄청 즐거운 듯이 토우지가 물어왔다.
그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느낌에 거슬렸다.
「………별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랴……, 글타는데, 켄스케」
토우지는 코를 벌름거리며 켄스케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아, 소류와 가아ー끔 아침에 나란히 등교하거나, 가아ー끔 방과 후 같이 놀러 다니는 신지로서는
걱정이 되어서 주스도 다 못 마시는 것 아니냐 생각해버리는 거야. ……우리는」
켄스케는 반 이상 남아 있는 내 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제, 그렇제. 이런 위기에 태평하게 주스 따위 처묵고 있게 생깄나. 으이, 범생?」
토우지는 히죽히죽거리며 성질을 긁어왔다.
「주, 주스하고 아스카는 상관 없잖아」
「오오? 그렇다는 것은, 역시 소류 걱정을 하는 건가?」
「…………」
현장은 완전히 두 사람의 페이스였다.
「워어, 기다리게나 토우지군. 어쩌면 사실은 반대로, 그는 걱정이 지나친 나머지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네.
그렇다면 그는 분명 남은 주스에 손을 댈 것이라 나는 보네만, 그러니까 마실 경우, 걱정을 하는 거지.
……그렇잖아, 이카리군?」
「아니, 있어봐라, 켄스케. 평범하게 생각하면, 이런 때 마실 생각이 들겠나. 못 마신다 카이.
맞제, 범생?」
「…………」
……시발.
주스 한 개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놀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빨랑빨랑 다 마셔버릴 걸 그랬…….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패배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때에는……….
벌컥
「……오옷? 야, 범생, 어디 가노? ……주스 갖고 가나. …안 묵고 버리게?」
「아니지, 그게 아니라네, 토우지군. 그는 지금 혼자서 주스를 마시고 싶어진 것이 틀림없다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도 모르는 선배에게 겁을 먹고, 꼴깍꼴깍, 갈증을 달래고 싶은 것이야, 분명히」
두 사람의 징그러운 개소리를 등에 받으며, 나는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그대로 수돗가 앞까지걸어온 나는, 갖고 있던 나머지 절반의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빈 종이곽을 곁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시발
갈증도 갈증이지만, 결과적으로 켄스케가 지껄인 말대로였다.
 
 


디ー잉, 도ー옹, 데ー앵, 도ー옹…………….
울리는 벨이 오늘 하루 수업이 모두 끝남음을 고한다.
점심시간 이후 청소시간을 끼고, 오후 수업이 2시간.
멍하게 있어서 그런지, 평소라면 갑갑하게 느껴졌을 시간의 흐름도 의식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방과후였다.
당연히, 오후 수업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시ー인지이!」
「우왁!」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아스카가 튀어나왔다.
움찔하는 바람에, 들고 있던 교과서가 손에서 떨어진다.
「아, 좀.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잖아」
「아, 아스카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렇잖아」
나는 황급히 아스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교과서를 줍는 척 하며 마음의 동요를 숨겼다.
「뭐야, 어차피 나라고 생각했었잖아. 아아, 아름다우신 아스카님, ……그런 느낌으로 좀 안 돼?」
「시, 시끄러워. 그럴 리가 없잖아. ……자의식 과잉이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므으, 신지 주제에 건방져………. 뭐, 됐어.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할게」
「…………」
오히려 듣다 못해 담아둘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일단 마음 속에만 묻어둔다.
「그보다 너, 지금부터 다른 볼일 없지? ……없겠지. 그럼 나 쇼핑 가고 싶으니까
따라 와. 답례로 짐을 들 수 있게 해 줄게」
허리에 손을 얹고 잘났다는 포즈를 취하며 제멋대로 떠드는 아스카.
오늘도 세계가 아스카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양, 당연히 이쪽의 사정 따위 상관할 리가 없다.
벨이 울렸을 뿐인데, 아스카는 벌써 가방을 메고 있다.
그 준비만반의 모습이,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음을 과시한다.
「……도대체가, 어ー떻게, 짐꾼을 하는 게 답례가 되는 거야?」
「내 짐을 들게 해 준다고 말하고 있잖아? 바・로・이 나의 짐. 좀더 솔직하게 기뻐하라고」
「……기쁘지 않아. 그쪽이야말로 솔직하게 짐 드는 것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
들어줄지 여부는 별개지만」
「흥, 너같은 거한테 숙일 머리 같은 건 갖고 있지 않네요」
「그런…………아」
대꾸하려는 순간, 아스카의 어깨너머로 토우지와 켄스케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처럼 히죽히죽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핥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무언가의 관찰자를 떠오르게 한다.
「……응? 뭐야?」
아스카가 내 시선의 방향을 알고는, 돌아보았다.
「아」
그 시선 끝에 있는 것들을 본 순간,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아스카는 갑자기 걸어나갔다.
「앗, 아스카……」
될 수 있으면 지금 저 둘이에게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게다가, 점심시간 때의 그것도 있고, 내버려뒀다가 아스카에게 무슨 뻘소리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가방을 집어들고, 마지못해 아스카의 뒤를 쫓았다.
아스카는 의자에 앉아 있는 둘이 앞에 멈춰섰다.
「……잠깐 너희들, 오락실에는 너희 둘이서만 가. 신지는 못 가.
오늘 내 짐꾼을 해야 해서 바쁘니까」
제멋대로 내 일정을 정해 버리는 아스카에게, 토우지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대답했다.
「응아?……뭐라꼬, 아 글나. 마ー 델꼬 가세요, 가세요. 우리하고 무슨 약속 하고 그런 거 읎어」
「그래? 그럼 됐지만, ………뭐야, 그 기분나쁜 웃음은」
아스카는 토우지를 힐끗 째렸다.
「암것도 아닌디. 그렇제, 신지?」
「크윽……」
나는 토우지의 시선으로부터 눈을 피한다.
하지만 그 피한 곳에는 켄스케의 안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안경이 조금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면 신지, 점심시간에 너한테 했던 얘기, 소류한테도 물어봐도 될까?」
「에? 아니, 어떨까나……」
생각했던 대로의 전개가 시작된다.
아스카가 알게 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뭔데? 무슨 얘기?」
흥미가 동한 아스카가 내게 물어온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 안달이 난 아스카는 켄스케 쪽으로 돌아선다.
「아이다, 가르쳐 줘」
「아아, 그래야 하나, 신지 괜찮겠어?」
「아, ……응」
나는 어쩔 수 없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고 해 봤자 말할 것이 틀림없으니…….
켄스케는 내게 히죽 웃어 보이고, 이렇게 말했다.
「신지하고 소류가 사귀고 있냐는 얘기야. 즉슨, 신지가 소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물었어」
「……!!」
「……뭐엇!!」
아스카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그러지도 못했다.
분명히 그 3학년 선배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놀라 버렸다.
「케, 케, 켄스케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얼레? 신지야말로 뭘 놀라고 있어. 얘기하라고 했잖아?」
그 차분한 대꾸에서, 확신범의 풍모가 엿보인다.
「그게 아니고……! 그 3학년 선배 얘기라고 생각했으니까……」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아차, 하고 아스카의 얼굴을 보았다.
고개를 수그린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좀전까지 새하얗던 피부가 이제는 새빨갛게 변했다.
주, 죽었다!
얼굴에 모였던 핏기가 싸악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반 걸음 정도 뒷걸음질쳤다.
시선을 아래로 돌리니, 가방 손잡이를 꽉 움켜쥔 아스카의 오른손이 보인다.
토우지는 이미 대피해서, 교실 구석에서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다.
켄스케만이 번둥번둥, 느긋하게 굴고 있다.
화, 화났어…….
상당히, 묵직한 데인져러스……!
바보켄스케!
아스카에게 이 화제는 금기라는 걸 알고도 그래!?
알면서, 도대체 왜!?
오니의 창끝이 향할 곳은 십중팔구 나인데…….
나는 아무 잘못 한 것도 없지만.
켄스케를 격하게 저주하면서, 조마조마하며 자세를 가다듬고 있는데……
오도카니 아스카가 중얼거렸다.
「……신지는, 뭐라고 대답했어?」
「…………에?」
예상과는 다른, 아스카의 말.
나는 얼굴을 방어하려던 가방을 내리고, 아스카를 마주보았다.
「신지는, 어떻게 대답했어?」
다시 한 번, 고개를 수그린 채 아스카가 말을 되풀이했다.
평소와 다른 아스카의 반응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켄스케가 대신 대답했다.
「그냥 반 친구랜다. ………아, 그리고 소꿉친구이기도 하다더군」
「그, 그건 토우지가……」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에서 발끈하고 말았다.
「………다른 건?」
「에? 아니, 딱히」
「흐응…………그랬어」
켄스케의 대답을 들은 아스카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새빨간 그대로였지만, 화가 났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시선이 눈 앞의 책상 위 아무 것도 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자 자기 신변의 안전을 확인한 토우지가 돌아왔다.
「카문, 소류 니는 신지를 우예 생각하는지, 그게 인자……」
「토우지! 그런 건………!」
「아 그래, 그런 얘기 한 적 없제. 그래도 마 좋은 게 좋은 거 아이가. 카이, 니는 어떻노, 소류?」
토우지 저 바보ー!
아스카가 웬일로 얌전하다고 까불다가 선을 넘어 버렸다!
그 이상 섣불리 자극해서는………
「……………신지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거잖아?」
……………얼레?
아스카는 그렇게 말하고,교실 문 쪽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얼레?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내 머릿속은 서서히 물음표들로 가득찼다.
오늘은 왜 화를 안 낸 걸까……?
그리고, 아스카의 모습이 교실에서 사라졌다.
「……뭐꼬? 방금 그 리액션」
「웬일이래? ……어째 부부싸움이 되지 않았는데?」
둘이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교실 문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대로 멍하니 있는데, 돌연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이카리군! 빨리 안 쫓아가도 돼!?」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학급위원장 호라키양이 무서운 얼굴로 서 있었다.
「뭐, 뭐야, 반장……」
「됐으니까! 빨리 따라가지 않으면 아스카 가 버릴 거야!」
「………간다니, ……어디로?」
「어디……! 정말이지, 바보!! 둔감! 나도 몰라!」
아무렇게나 떠들고, 반장은 쿵쿵 발을 구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기세 좋게 앉았다.
「…………」
「그, 그렇네. 야, 신지, 저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거야?」
켄스케가 당황한 듯 말했다.
명백히 자신의 예상과 엇나간 전개에 초조해진 것 같다.
「…………」
「야, 신지. 우리가 이래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서도……. 소류 쫓아가 팔로우하는 기
아무래도 좋지 않겠나?」
침묵하는 내게, 토우지도 말한다.
「어째 분위기 싸해져뿠는 것 같고……」
「아, 맞다. 신지, 쇼핑 가기로 하지 않았어? 소류하고 같이.
서둘러 따라가야 안 늦지……」
둘이의 무책임한 말은 귀에 닿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거야.
자기들이 부추겨 놓고서는…….
그 때.
갑자기 등을 힘껏 눌렸다.
「우와악!?」
더욱더 밀려서, 나는 앞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바, 반장!?」
게다가, 어느새 내 가방을……?
「빨랑빨랑 가라고!! 꾸물거리지 말고!!」
그대로 단번에 교실 밖까지 떠밀려 쫓겨났다.
황급히 뒤돌아보자, 반장이 나를 째리면서 말했다.
「……가서 풀어」
「하, 하지만……. 내가 가 봤자…………, 그보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뭐든지 좋아. 이카리군이 쫓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거야!」
「무슨……」
「시끄러ー워! 이러쿵저러쿵 그만 떠들고 빨리 뛰어가ーー!!」
「히익!」
나는 쏜살같이 굴러서 달아났다.
「실수했다가는, 한달 내내 주번형에 처할 거야ー!!」
달갑지 않은 격려가 등에 날아와 박힌다.
……반장, 아스카의 영향이 너무 지나쳐…….
 
