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 미사토. 저거 좀 빌려줘. 라벤더 향수」
디저트로 내놓은 레몬 케이크를 먹고 있는 것은 나 뿐. 급하게 씹어 넘겼다.
아이들은 늦은 저녁을 기다리다 먼저 디저트를 먹어치웠다.
「괜찮아. 방에 들어가도 되니까 마음껏 써」
기후변동으로 인해 구할 수 없게 된 것이 많다. 진짜 생화에서 추출한 향료도 그 중 하나.
세컨드 임팩트 전에 만들어진 귀중품을, 그녀가 여러 가지 의미로 아끼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박정한 나로서는, 아스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서까지 아까워할 가치는 없다.
「당케, 미사토」
「천만에」
다 쓴 식기는 부엌으로.
「차 한 잔 마실 사람?」
「아……, 네」
「나는 됐어」
「…희망합니다」
「쿠와악」
찻주전자에 더운물을 넣고 다이닝으로 돌아온다.
리츠코씨의 영향을 받아 커피당에 입당한 나는, 홍차를 아무렇게나 막 만들었다.
아스카가 리필을 거절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우선 그의 찻잔에 홍차를 따른다.
이어서 아야나미의 찻잔 앞, 여분으로 놓아둔 머그컵에 따른다.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아야나미의 찻잔에 홍차를 옮긴다.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머그컵에. 다시 찻잔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영양보충제와 고체형 밸런스 영양식만 먹고 살아온 듯한 아야나미는 뜨거운 것을 못 먹는 고양이 혀 체질이었다.
――가정방치 등으로 인해 따뜻한 식사를 접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
동거를 시작했을 즈음, 식후 차에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아 이유를 물어보니, 뜨거운 것은 싫어한다고 그랬다.
라면 같은 것은 조금씩 공기에 노출시켜 식혀 먹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스프 종류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렸던 것 같았다.
식혀 먹는 방법을 가르쳐 준 뒤로 후우후우 하면서 열심히 입김을 불어대는 아야나미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되도록 이렇게 빠르게 식혀 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 라는 주고받음에, 아스카가 이쪽을 흘낏 본다.
사팔눈을 뜬 기색은 심드렁하다는 태도. 그것인즉,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는 뜻이다.
아스카는 언뜻 봐서는 감정표현이 풍부해 보인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연기라는 것을, 아스카가 감정을 감추려고 했을 때 알게 되었다.
숨기는 것도 서툴러서 과잉반응하다 보니 공격적으로 보이는 것.
그 모습은 마치 새끼들이 숨어있는 굴을 막기 위해서 머리를 쑤셔 넣는 고슴도치같다.
사용할 생각도 없는 가시가, 있지도 않은 외부의 적을 무의미하게 위협한다.
그래야 하는 자신을 연출하고, 이를 악물고 그 모습을 겉꾸민다. 그것이 소류 아스카 랭글리라는 소녀였다.
「아참, 아스카…쨩한테 부탁이 있거든?」
「뭔데?」
시선만 이쪽을 향하는 것은,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았다는 뜻일 터. 그런 상태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디저트 사는 거 말야, 아스카…쨩이 좀 해줄 수 있을까 해서」
내 몫의 차를 따른다.
류큐가라스로 만든 카페오레볼은 아스카가 오키나와에서 사 온 선물이다.
제멋대로 사도를 섬멸한 벌, 이라면서 쉽게 넘겨주지 않았지만.
부부다완 같은 대소 한 쌍으로, 작은 쪽을 아스카가 쓰고 있다.
아스카 본인의 마음에도 드는 것 같고, 2개인 게 꼭 좋으니까. 라는 이유로 골랐지만, 당연하게도 엉뚱한 억측을 불러온 모양이다.
전달받을 때, 다른 뜻은 없거든. 이라고 다짐받아 버렸다.
「지금도 매일 직접 만드는 건 아니야」
베이비 체어 위에 펜펜의 모습이 없다. 차 리필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가게에서 사 오기도 하고, 오늘만 해도 마야…쨩이 준 거야」
홍차를 한 모금.
「그랬어?」
그랬다. 세 아이의 식사는 물론이고 디저트까지 내가 만들고 있다는 걸 알자, 수제 디저트를 내게 내놓은 것이다.