 
「………………」
말하지 않아도, 아스카의 모습이 이상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은, 어째야 좋냐는 것이다.
하지만, 반장 덕분에 결심이 섰다.
고맙습니다…….
반장에게의 감사를 가슴에 품고, 나는 급히 아스카를 쫓았다.
계단을 한 번에 세 칸씩 날듯이 뛰어내려, 하교시간으로 붐비는 복도를 사람을 받아가면서 달려나간다.
달리면서 아스카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 반장이 한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 조금 전부터 있다.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문득 아스카를 보았을 때 눈이 마주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런 때는 어느 쪽이 먼저든, 나도 아스카도 황급히 눈을 피하곤 했다.
『이카리군이 쫓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거야!』
반장의 말이 귓속에 메아리친다.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주변에서 장단을 치며 놀리거나 하면, 아스카는 새빨갛게 될 정도로 굉장히 화를 내곤 한다.
……그런데, 방금의 그건 화난 것이었을까?
혹시, 나와 같이 정색한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신발장에도 아스카의 모습은 없었다.
서둘러 실내화를 신발장에 넣고, 초조하게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뛰쳐나간다.
………10년.
아스카와 만난 지, 벌써 10년이 된다.
그 동안, 우리는 항상 가까이 있었다.
최근에는 그런 일도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곧잘 서로의 방에서 놀기도 했다.
아스카에 대해서라면, 여러가지로 많이 알고 있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 아마 아무도 본 적이 없을 우는 얼굴이라던가, ………그 밖에도 이것저것.
헤아려 보자면 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누적된 10년의 벽은 한 없이 두껍다.
………적어도 근성 없는 내게는 그렇겠지.
지금 현재로서.
편지로 하던, 직접 하던, 주변을 아랑곳 않고 아스카에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한편 부럽기도 하다.
내게는 없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하지만, 어쩌면 오늘은, 그 벽을 마주해야 할 날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용기와 근성을 내야 할 날인지도 모른다.
「…………」
……실패했군.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텔레비전에서 문프린세스의 운세라도 보고 왔어야 했어…….
하는 김에 황도 13궁도 체크하고…….
아니, 있어 봐?
황도 13궁은 이제 안 했던가?
……뭐 상관 없나.
어느 쪽이든, 제발 워스트만 아니기를…….
장시간의 질주로 하이한 머리를 흔들흔들, 되는 대로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인파로 넘쳐나는 교문을 나설 때, 비로소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아스카아! 잠깐만 기다려………」
내 큰 목소리에 아스카가 멈춰서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교문 주위의 대부분의 학생들의 주목까지 모으고 말았다.
……아, 아뿔싸.
조금 부끄러울지도…….
따라잡은 것은 좋지만, 상당한 거리를 질주해 온 덕분에, 나는 숨이 완전히 넘어갈 지경이었다.
「하악, 하악, 허억, 허억………」
양 무릎에 손을 짚고, 아스카의 구두를 보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급하게」
얼굴만 올려다 보니, 무표정한 아스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악, 허억, …………………쇼핑」
「뭐?」
「쇼핑 가자 그랬잖아? 두고 가지 말라고」
「……이제 됐어. 뭔가 이런 기분으로 가고 싶지도 않아졌고」
「기다려. 아스카가 그래도, 내가 가고 싶거든. 따로 선약 없잖아?」
「……없, 긴 하지……」
「그럼 가자. 오늘은 왠지, 아무래도 너무 짐을 들고 싶어……」
「뭐야 그게, 바보」
아주 살짝, 아스카가 웃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단숨에 몰아붙였다.
「아, 알고 있어. 어차피 바보신지라고 말하고 싶잖아. 하지만, 바보라서 일일이 사람 기분에
맞춰줄 수 없으니까. 부탁이야. 같이 가자」
「…………」
아스카는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을 모아 부탁하는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럼, 뭐 사 줄래?」
「에? ………으, 응. 그러지 뭐」
「그럼 좋아. 같이 가 주지. 소원대로 짐꾼도 하게 해 줄게」
「진짜!? 고마워. 정말 다행이다……」
「후후후, ……바보」
이번에는 평소와 같이 웃어 보였다.
아아, 살았다…….
안심하는 것과 동시에, 약간 불안감이 솟구친다.
「아, 그래도. 너무 비싼 건 좀……」
「괜찮아. 빅맥 2개에 감튀 라지로 3개에 샐러드에 아이스크림 정도면 싼 거야?」
「………엥?」
「아, 그리고 콜라도 사야지」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
「당연하지, 완전 진지한데」
「…………」
……먹깨비 만세.
혹시 나는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을지도…….
 
 
일단 기운을 되찾은 아스카는, 선언한 그대로 맥도널드에서 탐식했다.
그렇게 먹고 또 메뉴를 살피는 아스카에게, 나는 반 진심으로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농담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은 나도 더 못 먹어」
「…………」
비어 버린 감자튀김 용기의 바닥을 끈질기게 뒤지는 손가락이, 그 말이야말로 오히려 농담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어서, 오늘의 아스카의 메인인 옷 쇼핑을 위해 부티크로 연행당했다.
「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 거야? 오늘은……」
「그러게. ……한, 두세시간 정도일까나?」
냉큼 가볍게 말하는 아스카.
그렇게 말하면서도, 참매 같은 시선은 항상 옷을 향하고 있다.
「그, 그렇구나. 아, 그래도 아주머니 걱정하시면 안 되니까, 빨리 끝내는 편이……」
「아아, 그거라면 괜찮아. 오늘 엄마 일 때문에 8시 넘어도 못 들어온대」
「………………헤에」
 
7시.
결국 3시간, 폐점 직전까지 버틴 아스카는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3벌을 2벌로 좁혀
계산대로 향했다.
「…………」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이 이렇게 힘들 줄은 생각도 못 했어…….
기뻐하며 종이가방을 받아든 아스카를 바라보며, 다시금 길고 길었던 3시간을 돌이켰다.
『있지, 신지. 이거 어떨까?』
『에? 응, 좋지 않을까나……』
『에ー, 그럴려나아. 하지만 이쪽의 무늬가 좀……』
『……그, 그럴지도……』
『앗, 신지, 이거는?』
『……그러게. 그거라면 무늬도 없고, 심플한 게 좋다고 생각해』
『으ー응, 하지만 역시 너무 무미건조하달까……』
『……………』
그럼 묻지를 마!!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점심시간 이후의 수업시간에 맞먹는 느려터진 시간의 흐름과 싸우며
어떻게든 견뎌냈다.
장하다, 나…….
혼자 쓸쓸히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어진다.
「기다렸지, 신지. 가자」
몇 시간 전의 그 가라앉은 표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웃는 얼굴로 아스카가 말했다.
역시 그건 생각이 지나쳤던 거야…….
가게를 나오니, 당연하다는 듯 태양이 저물고 있고, 거리는 네온과 가로등의 불빛으로 얼룩졌다.
「으응ーーーーー………읏」
아스카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아흐으……」
나는 그 틈에 하품을 죽였다.
「그럼, 자. 짐. 들어」
「가, 감사합니다. ……정말 들고 싶었네요. 하하……」
마른 웃음소리를 내면서, 비어 있는 왼손으로 아스카의 옷이 든 종이상자를 받아든다.
「……후후, 바보신지」
즐거운 듯 아스카가 웃었다.
「뭐야 그게……」
입을 삐죽이면서도 나는 안심했다.
아스카가 기운을 차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뭐, 그거면 되는 거겠지.
방과 후, 아스카를 뒤쫓았을 때의 결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관계로 다시금 차분하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불과 1분 후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인생평온이 제일이라는 내 좌우명이 다시 내 마음 속에 안주하려 하던 그 때,
 
「………있지, 신지. 아까는 왜 쫓아온 거야?」
 
불의의 gong이 울렸다.
 
 

「에?」
「신지 그 때 엄청나게 숨차했잖아. 교실에서부터 전력으로 달려왔던 거 아냐?」
「응, 그렇긴 했지만……」
「……그래서. ……왜 그랬냐고?」
「아, 아니. ……왜 그랬다고 할지, 그게, ……조금, 걱정되어서……」
……뭐야?
이 이야기 흐름은 뭔데?
「뭐가 걱정이 되었는데?」
「에? ……아, 뭐라고 할까………, 아스카가 기운이 처진 것처럼 보여서, 일까?」
「…………그럴지도. 나, 기운 없어졌을지도」
「…………」
「왜 그랬는지, 알아?」
덜컥, 심장이 튀었다.
그 때 이미 나는 링 위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반대쪽 코너에 보이는 것은, 벽.
10년이라는, 그리고 소꿉친구라는 두껍고도 높은 벽이었다.
집이 옆집이고, 옛날에는 함께 놀면서 지금의 토우지나 켄스케 같은 감각으로 시내에 놀러 나가거나
같이 등하교도 하는 사이.
그래서인지, 주변의 모두들 우리가 사귀는 게 아니냐고 떠들어댄다.
우리로서는 의식하는 일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랬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어느새인가, 주변의 모두가 단정짓던 유언비어가, 분하게도 나 자신의 바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욱더 벽이 두텁고 높다.
억지로 부정해왔던 만큼.
그것이 실패할 경우, 앞으로 아스카를 어떤 얼굴로 봐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옆집이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꽁무니 빼지 말라고 말해주는 쪽이 억지를 부리는 거다.
두근, 두근…….
귓속에 심장고동이 울린다.
뒤이어,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낀다.
아스카는…….
아스카는, 어떨까…………?
이제 머릿속은 새하얗기만 하다.
마치 전신의 모든 감각이 귀에 집중된 느낌으로, 아스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업 중에 말야, 신지하고 나하고 눈이 자주 마주치지 않아? …………그거 있지.
그거 혹시 내 착각……?」
「!!」
역시…….
역시 아스카도 그랬구나…….
「왜 내가 기운이 없는 걸, 왜 신지가 걱정이 되어서
뒤쫓아 온 걸까?
방과후부터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은 걸 신경 쓰면서, 내가 억지를 부려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평소 같았으면, 30분만 옷구경을 해도 불평하는 주제에……」
벽은, ………벽은 아직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근성을 부린다고 넘을 수 있는 높이나 두께가 아니다.
아스카가 여기까지 낮추고 얇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 깊은 데서부터 용기를 짜냈다.
가방을 든 오른손을 꽉 움켜쥐고, 결의한 입을 열었다.
「수업 중이나………. 수업 중이나, 쉬는 시간에 아스카와 눈이 마주치고 하는 거, 착각이 아니야.
……아스카를 본 게 맞으니까」
「왜, 왜……?」
아스카가, 팟 하고 내 얼굴을 보았다.
「……보고 싶으니까. 그래도, 아스카에게 들키거나 하면 바로 고개 돌렸지만.
……부끄러우니까」
「어째서 보고 싶어? ……그거, ……나, 나를」
………왔다.
마침내, 이 때가 왔다.
………좋아!
아스카의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한 마음으로 나를 응시하는 물기 어린 눈동자를 본 순간.
평소의 한심한 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한 순간 아스카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안 되겠어……,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하,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도망쳐서는逃げちゃ 안 돼ダメだ!
어떡하지? ……어떡하지?
머릿속의 갈등에 끝장을 낸 결과, 약간의 우회를 스스로에게 허락하기로 했다.
「그, 그 전에……, 아, 아스카를 쫓아갔던 이야기부터 할게」
설명하는 어조가 답답해서 나도 내 자신에게 속이 터지겠다.
한심한 자기자신을 고무하여,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전하고자 크게 숨을 들이마신 나는, 입을 열었다.
「……………」
그런데.
아ー무 말도 나오지가 않는다.
지, 진정 좀 하라고, 나!
그러니까, 아스카를 쫓아갔던 이유는………… 어라?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말이 머릿속에서 도망간다.
「………신지?」
망연히 굳은 내게, 아스카가 불안한 듯 말을 걸어온다.
「……괘, 괜찮아. 자, 잠깐만 있어………봐」
일단 몸을 옆으로 돌리고, 심호흡했다.
너, 너무 한심해……….
질끈, 눈을 감았다.
「…………」
잠시 그러고 있다 보니, 주변의 사람 붐비는 소리와 희미한 바람소리에 깨닫는다.
……아아, 그런가, ……그렇구나.
멍청해서 아무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이게 바로 나 아닌가.
무슨 익숙하지도 않은 멋있는 척을 하려고 그랬지…….
간신히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것과 동시에, 신체에 쓸데없는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렇구나.
쫓아간 이유, 그런 것 따위 애초부터 하나로 정해져 있다.
우회가 될 수가 없다.
이런저런 작은 이유를 대 보았자, 진정하고 단순한 기분 앞에서 희미해져 버린다.
언제나처럼 의기양양한 눈동자에는 그림자를 품고, 어딘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카에게 돌아서서
나는 말했다.
가식도 무엇도 없이, 껍질을 벗어던진 진짜 내 마음을.
「………아스카를 보는 것도, 아스카를 쫓아간 것도, 아스카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친구라던가, 소꿉친구라던가, 그 이상으로. 항상 함께 있지만, 실은 조금 긴장하고
그랬던 게 있어. 꽤 오래 전부터, 아스카와 어깨가 닿거나, 아스카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두근두근 떨리게 되고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꾸미느라 고생하고.
……그럴 때면 아스카는 날카롭지. 너 방금 내 생각 하고 있었지, 그러잖아.
그거 사실은, 꽤 맞는 말이었어」
거기서 말을 끊고 아스카를 보았다.
도중부터 고개를 수그린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개의치 않고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아무튼, 아스카를 쭉 좋아했어.
머리칼도, 눈도, 얼굴도, 성격도, 전부. ……아, 사랑……이라고 말하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정말 좋아해, 아스카」
………말했다.
말해 버렸다.
올해 안에는 절대 말할 수 없겠다 싶었던 이 말을.
불가사의한 기분이었다.
아직 대답을 듣지도 못했는데, 뭔가 묘하게 상쾌한 기분.
지금도 심장은 두근두근거리고 있지만, 마음만은 꽤 차분하다.
주변의 붐비는 소리가,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크게 들렸다.
아스카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임이 없다.
……어떡하지?
뭔가 말하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할 말은 다 했는데…….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아스카가 한 발짝, 내 쪽으로 내디뎠다.
「앗……」
「…………」
내 어깨에, 아스카가 얼굴을 묻는다.
「……아, 아스카?」
「………언제부터?」
「에?」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냐고?」
「에, ………그러니까, 소학교 ……6학년 때부터일까」
「………그렇다면, 내가 이겼어」
「이겨?」
「그래, 내가 이겼어. 나는 4학년 때부터 신지를 좋아했거든. ……친구 이상으로」
「아스카……」
「그러니까, 내가 이겼어. ………내 쪽의 사랑이 더 깊으니까. 신지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 이상으로
내 쪽이 신지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신지가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던 부분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신지를,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말로는 완전 부족할 정도로, 너무 사랑해」
「………아스카……」
가슴이 먹먹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몸을 전기처럼 달리는 감각.
짐과 가방이 양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아스카를 힘껏 껴안고 있었다.
「응읏, ………신지, 아파……」
「……앗! 미, 미안!」
황급히 팔을 풀었더니, 역으로 아스카의 양팔이 내 등을 휘감았다.
「아, 아스카?」
「괜찮아……. 아파도, 좋으니까……」
얼굴을 가린 채 아스카는 말했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
잠시 망설인 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아스카의 등에 팔을 둘렀다.
「있지, 신지는? ……내가 ………어떻다고?」
「바, 방금 말했잖아……」
「괜찮잖아.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어. ……응, 신지?」
「………좋아해. 바다의 깊이 따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좋아해」
아마, 방금 아스카가 말한 『사랑의 깊이』라는 말이 머리에 남아 있었나 보다.
말하는 내 자신도 잘 모르겠는 비유였지만, 그래도 아스카는 기쁘다는 듯 웃었다.
「……기쁘네. 그럼, 나는 지구의 크기 따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
……말했지? 내 쪽의 사랑의 크기가 더 위야」
지구라니 또 스케일이 한층 커진 사랑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스카의 말에 지금 이 순간
죽어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기쁘다.
아아, 제발 꿈이 아니기를……….
「꿈만 같아……」
내가 생각한 것과 거의 같은 것을, 아스카가 입밖에 꺼냈다.
「에?」
「꿈만 같다, 고 그랬어」
「……………」
「므으…… 뭐야. ……내, 내가 말하면 그렇게 이상해?」
지레짐작하는 아스카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런 모습 자체가, 평소의 아스카로 보이질 않는 걸.
「아니야. 그냥……」
「……그냥?」
「아스카, ……귀여워서」
움찔, 아스카의 몸이 흔들렸다.
「다, 당연하잖아……. 이제 와서 눈치채는 게 늦다고」
살짝이지만, 평소의 기 센 성격이 얼굴을 내비쳤다.
「아니, ……딱히 이제 와서 눈치챘다는 게 아니고……」
「그러면, ………………………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에엑!?」
「뭐, 뭐야! 괜찮잖아, 말하라고!」
「하지만, ……부끄러운 걸」
「………거짓말쟁이. 신지는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한 목소리로 아스카는 말했다.
너, 너무해…….
「그, 그럴 리 없잖아……. 알았어」
「그럼, 말해」
「………으읏, 콜록」
「…………」
「마, 말한다」
「그, 그래. 말하라고」
「………아스카, 귀여워」
「……다시 한 번」
「귀여워, 아스카」
「얼마나?」
「………미사토 선생님의 요리를 풀코스로 트라이해야 하는 카지 선생님의 스피릿 따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귀여워」
……조금 가볍게 하려던 게 지나쳤나?
아무래도 멋쩍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아랑곳 않고, 아스카는 황홀해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뻐라. 최고의 비교야………」
………노, 농담이었는데……?