「그렇게 말하니 괴롭지만, 요즘 너무 바빠」
바쁘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지만, 식사 준비를 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디저트 만들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디저트를 직접 만들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아이들에게 효과가 있기 때문.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스위츠를 눈앞에서 만들어 주면, 아이들은 마법을 본 것처럼 동경하는 것이다.
주로 아야나미 갱생대책으로 시작했지만, 부모자식간의 상호접촉을 모른다는 점에서 세 명 모두 다를 바가 없고, 모두들 날마다의 즐거움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것을 굳이 그만두는 것은, 아스카에게 몇 가지 「일」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일럿으로서의 임무가 아닌, 가정 내에서의 일손 돕기를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직무태만이네」
부모의 사정을 헤아려 가정의 운영에 참가하는 것도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맡고 있는 건, 그게 일이기 때문이 아니야?」
한숨 돌리고, 노트북 퍼스컴을 꺼내서 시동을 걸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스카 역시 부모의 정에 굶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지도 아야나미도 끼어들지 않는 것은 아스카에게 동의하기 때문에 아스카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선출의 근거는?」
아니, 아야나미는 불만인가? 아스카가 지명된 것에 불복하는 건가.
「아스카…쨩이 과자 가게라든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조금 외로운 것 같다.
나를 재촉하는 비프음에 ID와 패스워드를 입력.
「퍼스트에게는 과중한 짐이라는 거야」
사소한 데서 자기현시욕을 자극받은 아스카가 만족스럽게 상체를 뒤로 젖히며 뽐냈다.
「물론 매일 그럴 거라는 말은 아니야.
휴일에는 그 날하고 그 다음 날 분을 내가 만들어 줄게」
다음 단계로 옮기기 위한 층계참. 그런 의미도 있다.
만들어만 주던 것을 스스로 고르고 사게 되는 것을 경험하면, 그 다음에는 함께 만들기라는 선택지가 생기는 있다.
세 명 중 누군가가 과자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해주는 날이 오기를 조금 기대하게 된다.
고양이 발바닥 모양 소프트웨어를 읽어들이고, 파일을 연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내면의 문제가 정리된 듯, 아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k
「고마워. 그럼 부탁해」
a
네이네이. 하면서 손을 털고 의자에 기대는 아스카.
z
불만이 있으면 언제라도 일방적으로 불평을 내뱉는 아스카니까, 심드렁한 척 하는 모습은 멋쩍음을 숨기려는 것일 것이다.
o
…왜 이호기 파일럿은 천만에요라고 말하지 않는 거야. 라는 아야나미의 군소리는 무시당하는 것 같다.
k
「…레이쨩도, 먹고 싶은 과자가 있으면 아스카…쨩하고 얘기해.
새로운 가게를 찾았다거나 하면 가르쳐 줘」
「…네」
u
얼굴을 올리고 대답한 아야나미가 드문드문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는 아야나미는 아스카의 보좌라는 위치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숫자의 무리에 새로 수치를 더한다.
「그런데, 미사토는 조금 전부터 뭐하고 있는 거야?」
「이거? 모두의 영양 관리야」
내밀어 보인 노트북 퍼스컴에는 네 사람의 섭취 칼로리나 영양성분, 소비 칼로리 등이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흐응? 에바의 파일럿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자기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보던 아스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데 왜 내 이력이 여기 오고 나서부터 것밖에 없는 거야?」
「그거, 내가 프라이빗으로 관리하는 거야」
「네르프 일이 아니야?」
습관적으로 영양 관리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학창시절 일이었다.
당시 여성의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만날 빈혈이라든지 생리불순이라든지 고생하고 있던 나는, 그 대책으로 리츠코씨가 짜 준 관리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니야」
이것은 그 최신 버전. 마기 발타자르의 서포트를 받는 뛰어난 물건.
그런 일은 멜키오르 쪽이 어울리는데. 라고 불평하는 리츠코씨를 달래서 바로 요 전날 전환했다.
뭐, 카스퍼보다는 낫겠지만. 이라고 악담을 하기에, 나도 모르게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레몬 케이크로 입을 막아 버렸다.
화를 낼 줄 알았던 마야씨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신기했지만.
「성장기인 너희를 맡고 있는 보호자로서 당연히 필요한 거야」
이 소프트웨어 덕분에 근 8년간 체형을 유지하고 있고, 그 연장으로서 아이들의 영양 관리를 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다.
게다가 마기의 서포트를 받게 되면서 휴대 단말기의 전자수첩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입력의 수고도 확실히 줄었다.