「그, 그래? ……그건 그렇고, ………슬슬 가야 하지 않을까, 벌써 7시…… 15분이야」
끌어안은 채, 아스카의 머리 너머로 손목시계를 본다.
가게에서 나왔을 때가 7시.
즉슨 15분 가까이 여기서 아스카와 러브씬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카와 포옹하는 것 자체는 최고로 행복했다.
가능하다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다.
만, 그것 이상의 문제도 발생.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여기는 천하의 거리 노상.
이런 길 한복판에서,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다른 사람 눈을 신경쓰지 않고 부둥켜안고 있다면…….
누구라도 무슨 일인가 싶어할 것이다.
멈춰서서 빤히 구경하는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불평을 할 이유는 그야말로 추호도 없다.
틀림없이 우리 쪽이 원인제공자니까…….
「싫어」
아스카는 내 제안을 단호히 물리쳤다.
「……아스카, 주변을 좀 봐. 사람들 너무 많잖아……」
우리를 중심으로 반경 5 미터 정도의 공간이 생겼고, 그 바깥에는 상당한 갤러리가 형성되었다.
다들 찍 소리도 내지 않고 숨을 참으며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어째 매너가 좋은 관객들이라고 해야 하나.
이상한 부분에서 감탄하게 된다.
아스카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금방 다시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봐, 봤지? 적어도 여기에서는 벗어나자」
속닥속닥 아스카에게 귓속말한다.
이 상황에서 둘만의 세계에 침잠할 수 있을 만큼 신경이 굵은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눈 앞에, 엄밀히는 팔 안에 한 명.
「……싫어」
「그, 그런………, 잠깐만 있어 봐, 모두들 보고 있다니까!?」
또 다시 속닥속닥, 하지만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아스카에게 빌었다.
그 모두의 시선을 여태껏 나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음은 잠깐 잊자.
「……그렇네. 조금 신경쓰일지도」
이 인파를 더러 조금, 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에 기가 막히면서도, 나는 내심 안도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이 사람의 고리를 헤치고 나간다…….
실마리를 모색하는 내게, 아스카가 말했다.
「………하지만」
「에?」
내 등을 두르고 있는 아스카의 팔에, 한층 힘이 실렸다.
「하지만, 모처럼 신지가 나를 안아 줬는데, 이대로 떠나는 건, 싫어」
「에에!?」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신지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 줘야겠어」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라니, 거짓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증거」
「증거라니?」
「……신지가 알아서 생각해 내……」
그, 그런…….
천국에 염마.
지옥에 부처(몹시 곤란할 때 적절한 도움을 받다)의 반댓말이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이다.
……알겠어.
아무리 둔감킹의 칭호를 가진 나라도, 아스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쯤은 알고 있다고…….
재촉하듯이 아스카가 말했다.
「나는 쭉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 ……이러고만 있어도, 너무 행복한 걸……」
귀여운 목소리가 가슴을 쑤셔온다.
아아,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나도 행복하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
「…………」
「…………」
「…………」
1분 경과.
갤러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전혀 움직임이 없는 우리에게 질려서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행인들이 그 구멍을 채우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단순한 커플이 아니라, 무언가 퍼포먼스 같은 걸로 생각하고 있겠지.
「…………」
「…………」
「…………」
「…………」
다시 1분 경과.
아스카는 움직임이 없다.
간혹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등의 움직임만 있을 뿐.
………아까의 말에 거짓은 없다.
점점 궁지에 몰려가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온몸에 긴장이 퍼져 감돌고 있다.
「…………」
「…………」
「…………」
「…………」
추가로 2분 경과.
갤러리는 줄어들지 않고, 당연히 아스카도 움직임이 없다.
하지만 그러나.
한계를 훨씬 넘겨 버린 나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저 사람이…………, 그래 저 사람의 몫이다.
나는 갤러리 가운데 있던 한 샐러리맨에게 운명의 방아괴를 걸었다.
샐러리맨이 움직일 때, 나도 움직인다.
눈끝에 그를 포착해 두고, 나는 기다렸다.
「…………」
「…………」
그리고, 다시 1분이 지났을 때.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기묘한 정적을 깨뜨리는 전자음이 울려퍼졌다.
운명의 샐러리맨이 당황한 듯 인의 고리를 빠져나간다.
우, 운명이 움직였다…….
조, 좋아, ………지금이다!!
끌어안았던 손을 풀고, 아스카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앗……」
그 여세로 아스카의 팔도 내 등에서 풀려난다.
눈앞에, 깜짝 놀란 아스카의 얼굴이 있다.
오오옷……!?
갤러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난다.
위축될 것 같은 기분을 북돋아, 나는 아스카에게 말한다.
「……간다」
살짝 늦게, 아스카는 놀란 얼굴 그대로,
끄덕,
수긍했다.
그것을 신호로, 어깨를 잡았던 손을, 이번에는 아스카의 양 뺨으로 옮겼다.
「앗……」
작은 군소리는 무시한다.
그리고, 단숨에 아스카의 입술을 빼앗는다.
「으읍……!!」
우오오오오……!!
더욱 커진 갤러리의 동요를 느끼며, 나는 눈을 감고 5초를 헤아렸다.
왜 5초인가, 그딴 건 모른다.
1……2……3……4……5!
5초가 지난 순간, 나는 입술을 떼었다.
「……하아」
그리고, 키스하기 전과 같은 표정으로, 굳은 채의 아스카에게 말했다.
「……이걸로 믿어 주는 거지?」
땅에 떨어진 짐을 들어 오른손에 갈무리하고, 왼손으로 아스카의 손을 잡고는, 나는 인파 속으로 돌입했다.
놀란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비켜나서 생긴 틈을, 아스카를 잡은 채 그대로 달려나간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함성. 울려퍼지는 박수소리에 부끄러움을 되새기며, 나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하악, 하악, 허억, 허억………」
오늘 도대체 얼마의 거리를 전력질주했을까…….
벌써 두 번째 질주에, 그런 의문을 던져 본다.
여기까지 달려올 필요는 없었지만, 부끄러움에 쫓기는 기분으로 마냥 달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목적지도 없이 달린 결과, 어느새 우리 둘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떨어진 어린이공원이었다.
「하악, 허억, ……아, 아스카. ……괜찮아?」
손을 잡은 채, 나와 비슷하게 숨을 헐떡이는 아스카에게 눈을 돌렸다.
아스카는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둘 다 아직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한동안, 밤의 어린이공원에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후ーーー우」
겨우 숨을 골랐다.
허나, 그와 동시에 점점 부끄러움이 치밀어 온다.
아무리 기세를 탔다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그것도 아스카하고……!
우와아아아아아악!
……뭔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
이제 무엇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
「…………」
아직도 맞잡은 채인 손, 옆에 있는 아스카를 의식하자, 뜀박질한 것과는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뭐, 뭔가, 뭐라도 좋으니 말하지 않으면…….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그럴 겨를도 없다.
「잠깐, ……잠깐만, 너무 달렸네. ……지쳤어?」
「…………」
「……아, 그치. 목 안 말라? 뭔가 주스라도 사 올까?
요 근처에 자판기 있잖아」
「…………」
대답이 없다.
어, 어색해라…….
「사, 사올게……」
달아나고 싶은 기분으로 아스카에게서 떨어지려 할 때,
「……주스 같은 건 됐어……」
맞잡은 손이 끌어당겨져서, 나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아앗……」
꼬옥
「……또, 또?」
「……싫어?」
「싫을 리 없잖아. ……정말 기쁘지만……」
「……기쁘지만, 뭐?」
「너, 너무 긴장된다고나 할까, ……두근두근거려」
「나도 그래. ……그래도, 놓지 마. ……놓아주지 않을 거야」
등 뒤에 둘러진 아스카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진다.
「이제 신지는 내 거야. 울면서 빌어도 도망가게 놓아주지 않으니까」
그 말에, 내 긴장이 조금 풀렸다.
무심코 쓴웃음도 떠오른다.
「울면서 빌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아」
오른손으로 아스카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아스카의 머리칼은, 아주 좋은 냄새가 난다.
「신지는 있지, 나만 봐야 하는 거야」
「……응」
「나 이외의 여자애하고 얘기도 하면 안 되니까」
「그, 그건 무리 아닐까……」
「무리라도 그렇게 해!」
「하, 학교에서는 어떡하라고. 반에 여자애들 있고. ……그리고, 미사토 선생님도 여자인데……」
「므으……… 어쩔 수 없네. ……필요 최소한의 이야기만 허락해 줄게」
「그, 그건 아무래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마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신지는 매일 아침 내가 깨우러 갈 때까지 일어나면 안 돼」
「…………그건 또 왜?」
「의미는 없어. ……그냥 내 취미니까」
……나 깨우는 게?
그, 걷어차는 쪽을 말하는 건가?
여태까지도 마음 내킬 때마다 쳐들어와서는, 고이 잠들고 있는 내 배에 격한 발길질을 먹여주고 있다.
그걸, 내일부터 매일……….
「깨, 깨워주는 건 고맙지만, 조금만 부드럽게 안 될까……」
「………생각해 볼게」
「…………」
「그리고, ……그리고 있지……」
나는 황급히 말했다.
「저, 저기, 아스카? ……그렇게 규칙을 막 정하면, 다 지킬 자신이 좀……」
전혀 없거든.
「간단해. ……결국, 신지는 딱 한가지만 지키면 되니까」
「한가지만? ………뭔데?」
「앞으로………… 앞으로 쭉 내 옆에 있어……」
「아스카……」
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약속이니까」
「좋아, 아스카가 질릴 때까지 함께 있을게」
「…………그럼, 영원히야」
아스카는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기쁨의 미소에 덩달아 나도 살짝 웃었다.
그리고 나는, 대답 대신 키스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시계를 보니 8시 조금 전이었다.
결국 약 1시간 반 정도를 아스카와 포옹했던 것이다.
부티크에 갔을 때까지의 일들이, 뭔가 먼 옛날 일 같다.
공원에서부터 둘이서 손을 잡고 걸어왔다.
마음의 창문을 열어젖힌 아스카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끊없이 나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했다.
조금 오버페이스 기분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나도 아스카에게 질세라 대항했다.
그래도 아스카를 말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결과적으로, 처음 아스카가 말했던 대로, 아스카의 사랑이 더 위라고 치기로 결착났다.
그리고, 이야기가 일단락되었을 때, 아스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지, 나 있지, ……나는 빨간색이 좋아」
「응, 그렇지」
예전부터 잘 알고 있다.
아스카 가라사대, 빨간색은 자기의 색, 이라는 것 같다.
「특히, 스칼렛이 좋아」
「……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 종류의 빨간색이 있었던 것 같기도.
「언젠가 신지와 함께, 그 위를 걷고 싶어………」
「? ……무슨 의미야?」
함께 색깔 위를 걷는다?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되물었으나, 아스카는 살풋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신지,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내 첫키스를 빼앗아 갔으니
책임져 줘야겠어」
「그, 그건 아스카가……」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냥 증거를 원한다고 했을 뿐인데」
「크윽……」
여전히 새빨간 얼굴을 제외하면, 완전히 평소의 아스카로 돌아왔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 키스는 역시 부끄럽네……. 좋은 경험도 되었지만」
……좋은 경험?
「호, 혹시, ……보여지면서 느낀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바, 바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진짜! ……그냥, 예행연습쯤 되었다 싶어서……」
「예행연습? 무엇의?」
「……글쎄다, 안 가르쳐줄 거야」
「뭐야, 그게……」
「우후후, 비밀」
아까부터 수수께끼 투성이다.
……뭐어, 됐나.
「그럼 이제 아스카. 슬슬 집에 돌아갈까.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벌써 5분 가까이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에에ー엣! 왜, 조금만 더 괜찮잖아」
「아니, 그래도 이제 벌써 8시고, 슬슬 아주머니 돌아오실 때 아냐?」
사랑에 장애물은 있기 마련.
말하는 나 자신도, 좀더 같이 있고 싶다.
「므ー읏 ………그건 그렇지만. ……신지 차가ー워. 사랑이 식었ー어」
「그, 그런 말 하지 말아. 내일도 아침부터 다시 함께니까. 자, 내일을 즐겁게 기다리자고…」
「…………………알았어」
「응」
「…………」
「…………」
「……신지, 먼저 들어가」
「아스카가 먼저 들어가」
「나, 나는 전화를 끊을 때 상대방이 먼저 끊은 걸 확인할 때까지 수화기를 잡고 있는 타입이야!」
「그, 그거하고 무슨 관계가………」
「됐으니까!」
「……그럼, 동시에 집에 들어가는 걸로 하자」
「……어쩔 수 없네, 그걸로 좋아」
「그럼, 아스카. 내일 보자」
「……응. ……아, 신지. 내가 가기 전까지 잠에서 깨면 안 돼」
「알았다고. 제대로 깨워 줘. ………아프지 않은 방법으로」
「아, 그리고……」
「뭐?」
「예행연습 말인데……」
「……에? 아아, 좀전에 말했던 거?」
「힌트 줄게. 4년 뒤, 왼손, 맹세. 그리고, ……스칼렛색 길」
「?…… 4년 뒤? 왼손? 맹세? 스칼렛색 길??」
뭔데 그게?
게다가 또 스칼렛이다.
도무지 모르겠다.
「잘 자, 신지!」
「아, 응. 잘 자」
이렇게, 길고 긴 방과후가 끝난 뒤, 우리는 서로의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에누리 없는 행복을 준 아스카와, 아스카가 남긴 힌트를 생각하며
서서히 잠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ー아」」
아스카와 둘이서 한 목소리로 우리 집을 나선다.
문을 닫고 걷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아스카가 티가 나도록 뺨을 싱글거렸다.
「뭐야? 왜 그래?」
「응. 신지 깨우고 나서, 아주머니께서 홍차를 주셨는데
그 때 있지, ……그러시는 거야」
「무슨 말을 했기에?」
「내가 마중을 나오면 신지를 잘 깨워서 좋다고」
「……뭐, 뭐어, 그럴려나……」
그건 그렇달지.
그 충격을 받고도 계속 잘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참고로 오늘 아침은, 플라잉바디어택이었다.
「그래서, 괜찮다면 앞으로도 계속 신지랑 사이좋게 지내달래. ……후후후」
「헤에……」
「이거야, 아주머니 공인………아니지, 이카리가 공인이라는 걸까? 우리 사이 말이야」
과연 아스카.
이카리가의 실권을 누가 쥐고 있는 것인지, 아주 빈틈없이 잘 알고 있군.
「그러게. ………뭐랄까, 어머니는 원래부터 아스카를 마음에 들어하셨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아스카가 매일 아침 마중나오는 이유도 알아버린 것 같고.
「그래? ……다행이다. 이걸로 내 미래는 장밋빛이야」
「헤? 어째서? 어머니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벼얼로ー」
「무슨 의미야?」
「……아무것도 아ー냐!」
갑자기 아스카가 어깨로 들이받았다.
「우왓!」
그 바람에 옆으로 넘어졌다.
황급히 벽에 손을 짚으려는데, 이번에는 손목을 잡혀 끌어당겨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오른팔이 아스카의 왼팔과 팔짱을 낀 자세가 되었다.
너무 날랜 솜씨에 뭐라 말도 못하는 나를 보며, 아스카는 즐거운 듯 웃었다.
「우후후, 놀랐어?」
「으, 응……」
「있지, 학교 근처까지는 참을 테니까. …………괜찮지?」
아스카의 수줍은 미소 앞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가까워 오자, 아스카는 팔짱을 풀고, 대신 손을 잡을 것을 요구했다.
아스카 가라사대,
「이거라면 누가 봐도 금방 손을 놓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라고 하신다.
보이는 순간 끝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지만, 아스카의 울먹이는 눈동자 앞에, 그런 의문은 조금도 남지 않고 날아갔다.
이런 게 잡혀 살게 된다는 걸까……?
문득, 신문을 펼치는 아버지의 꺼멓게 그을린 등이 뇌리를 스친다.
「있지, 신지」
「응?」
「신지는 학급의 다른 애들한테 알리는 게 싫어?………우리가, 그……
……이렇게 된 거」
「이렇게 된 거, ………라고 하면, ……그러니까……」
……아아!!
뭐라고 말하기가…….
「그러니까, ……사귀게 된 것, 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아스카는 수줍은 듯 끄덕, 하고 수긍했다.
「역시, 아니……왜 있잖아……. 스즈하라라던지가 내 뒷담 하고 그러면
신지 엄청 싫어하고 그랬잖아……」
쓸쓸한 듯한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니야, 싫어한 게 아니야. 그냥 좀 뜨끔해서 그랬던 거 뿐이야. ………걔네가 하는 말이 다 정곡이었으니까
분했고, 게다가………그 때는 아스카의 마음도 알지 못했고」
「그 말은, 즉, 지금은 알려져도 좋다는 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아스카가 묻는다.
「으으음, 뭐어,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스카가 말하고 싶다면, 나는 별로 상관 없어」
「진짜?……지인짜아!? 그럼 나 히카리한테 말한다!?」
기세 좋게 아스카는 단숨에 다그쳐 온다.
「으, 응. 괜찮다고 생각해」
「아싸! 고마워, 신지!」
까불고 떠들며, 아스카는 내 팔을 잡아당긴다.
「빨리, 빨리 가자!」
모처럼 둘만의 시간이니까 천천히 걷겠다던 사람은 어디 갔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발걸음의 스피드를 높였다.
 