「거짓말 마셔. 이렇게까지 하는 부모가 어디 있어」
아스카는 네 사람 각각 필요 칼로리나 영양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다.
「다들 바쁘니까. 게다가 다른 아이들이 너희들만큼 엄밀하게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 봐. 결국 우리가 파일럿이니까 그렇게 하는 거 아냐」
「다르지.
너희들이 파일럿이라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파일럿이기 때문에, 기왕 할 거면 엄밀함이 요구되는 것 뿐이야」
아이들이 파일럿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영양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보호자로서 필요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아이들이 파일럿이니까, 보통의 아이들보다 신경써 줘야 하는 것이다.
「내 걸 한번 열어 봐? 8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습관이야」
좀 실제적으로는, 아이들의 영양 관리는 사령부에 대한 퍼포먼스의 측면이 강했다.
귀중한 칠드런을 맡고 있는 이상, 감독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
의료부에 제공해 줌으로써 검진 항목을 줄이거나 식단 어드바이스를 받을 수 있다는 메리트도 있다.
하지만, 「에바의 파일럿이기 때문에 해주고 있다」는 식으로 아이들이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펜펜 것도 있어」
옆쪽에서 엿보고 있던 아야나미가 데이터를 찾아낸 모양이다.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었을지도.
「어쩐지 펭귄한테 힘이 들어가 있는 느낌」
그건 착시다. 인간과는 파라미터가 다른 것이다.
애초에 이 세상에 온천펭귄의 영양관리 소프트웨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펜펜을 떠맡았을 때 함께 양도된 임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해서 리츠코씨에게 부탁해 대충 만들어 낸 것이다. 인터페이스가 엉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입력항목이 달라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저애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신종인 데다, 실험동물이잖아. 영양관리가 큰일이야.
게다가 날생선을 먹지 않고 꼭 구워서 먹으니까 비타민도 부족할 테고」
한숨.
아장아장 하는 느낌으로 걸어온 펜펜이 베이비 체어에 기어올랐다.
아무래도 선반까지 영양보충제를 가지러 다녀온 것 같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병에서 캡슐렛을 골라내서 꺼내더니, 물도 없이 삼켰다. 통째로 삼키기는 펭귄의 특기다.
「생선만 좀 날것으로 먹어줘도, 적어도 비타민 C 보급은 걱정 없는데」
「…펜펜. 편식…. 안 돼」
아야나미.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오히려 너희들보다 더 어려워」
조금 쓴웃음.
노트북 퍼스컴을 끌어당겨서 방금 먹은 비타민 섭취를 계산해 올렸다.
「천하의 칠드런보다 펭귄 쪽에 수고를 더 들이고 있다는 거네」
역시 화가 났을까?
왼손을 쑥 내밀어 펜펜의 부리 아래쪽을 긁어주고 있다.
자기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을 긁어주는 것은 동물에 있어서는 지복이다.
행복하게 눈을 가늘게 뜬 온천펭귄이 기쁜 듯이 아스카의 손에 부리를 비벼댔다.
「뭐, 펭귄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해 봤자 소용 없잖아」
펭귄조차도…. 그 군소리의 다음은 공기속에 녹아 들리지 않는다.
……
펜펜의 반응을 살피면서 비어있던 왼손이 이제 그 후두부에 닿았다.
「있지, 미사토.
우리가 파일럿이 아니라도 해 주는 거야?」
기뻐하는 온천펭귄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아스카가 자주 사용하는 감정을 숨기는 방법이다.
「물론이야.
파일럿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파일럿인지 아닌지는 두 번째, 세 번째 문제야」
그것마저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칠드런이기 때문에 맡고 있는 것 자체는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에바와 관계된 불행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고 싶다는 생각에 거짓은 없는데,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조금 괴롭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칠드런을 모두 데리고 있으면서 설득력 없는데, 뭐 됐어.
그거, 나도 액세스할 수 있게 해 줘」
「…저도」
「공유 스페이스에 “카츠라기” 폴더가 있어. 패스워드는 “kazoku”야」
노골적인 패스워드에 당황한 아스카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자기 옆에서 희생양을 찾아냈다.
「바보신지, 왜 너 혼자서 모르는 척 시치미 뗀 얼굴 하고 있는 거야!」
서치 앤 디스트로이는 아스카의 신조일까?