 
교문에 들어서, 곧장 신발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스카가 깨우러 와준 덕에, 상학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말하자면, 제1중 학생들의 등교시간의 피크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만큼 남의 눈에 띈다는 것이다.
「아, 아스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봐주라 제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을 정도의 부끄러움에, 나는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안ー돼. 모두에게 알려져도 좋다고 한 건 신지였지? 그럼 됐잖아」
그렇게 말하는 아스카도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알려져도 좋다고 한 건, 반의 모두라고 그랬지, 전교생 모두라는 의미가 아니……」
게다가 아스카는 반장한테 말하겠다고밖에 말하지 않았잖아.
그게 어째서……?
사이좋게 손을 맞잡은 채 말다툼하는 기묘한 이인조는 어김없이 주변의 주목을 끌었다.
라기보다도, 아스카가 일부러 그러는 양 큰소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필요 이상으로 천천히 걷는 우리(정확히는 아스카)를, 지나치는 학생들이 모두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8:2 정도 비율로 이미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내게, 아스카는 최후의 일격을 한 마디 날렸다.
「손, 억지로 놓으려고 하면, 울어버릴 거야. ………전력으로」
「……끄흑」
주변의 가차없는 시선에 꼼짝도 못하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아스카, 보이면서 쾌감을 느끼는 거야…….
 
 

필요할 때 보이지 않고, 쓸데없을 때 나타나는.
그런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 놈들이 내 친구들이다.
여러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져지, 벽창호, 사이비 오사카인…….
안경잡이, 변태, 카메라 오타쿠…….
……아마, 작정하고 찾으면 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나도, 그 둘이와 함께 『3바보』라 불리는 트리오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장소는 신발장.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놈들이, 마치 노린 것처럼 나타나고, 여기에서 절대 원하지 않던 삼각형이 완성되었다.
먼저 알아챈 것은 아스카였다.
부끄러움을 견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아스카가 멈춰섰기에 고개를 올렸다가, 신발장의 녀석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실내화로 갈아신고 있던 변태와 져지도 우리를 알아챘다.
「…………」
「…………」
「…………」
「…………」
묘한 공기가 흐르고, 네 사람 사이의 시간이 멈추었다.
순간, 내 머릿속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변명들로 가득찼다.
가, 그마저도 다음 순간 새하얗게 불태우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의 내게는 마음이 든든하다고 할까, 감당하기 어렵다고 할까, ………아무튼 아군이 있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도 IQ 180을 자랑하는 곁의 아가씨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대로 걸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잡아끌고, 신발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 앞에서 멈추자, 비어 있는 오른손을 허리에 갖다대고, 가슴을 약간 뒤로 젖혀 포즈를 결정한다.
그리고, 얼탱이가 없어진 두 사람에게 고한다.
「뭐ー얼 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쳐 서 있는 거야. 길막하지 말고, 저리 꺼져」
「오, 그래……」
「아아, 미안……」
아스카가 평소처럼 거친 말을 뱉어내자, 굳어 있던 두 사람이 황급히 비켜섰다.
「자, 신지도 빨리. ……손 놓아도 좋은 건, 신발 갈아신을 때 뿐이야」
「뭐어……!」
소악마의 미소를 남기고 자기 신발장으로 가는 아스카에게,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신지, ……너희들 왜 그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참말로 쫄았다 아이가……. 뭐꼬, 방금………헛걸 봤나?」
종잡을 수 없는 내 표정이 신기하다는 듯 물어온다.
나는 황급히 어색한 미소를 수습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뭐야, 왜 너희들 손 잡고 걷는 건데?」
정말 알수가 없다는 얼굴로 물어온다.
「…………」
나는 생각했다.
……일단, 여기서는 시치미를 뚝 떼자.
곤란한 일은 미루기.
그것이 나의 좌우…………… 아니, 폴리시policy다.
「그, 글쎄다? ……차차 알게 되지 않을까? 아, 아스카 기다리게 하면 큰일나니까, 이따가……」
서둘러 실내화로 갈아신고, 휙 발길을 돌렸다.
「어이, 신지……」
켄스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외통수였다.
당연히 아스카도 신을 갈아 신었으니, 기다릴 장소는 내가 뒤돌아본 바로 거기.
「…………」
설마 아스카를 무시할 수는 없고, 나는 몇 발짝 나아간 곳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뒷문의 호랑이, 앞문의 늑대……….
……아니, 앞문은 늑대보다는 붉은털원숭이サル(SAL)일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자아, 신지」
아스카가 생긋 웃으며, 왼손을 내게 내민다.
으으…….
내몰린 나는, 애원 모드에 들어가기로 했다.
「……있지, 아스카. 학교 안에서는 그만 하자. 이대로, 응?」
「안・돼・요」
「억지 부리지 좀 마. 내 입장도 좀 생각하고………」
그 말에 아스카가 고개를 숙인다.
내밀었던 손도 돌아간다.
「……싫은 거야?」
「……에?」
「신지는 나하고 함께 있는 게 보이는 게 싫은 거야?」
「아, 아무도 그런 말……」
「그치만 그렇잖아. 싫지 않다면, 더 당당해도 되는 거잖아?
신지는 나하고 같이 있는 게 부끄러운 거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지.
뭔가 아니지.
문제가 미묘하게 바꿔치기된 기분이다.
내가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학교 안에서 손을 잡는 것이다.
도ー대체가, 어째서, 이게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게 되는가?
그러고 보니, 내 말에 고개를 숙인 타이밍도 꾸민 것처럼 절묘한 것 같다…….
「…………」
내 의혹을 눈치채지 못한 듯, 아스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비련의 히로인을 연기하고 있다.
그리고, 돌아볼 필요도 없이 등 뒤에서는 두 놈이 이 연극을 즐기고 있을 것…….
끄응………….
나는 두 가지 문제를 천칭에 매달았다.
하나는, 아스카의 기분.
다른 하나는, 앞으로의 평온한 학교생활.
……어제고 오늘이고, 왜 이렇게 선택을 강요당하는 장면이 많은 거야?
언제나 도망칠 뿐이었던 내게 천벌이 내린 것일까…….
「…………」
5초 정도 고개숙인 아스카를 바라보다가,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힘 없이 아래로 떨어져 있던 아스카의 왼손을 잡아챘다.
이 순간, 길고도 험난한 파란만장한 학교생활의 개막이 결정.
기분 탓인지, 따끔따끔 위장도 아파온다.
「……알았어, 알겠습니다. 당당하게 하겠습니다」
아스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나는 이해했다.
주도권은 이제 완전히 아스카의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수난은 그 즉시 시작되었다.
 
 
「……이야ー아……」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이거야말로 진짜 이야ー아 라는 느낌……일까. ……안 그래, 토우지?」
이번에는 확실히 들린 그 목소리의 울림에는, 방금 전까지의 놀라움, 당혹감은 티끌만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글게 말이다……. 어제 방과 후, 그카고 나서 뭔 일이 있었으까 걱정을 억수로 해가, 오늘 아침밥도 세 그릇밖에 못 묵고
나왔다 아이가. ……뭔 일이 있었는 건지, 차부운하게, 넉넉하게, 끈끈하게, 좀 듣고 싶구마………
으이, 범생?」
뭔가 확신한 듯, 자신감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덮쳐온다.
「신지, 갈까?」
뒤의 둘이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아스카가, 움직이지 못하던 내 손을 잡아끌면서 걸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그대로 연행되었다.
당연히, 뒤의 두 놈도 따라온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로 마크하고 있다.
네 명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복도에 울린다.
「…………」
「…………」
「…………」
「…………」
……이상하다.
한동안 걷고 있는데, 뒤의 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런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몹시 섬뜩했다.
더 걸었다.
여전히 침묵의 가운데, 교실까지 절반 정도 거리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아스카가 멈춰섰다.
「……잠깐 너희들. 용무가 없으면 나와 신지의 러브를 방해하지 말아 줄래. 짜증 나네」
두 녀석 따위 안중에 해브노인 줄 알았던 아스카가 뒤돌아보며 빠직 두 사람을 째렸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돌아보았다.
동시에 두 사람의 징그러울 정도로 히죽히죽거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와 비위가 상했다.
「……들었지, 토우지?」
「어어, 들었다. 소류의 입에서 『러브』라꼬. ……분명히 『러브』라꼬, 『러브』.
아침부터 엔진 전개구마」
「…………뭐야, 불만 있으면 빨리 말해」
「불만?……있나, 켄스케?」
「없지, 전혀」
「……그렇다카이. 거기 두 분, 우리한테는 신경 끄시소. 어여 가이소, 어여」
토우지가 손을 팔랑팔랑거리며 말한다.
그런가…….
뭐가 뭔지 알겠다…….
이 자식들의 사냥감은 나 혼자다.
교실에 들어가면, 아스카라는 방해물이 떨어진 뒤, 나를 뼛속까지 빨아먹을 마음으로 만만한 것이 틀림없다.
딱히 광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둔한 반사광을 발하는 켄스케의 안경이 그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싫다, ……너무 싫다.
모두에게 우리 사이를 알려도 좋다고 아스카에게 말한 시점에서, 이렇게 될 줄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그렇지만, 막상 그 때가 오면, 그 때의 각오가 후회로 바뀐다.
성급했던 것이 아니었나…….
벌써 절망에 젖어드는 내 옆에서,
「너희들, 배짱 좋다……. 나한테 개겨서 공짜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
스으윽……
아스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 있어바라. ……포, 폭력은 안 되제, 폭력은」
토우지가 움찔했다.
아스카의 진정한 두려움을 나와 같이 몸에 철저히 새긴 사람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아스카는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는다.
「……스즈하라, 너,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 때, 내 쪽을 계속 보고 그랬지?
정확히는 내가 아니고, 나하고 같이 도시락 먹는 다른 한 사람 쪽
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으려나……? 나도 신지를 자주 보고 그랬으니까
신지 근처에 있는 네 시선, 눈치채 버리게 되었거든…….
그거, 그애한테 말해버려도 될까나ー……」
그 말을 듣는 순간, 토우지의 얼굴이 극적으로 새파래졌다.
「뭐……! 뭐를,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그 당황함에, 보고 있는 나와 켄스케가 놀랄 정도였다.
「어ー머나, 알지 못하세요?……그럼, 똑똑히 말해줄까?
모ー두가 알 수 있게」
아스카는 학생들로 가득한 복도를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쉰다.
「이, 있어봐라!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데이! 참말로 용서해라! 이 짓거리도 인제 안 하께!」
토우지가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뭐, 알면 됐어. 알면. ……후후후」
토우지의 눈물을 쏙 빼고, 만족스럽게 웃은 아스카는, 다음으로 천천히 켄스케에게 시선을 옮긴다.
「자, 그런데 아이다. ……네가 몰래 찍어 파는 사진, 내가 전에 뭐라 그랬을 때
변명과 함께 1도 궁금하지 않은 네 폴리시까지 말했었지? 기억하려나?」
「에? ……아, 아아. 그게 뭐?」
갑작스런 이야기의 비약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켄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서 토우지의 KO를 보았으니, 좀전까지의 기세는 사라지고 없다.
「그 폴리시인지 나발인지, 분명히 이런 내용이었지……. 내 사진은 접객업이라
만인을 위한 스탠더드한 사진을 유념하고 있다던가 뭐라던가」
「………뭐어, 짧게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헤ー에, 흐ー응, 호ー오……, 그렇구나아」
「뭐, 뭔데……」
아스카는 오른손에 든 가방을 일부러 바닥에 내려놓고 켄스케에게 삿대질을 했다.
「너, 요즘 사진 매출 떨어진다며? ……내가 듣기로는, 얼마 전부터
손님의 니즈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던데. 수량도 종류도. ……어ー떻게 된 걸까요?
폴리시보다도 큰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예컨대, 한 명의 여자만 쫓아다니면서
찍은 사진은 팔지도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던가……」
켄스케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한다.
눈을 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다만 입만 뻐끔뻐끔 움직인다.
그런 켄스케를 신경쓰는 건지 아닌 건지, 아스카는 이마에 손을 대고
골똘히 생각하는 포즈를 취했다.
「으ー응………. 누구더라, 그 애. 아 맞다. 2학년 C반, 머리카락 색깔 밝고…….
이름은…… 맞다, 확실히 키리시……」
「기, 기다려어!」
아스카는 거기에서 딱 그쳤다.
켄스케는 멍하니 아스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째서? 어떻게 소류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어? ……이거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그 말에 아스카는, 흐흥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나한테 개겼다가 공짜로 안 끝난다고. 또 방해하면 진짜 용서 안 해.
교내방송 써서, 전교생한테 정보제공할 거니까. ………아, 그리고 도중에 그만두는 건
빚으로 받아 줄게」
철저히 짓밟은 끝에 빚까지 지워놓은 아스카.
한바탕 일을 마쳤다는 듯 숨을 내뱉고, 가방을 주워들고 내 쪽으로 돌아선다.
「……기다렸지. 자, 신지. 가자?」
「네, 넵」
나는 군말없이 아스카를 따라갔다.
등 뒤에 두 구의 시체를 남긴 채…….
……무시무시하다.
무시무시한 아스카.
어떻게 켄스케의 비밀까지 캐냈는지는, 굳이 묻지 않기로 한다.
분명히, 모르는 편이 신상에 좋다…….
어제 방과 후, 최대의 위크포인트를 극복한 아스카에게, 더이상 사각은 없다.
앞으로 당분간 누구도 아스카를 이겨먹을 수 없겠지…….
어젯밤 공원에서 내 품 안에 있을 때와 완전히 다르다.
「…………」
아, 그러고 보니…….
그 때, 나는 문득 떠올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방금 사라졌다고 생각한 아스카의 약점.
지금 말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생각보다도 먼저 시험해 보기로 했다.
「……아스카」
「왜ー애?」
아스카가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아스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면서, 수줍음을 버리고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말해 보았따.
「아스카, 오늘 엄청 귀여워. ……언제나 귀엽지만, 오늘은 그 이상으로」
정중앙 직구.
기습이었던 탓도 있지만, 효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한 순간 먼발치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갛게 익어버린 아스카는, 깜짝 놀란 표정을 보여준 후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진짜아! 바보야! 부, 부끄러우니까 하지 마! ……어떤どんな 표정 지어야して 좋을지いいか
알 수わかん 없게なく 되어 버리잖아……」
마지막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맞잡은 손을 꼬옥 움켜쥐어 온다.
…………너, 너무 귀여워!
나는 아스카의 귀여운 몸짓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도, 조금 안심했다.
일단, 곤란해질 때는 『귀여워』가 있다.
결점 투성이인 이 몸으로서, 결정적 카드가 하나쯤 없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뭐어, 하다 보면 아스카도 익숙해지겠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교실에 도착했다.
 
 
교실 문이 닫혀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침에 열려 있어야 할 텐데, 누가 무심코 닫아버린 걸까.
하지만, 내게는 유리했다.
조금이지만, 문 앞에서 각오를 다질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토우지와 켄스케를 처리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 상학종 시각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래서 복도에 나와 있는 학생도 이제 거의 없다.
「…………」
과연, 이 문 너머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시작의 끝일까, 아니면 끝의 시작일까?
내가 부르르 몸서리치는 줄도 모르고, 아스카가 말했다.
「신지, 들어가자」
「자, 잠깐만 기다려. 아직 마음의 준비를……」
「……으이구. 정신 차려」
아스카는 정말 굳세다.
일단 심호흡이라도 하려고 내가 크게 숨을 들이마쉰 그 때.
벌컥
기세 좋게,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앗, 아스카하고 이카리군, 좋은 아침. 이카리군, 오늘은 늦었구나. ……왜 놀란 얼굴이야?」
나타난 것은, 아야나미였다.
오늘도 건강하게 얼굴이 희다.
「그보다도, 둘이 같이 교실에 들어가면, 또 다들 놀릴………」
씨익 웃으며 말하던 아야나미가, 갑자기 딱 굳었다.
시선은 나와 아스카의 딱 허리 높이를 가리키고 있다.
「…………………」
거기에 있는 것을 응시한 뒤, 아야나미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교대로 쳐다보고,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뭐 하는 거야? 오늘은 또 무슨 벌칙게임?」
「……벌칙게임 아니야」
「그러면, 의식? ……저주하는 상대는, 누구?」
「그러니까, 아니라고」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재미없어」
「……딱히 웃기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
「……………」
휴우, 아야나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애들이 놀려도 그렇지, 겨우 손 잡은 정도를 가지고 속일………」
「아니 왜 보이는 그대로를 그냥 받아들일 줄을 몰라!」
아스카가 쿵쿵 마룻바닥에 발을 굴렀다.
「보이는 그대로라니, ………아스카와 이카리군이 손을 잡은 것?」
「그래. 손을 잡는다는 게, 우리 연령대의 남녀가 손을 잡는다는 게 뭐겠어?」
「…………사이가 좋아」
「……그 이상」
「굉장히 사이가 좋아?」
「한 마디만 더」
「…………」
「…………」
「설마………… 농담이지? ……아하하, 이제 그만 해……」
경련하는 얼굴로 억지로 웃으려 애쓰는 아야나미에게, 아스카가 말했다.
「농담으로 이런 짓 할 수 있겠어?」
아스카는 내게 몸을 바짝 붙이더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무슨! ………아, 악, 아스카!?」
「신지는 가만 있어. ………어ー때? 레이. 이걸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둘의 관계」
놀란 내 말을 가로막고, 아스카는 아야나미를 쳐다본다.
「아……… 아……… 아………」
입을 딱 벌리고 망연자실 아스카를 바라보는 아야나미.
다음 순간, 휙 하고 우리로부터 등을 돌려, 교실에 대고 소리쳤다.
「아스카하고 이카리군이 사귀어ーーーーー!!!」
 
 
인간은 아무리 이상한 상황이라고 계속되면 『익숙함』이라는 것이 생긴다.
지금의 내가 바로 그 짝이다.
이제, 어찌 되든…….
소리치는 아야나미의 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후로 예상되는 이런저런 여러가지 전부,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그런 나의 심란한 기분과는 달리, 교실은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근소한 반응은, 문 가까이 앉은 남학생이 날린 한 마디였다.
「시끄럽ー네, 아야나미. 재미 하나도 없ー어, 안 웃ー겨. 농담할 시간이 있으면 너도 공부나 해.
오늘 1교시 사회 쪽지시험 있다고」
「아, 아니……. 이 봐, 다들 봐봐! 둘이 손을 잡았다니까!」
아야나미는 우리의 손을 가리키면서, 필사적으로 교실에 대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어차피 네가 꾸민 거잖아? 셋이서 짜고. 뻔히 다ー 보이거든.
그런 거에 속아넘어갈 놈 아무도 없ー네요」
마치, 방금 전의 아스카와 아야나미의 대화의 재현을 보는 듯하다.
동급생의 매정한 말에, 늑대소녀는 발을 동동 굴러가며 억울해했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정말이야! 아스카, 이카리군한테 키스까지 했어!?」
「네이네이,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 다들 공부하는 데 방해 되잖아.
계속하고 싶으면 구석에 처박혀서 하던가」
남학생은 교과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교실 구석을 가리켰다.
「므, 므아악ー!!」
아야나미가 히스테리를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앗, 아스카하고 이카리군」
복도 저편에서 반장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다 화해했구나. ……다행이다」
「화해? 히카리, 우린 딱히 싸운 적 없어」
아스카는 잡고 있는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반장은 어째 놀라지 않는다.
「뭐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잘 됐네, 아스카가 기운을 차려서.
이카리군도 주번 1개월 면했고」
호라키양은 빙긋 웃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 하하하. ………그러게」
「주번 1개월? 뭐야 그게?」
멍청하게 웃는 나를, 아스카가 신기하게 본다.
「후후,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아스카. ……그보다 아야나미양,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반장은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아예 탭댄스를 추고 있는 아야나미에게 물었다.
「앗! 히, 히카리쨩, 들어봐, 대사건이야. 아스카하고 이카리군이 사귄대!」
「사귄다고? ……손 좀 잡은 것 갖고? 그 정도로………」
「그 정도가 아니야! 내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 키스까지 했어!」
「아야나미양. …………불건전해, 아침부터」
「지, 진짜라니까! 도대체 왜 아무도 믿어주질 않아!? 으갸ー악, 가만 있지만 말고 너희 둘도
뭐라고 말 좀 해!」
「…………」
아무래도 좋다고 그랬지만, 나는 M은 아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예상되는 『아픈』 결과에, 스스로 뛰어들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잠자코 있었다.
어제 아스카과 정한 규칙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옆의 분께서 알아서 잘 떠들어 주실테니까.
「히카리, 정말이야」
「에?」
「우리, 사귀게 되었어」
「……헤?」
「어제 있지, 그, ……신지 쪽이 고백해서, 그래서……」
「……헤?」
「히카리한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에에!?」
「아무튼, 히카리. 지금까지 응원해 줘서 고마워」
「지, 진짜라고? 진짜 이카리군이 고백했다고? 사귀게 되었다고?」
아스가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스카와 이카리군이…… 사, 사귄다고」
호라키양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 순간.
「「「「「뭐라고ーーーーーーー!!?」」」」」
교실의 동급생 전원이 일제히 의자에서 튀어올랐다.
 
 
「내가 먼저 봤는걸. 뺨에 하는 거…….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은 안 믿고…….
그야, 나하고 히카리쨩을 두고 보면, 누구라도 히카리쨩 말을 믿겠지만……」
아야나미는 아무래도 삐진 것 같다.
「그래그래, 알겠어. 레이쨩. 자, 이거 줄 테니까 용서해 줘, 응?」
옆에 있던 여학생이, 아야나미에게 당근을 내밀었다.
「………이거, 뭐야?」
「사탕인데?」
「………나는, 뭐지?」
「필요 없어?」
「…………있어」
사탕을 받아들더니, 그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자ー아, 문제해결. 그럼, 계속해 계속해」
아야나미를 낚는 데 성공한 여학생은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미 나와 아스카는 교실 정중앙 부근에서 포획되어, 달아나지 못하게 감금당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하기는 한 거야?………키, 키스」
그 말에 여자들이 꺄아ー! 소리를 지르고, 남자군단에서는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 그보다도, 사회 쪽지시험 있지 않아?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닥쳐라 이카리. 깨끗이 체념하지 못할까」
나의 작은 저항은, 남학생의 중학생답지 않은 대사에 산산이 부서졌다.
「으으……」
「그래서, 어디서? 어떻게?」
「똑똑히 좀 얘기해 봐, 특히 이카리군!」
사방에서 다그쳐 온다.
그 무시무시한 아우라에 눌릴 뻔한 순간.
디ー잉, 도ー옹, 데ー앵, 도ー옹…………….
종이 울리고, 동시에 교실 앞문으로 미사토 선생님이 들어왔다.
「어머나? 오늘은 꽤 떠들썩하네에……. 무슨 일 있어?」
선생님은 양손에, 아까 아스카가 격침한 시체 두 구를 끌고 들어오셨다.
사, 살았다!
시계를 보니, 바늘이 조례 시작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뭐어, 지금은 됐나. 아무튼 조례 시작할 거니까, 다들 자리로」
시체들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설치한 뒤, 미사토 선생님은 모두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로써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나는 미사토 선생님의 얼굴에서 구원의 여신을 보았다.
비록 이후에……… 수업 사이의 쉬는시간, 점심시간, 청소시간, 각각의 시간에
위기가 약속되어 있지만, 위기는 미룰 수 있는 한 미루고 싶다.
나의 모토가, 그렇게 고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엄하다.
폴리시든 모토든, 그런 걸로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있다면, 드라마 같은 건 필요도 없다.
오니로 변했던 급우 한 명이 말한다.
「선생님! 이카리와 소류가 사귀게 되었대요!」
「……네이네이. 너희들, 나를 속일 생각이면 백 년은 이르다. 그런 농담이라니, 애들도 참………」
미사토 선생님은 상대해 주지 않는다.
내가 안심한 것도 잠깐, 또 다른 오니가 외친다.
「선생님, 진짜예요! 지금 이 녀석들한테 이러쿵저러쿵 물어보고 있었어요!」
「알았으니까, 좀 자리에 앉아. ………어라? 호라키양까지 같이 떠들고 있었어? 별일이네……」
미사토 선생님의 눈이 휘둥그레.
「죄, 죄송해요. ………하지만, 사실이라서요. 두 사람」
반장의 말에 미사토 선생님의 움직임이 그쳤다.
그리고 서서히, 학생 전원의 얼굴을 살핀 뒤, 말한다.
「……………실화?」
사람 사는 세상의 오니들은(속담 “사람 사는 세상에 오니 없다渡る世間に鬼はない”를 뒤집은 것), 다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의 일은, 할 수 있다면 기억에서 지우고만 싶다.
그 자신이 오니로 변한 미사토 선생님은, 조례를 포기하고 인의 고리에 가세했다.
그로부터 무시무시한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아스카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겠다고 말한 뒤, 옆에서 그저 싱글벙글 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어째선지 그것을 냉큼 납득하고, 표적을 나 한 명으로 좁혔다.
하지만 나는 견뎌냈다.
그리고 조례 종료 시간이 다가오면서, 기적적으로 1회전 승리를 내가 거머쥐려는 그 때.
2학년 A반 담임 겸 사회과 교사가 이렇게 선언했다.
「1교시 사회, 쪽지시험 중지. 하는 김에 수업도 없다. 과외연구로 변경할게. 주제는 『사랑』이야.
그럼 여러분께 특별강사를 소개합니다. 이카리군, 소류 아스카양. 부디 교단으로」
동급생들의 미친 듯한 박수 소리에, 내 정신은 뚝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
 
 
 
그리하여, 나의 끝 없는 수난이 막을 올렸다.
그 날, 교실에서 나를 기다렸던 것은 역시 끝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켄스케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 선배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 거짓말이 그 후의 모든 것의 계기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없지 않다.
그래서 화나지만 화낼 수 없는 불완전연소 폐기물이 내 안에 남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몇 차례 계절이 바뀌고, 고등학교에 가고 나서도, 나는 아스카와 약속한 대로 언제나 곁에 있었다.
매일 아침, 아스카가 억지로 깨워서 일어났고, 함께 등교했다가, 함께 하교한다.
가끔 사소한 고집 때문에 싸움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이 큰 문제가 될
기분 따위, 나도 아스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행복은 계속되겠구나 하면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거짓말도 비밀도 전혀 없다고
내가 확신마저 할 수 있게 된 고등학교 3학년 봄.
고백의 날 밤. 아스카가 했던 의미심장한 말도, 이제는 기억의 저 편에 묻혀 있었다.
그런 4월의 둘째주 일요일 오전 9시.
그날, 슬그머니 내 방에 기어들어온 아스카는 드물게도 상냥하게 나를 깨우고는
심지어 모닝키스인지까지 해서 질식 직전까지 몰아놓고, 한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 사진에 찍힌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스카에게 사진의 설명을 들은 나는, 너무 놀랐다.
사진의 의미를 이해해서 단숨에 잠이 싹 달아난 내게, 아스카가 물어왔다.
놀라움 때문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두 말 없이 즉답했다.
아스카의 눈물을 본 것은, 7년 만의 일이었다.
 
 
 
 
에필로그
 

차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지만, 장엄중후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커다란 하얀 건물.
천장이 높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실내에 이상한 빛깔을 뿌리고 있다.
건물 입구에서 안쪽을 향하여 이어지는, 일직선의 길.
그 길의 좌우에는, 긴의자가 몇 개씩 나란하다.
6월의 어느 맑은 날의 오후.
나와 신지는 길의 가장 안쪽에 서 있다.
바로 앞에서는, 초면이지만 사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책에 눈길을 떨어뜨리고, 조용히 그것을 읽어내려간다.
우리는 조용히 그 말에 귀를 귀울인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우리 두 사람에게 확인을 받는다.
우리는 차례로 끄덕여, 할아버지의 질문에 답한다.
그리고, 정적에 휩싸인 실내.
건물 밖에서, 바람에 흔들린 나무들이 발하는, 잎이 스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마주 안았다.
올려다본 시선의 끝에 있는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우스운 나머지 뺨이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얼굴 이상해. 굳었잖아」
속삭이듯이 말한다. 그 말에,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흔들린다.
「으, ……어쩔 수 없잖아……. 긴장할 수밖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한다.
「후후후. ………있지, 신지. 기억나? 4년 전 내가 줬던 힌트 말이야」
「……에? ……뭐라고?」
신지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지만, 나는 조금 속상해 보일까.
「진짜, 예행연습의 힌트 말이야」
잠시 시선이 허공을 헤메더니,
「…………아아. 혹시 설마…… 그거?」
「기억나지?」
신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응. ……확실히, 4년 후와 왼손과 맹세와……… 아, 그리고 분명히…… 스칼렛, 이었던 것 같은데……」
이거 맞지? 라고 묻는 듯한 신지의 시선에, 나는 만족하여 끄덕였다.
「그 때의 정답, 가르쳐 줄게」
「에? ……지금? ……그래도……」
신지는 살짝 할아버지 쪽을 보았다.
……하여튼.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소심한 건 그대로라니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저기, 잠깐만 시간 좀 주실래요? 지금 둘이서만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좀 놀란 얼굴이었지만, 곳 피식 웃는 얼굴로 반응했다.
「감사합니다」
나도 웃음으로 인사하고, 신지에게 돌아섰다.
「이걸로 됐지? ……그래서 말야, 오늘이 그 날로부터, 몇 년 됐지?」
「……4년, 지났지」
「그치, ……그리고, 신지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건 무엇?」
「에?……반지, 인데……」
「그 반지를 끼우는 건, 어디?」
「……약지, 왼손 약지……………아아!」
신지가 작게 목소리를 높였다.
「우후후. ……자 그럼, 우리가 신부님의 질문에 대답한 말은?」
「맹세……. 맹세의 말………」
그리고 신지는, 방금까지 우리가 걸었던, 주홍색 길에 눈길을 떨어뜨린다.
「스칼렛……… 그런가, 버진로드……」
나는 살며시 신지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신진느 그에 맞추어, 반지를 내 왼손 약지에 끼워 준다.
나도 똑같이 신지에게 반지를 끼운다.
「그럼, 맹세의 키스를……」
신부가 말한다.
나는 신지의 눈을 들여다본다.
「이제 알겠어? ……무엇의 예행연습이었는지」
「……응. 잘 알겠어」
성당의 긴의자에는, 오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확실한, ……예행연습이었네」
신지는 살짝 웃으며, 내게 상냥하게 키스한다.
 
 
라이스 샤워의 축복을 받으며, 멕이는 목적으로 미사토에게 부케를 던진 뒤, 우리는 모두에게 둘러싸였다.
그것도 일단락된 뒤, 우리 앞에는 중학교 때부터 사기 좋은 세 사람이 남았다.
「아스카, ……정말 잘 됐다」
히카리의 말에, 나는 마음을 담은 미소로 화답했다.
「쭉 오늘 일을 꿈꿔왔어. ……축하해, 아스카. 정말 예쁘다」
「그러게, 소류의 웨딩드레스 모습 역시 굉장한데. 어떻게 찍어도 그림이 돼」
「고마워, 히카리. ……나도 지금, 너무 행복해……. 하는 김에 아이다도 고맙고」
「……나는 하는 김이냐?」
그 말에 모두 일제히 웃었다.
「그건 그렇고……. 너거들 너무 화려하게 하는 거 아이가ー. 우리도 고등학교 댕길 때사
결혼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몬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지가 18살이 되는 순간………」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스즈하라에게, 신지가 쓴웃음을 짓는다.
「아니,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아스카가 성당 사진 보여 주면서 예약했다고 말했을 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정도니까」
「그, 그치만.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다고……. 4년 전부터」
나는 조금 발끈해서 말참견을 했다.
「응, 그래. 좀전에 겨우 떠올랐어」
「……응? 그렇다면 즉, 이 식은 전부 소류가 혼자서 마음대로 추진했다는 거?」
「으, 잠깐 있어 봐, 아이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신지를 억지로 결혼시키는 것 같잖아」
「………아니었냐?」
「아, 아닌 게 당연하잖아! ……진짜, 신지도 뭐라고 좀 해」
「에? 응. ……에에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그런 건 스스로 좀 생각해」
내가 삐져하는 것을 보고, 당황한 히카리가 신지를 거든다.
「아, 이봐, 이카리군. 예를 들면, 프로포즈의 멘트라던가……」
「그렇지, 프로포즈 멘트가……… 잠깐, 에에!?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 돼!?」
허둥대는 신지에게, 스즈하라가 빈틈없이 치고들어온다.
「말 몬한다……. 애초에 프로포즈 자체를 했는지도 영 수상하더마…….
신지는 근성이 없으니까. 이대로 평생 소류한테 붙잡혀 살겄제……」
「그, 그런 거 아니야. ……말할게, 제대로」
「호ー오, ……그라문 꼭 들어야 쓰겄다. 그 프로포즈 멘트라는 거」
스즈하라는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신지가 곤란해하며, 내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온다.
「……흥」
나는 홱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오오! 결혼식 직후, 기념비적인 첫 리얼 부부싸움을 직관할 수 있다니.
이거 운이 좋은데, 토우지군」
「글게 말이다, 켄스케군」
「아 좀! 스즈하라도 아이다군도, 적당히 좀 해! 오늘은 평소하고는 다른 특별한 날이거든!」
갑자기 폭발하는 히카리, 스즈하라가 쭈그러든다.
「그, 그렇나. 미안타, 미안. 신지 봤다 카면 내도 모르게 이래삐가……」
「그래도, 신지가 분명히 말을 하는 것도 좋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렇네. 이카리군이 프로포즈 멘트를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지」
「그, 그체. 애초에 신지가 잘못했다카이」
세 명의 의견이 일치하고, 여섯 개의 시선이 신지에게 집중된다.
……특히 히카리의 눈이 번득인다.
「뭐, 어째서 내가……」
울 듯한 표정의 신지를 보고, 나는 마음먹었다.
「……얘들한테 가르쳐 주면 되잖아, 신지. ……어때, 여기서 재현해 볼래?」
「……………헤?」
내 짖궂은 제안에, 이번에야말로 신지가 완전히 굳는다.
대조적으로, 히카리의 반응은 빠르다.
손뼉을 치며 좋아하더니, 큰 소리로 주위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이카리군과 아스카가 지금부터 프로포즈의 순간을 재현한대요ー!」
「기, 기다려, 호라키양!!」
신지의 외침도 보람 없이, 순식간에 우리 주위는 사람들로 뒤덮인다.
나는 생긋 미소지으며, 신지를 올려다본다.
「어쩔래? 다ー들 이렇게 모였는데」
「아, 아스카……. 도대체 왜……」
「어ー이, 뭘 하고 있어ー. 할 거면 빨리 보여달라고ー. 테이프 계속 돌아가고 있다고ー, 아깝잖아ー」
「그렇제 그렇제ー. 확실히 하그라ー. 여기서 빼뿌문 싸나이가 아니제ー」
약삭빠르게 인파에 뒤섞인 2바보가, 무책임하게 요란한 장단을 맞추고 있따.
「아스카ー, 이카리구ー운. 힘 내ー」
「아ー아, 히카리까지……. 이제 물러설 데가 없는 것 같네, 신지」
「크윽, ………이런……」
「이런 뭐?」
「……이런 건 예행연습 같은 거 안 했잖아」
빙 주위를 둘러싼 인의 벽을 흘끗 보고, 나는 말한다.
「그런가……. 근데, 4년 전 그날하고 똑같잖아」
「……다르지」
「다른가?」
「다르지. 그 때는 전혀 모르는 타인들이었지만, 오늘은 다들 아는 사람들이고……」
「후후후, 괜찮잖아. 보여주는 게 어때?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2개월 전 그 날 아침의 정경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 그치만. 아스카 오늘은 드레스잖아……」
나가가는 나를 보고, 신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노 프라블럼. 사랑 앞에선, 모든 게 문제가 아니야」
「그, 그런……」
한심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신지에게 뛰어들어 안긴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주연 2인의 달콤하고 달콤한 무대의 막이 오른다.
 

 

 

FIN.

 


 

안녕하세요. 케이ケイ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난생 처음 써 본 팬픽, 어떠셨나요? 조금이라도 「생긋」 웃을 수 있었다면 다행입니다.

이 「스칼렛」을 쓰게 된 계기는, 투고규정 페이지에 반짝 빛난 「아이들을 행복하게子供達に幸せを」라는 말에

제 자신이 생긋 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페이지가 내거는 「LAS상등上等」의 취지에, 제 마음은 철컥

하고 붙잡혀 버렸습니다. 역시 해피엔딩이 제일이지요.

……뭐, 그건 그렇고. 이 작품은 현 시점으로서 제가 힘 닿는 힘을 모두 끌어모아 쓴, 누가 뭐래도

「LAS 코미디」인 것입니다. 하지만, 글러먹은 제게는 자기 작품에 대한 객관성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어서요.

그러니 부디 여러분! 감상 메일을 보내 주세요. 나의 아스카는 이렇지 않다거나, 신지가 너무 적극적이라거나,

러브러브 성분이 부족해ー라거나, 1인칭을 잘못 썼다거나, 그런 불만사항도 물론 대환영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이트 관리인이자 위대한 아스카팬 새우씨, 파일 하나 제대로 못 보낸 제게

따뜻한 말씀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다른 작품도 여기서 투고하겠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안녕히 계세요.

 



Gehen에 처음으로 투고해 주신 케이씨의 「스칼렛」이었습니다.
첫 투고 장소로 Gehen을 선택해 주시고, 이런 멋진 작품을 써 주신 케이씨. 정말로 감사합니다 & 고생하셨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작품을 다 읽고 마지막에 작가분의 후기나, 새우えび의 코멘트를 보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어땠나요, 이번 작품. 무엇보다 엄청난 볼륨이었지요!
하지만 이 정도 볼륨에도 불구하고, 새우는 읽다가 지치는 일도 없이 단숨에 독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내용이 아주 훌륭했고, 또한 신지 시선으로 쓰여지는 글의 흐름이 아주 기분 좋았기 때문입니다.
단순명쾌하게 말하자면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읽게 될 정도로 굉장해ー 재미있어!」라는 것이지요.

이야기 내용 자체는 학원게리온을 베이스로 한 것이군요.
언제나의 신지에 언제나의 아스카. 그것을 둘러싼 토우지와 켄스케, 그리고 히카리.
약간의 계기를 거쳐, 신지는 용기를 짜내 아스카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지만……. 후아ー, 중반 이후부터 러브러브 폭렬!
특히 아스카가 진짜 대박이네요.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녀 모드 일직선이라는 느낌으로 최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칼렛」색 버진로드 위에서의 러브러브 결혼식.
처녀작으로 이렇게까지 확고한 이야기를 써내다니, 정말 대단하신 케이씨. 졌습니다.
그래도 고등학생이 결혼하는 건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뭐 신지와 아스카 사이니까, OKOK겠지요

 작가 케이씨에게 꼭 감상을!
 무슨 내용이든 괜찮아요. 생각한 점, 느낀 점을 팬픽 작가님꼐 보내드립시다~

우리 웹페이지의 투고 규정이 집필의 발단이 되었다니, 드문 일이네요.
그래도 케이씨도 「아이들을 행복하게」이라는 생각에 공감해 주셨다니 정말 기쁩니다.
이번 대작,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케이씨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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