「뭐야! 그런 건 내 마음이잖아」
파일럿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해! 패스워드는 들었으니까 나중에 보려고 했단 말이야. …그래, 잘 됐어. 쿠왁 쿠와악. 이렇게 난장판이 시작되었기에, 노트북을 덮고 욕실에 온수나 받으러 가기로 했다.
일년이 언제나 여름,
하루 중 밤,
밤 중 아홉 시,
아야나미에 이슬 맺히고,
아스카는 날개치며 날고,
그는 바닥을 기는데,
펜펜 거기에 임하시니.
온 세상에 아무 일도 없어라.
……일까나.
****
「신지군, 잠깐 괜찮아?」
『…미사토씨? 들어오세요』
맹장지를 연다.
「한밤중에 미안해」
침대 위에서 S-DAT를 듣고 있던 그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이어폰을 빼냈다.
「아뇨」
그의 앞까지 가서 바닥에 앉았다.
「무슨 일 있나요?」
「내일 일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분명히 동요한 그가 S-DAT를 떨어뜨렸다.
「내일 성묘, 마음 내키지 않으면 무리하게 가지 않아도 괜찮거든?」
「……그래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신지군의 기분이 우선 중요해. 어른들 형편 같은 건 뒤로 미뤄도 괜찮아」
「……제 ……기분이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성묘라는 건 죽은 사람에 대한 마음가짐의 문제야.
그러니까 본인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오히려 어머님께 실례야?」
정말로, 성묘라는 것은 산 자가 자기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생에 아버지가 했던 말도, 결국은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진의는 아야나미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나나 지금의 그가 둔감하다고 해도, 어머니의 사진을 보기만 하면 그 사진이 누구를 닮았다는 것쯤, 바로 알게 될 것이다.
눈치채 봤자, 외가쪽 친척이라고 거짓말해버리면 그만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차치하고.
성묘 그 자체가 싫은 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건 마중물이다.
「…성묘가 싫은 건 아니에요. 그……」
그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하지만, 아무리 시선을 움직여 봤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 리 없고.
「……아버지를 대하기가 힘들어서」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구나?」
그가 수긍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했기 때문에 신지군하고는 좀 다르지만, 기분은 알 것 같아」
「미워……했다고요?」
「내 아버지는, 자기 연구 속, 꿈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어.
그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어. 미워하기까지 했지. 어머니나 나, 가족의 일은 챙기지 않았으니까.
주위 사람들은 섬세한 사람이라고들 했어.
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약해서, 현실로부터, 우리 가족이라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고만 있던 사람이었던 거야.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지.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졌을 때도 이해할 수 있었어. 어머니는 항상 울고만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쇼크였던 것 같지만, 그때는 자업자득이라며 스스로를 비웃으셨어.
그런데, 마지막에는 나를 대신해서 죽은 거야. 세컨드 임팩트 때.
나는 알 수 없게 되었지. 아버지를 미워했는지, 좋아했는지」
가슴의 로자리오를 만지작거렸다. 전생에 들었던 말들을 바탕으로, 그녀의 기억을 떠올리면, 마치 내 일처럼 가슴이 아파왔다.
내가 그녀에게 공감하듯이, 그녀도 내게 공감해 주고 있다면 마음이 든든할 텐데.
「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지 않다면, 시간만 조정하면 되잖니?
먼저 가서 꽃만 올려두고 오면, 사령관도 왔다 간 줄 알테고」
제안의 내용을 이해한 그가 잠시 멍해졌다.
3년 전에 도망친 이후로, 따로따로 간다는 선택지를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가 바라지 않는다면, 무리하게 대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패런테크토미라고 하는 치료법이 있다.
기관지염이나 천식, 혈관 신경성 부종 등의 심인성 질환의 대책으로, 아이들을 문제부모에게서 떼어 놓는 방법이다.
병의 원인이 될 만큼,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의 존재는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망친다든가 도망치지 않는다든가 하는 레벨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그와 아버지의 관계에 적용시키는 것은 좀 무리지만, 그의 자립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참고하고 있다.
게다가, 어중간하게 상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후의 상처가 커진다.
……
「…아뇨, 모처럼이니까 아버지하고 같이 갈게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끝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의외였다.
……
「괜찮겠니?」
네. 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미사토씨의 얘기를 듣고 나니까, 살아 있을 때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사토씨, 후회하고 계시죠. 아버지에 대해서」
그 말이, 가슴의 상처에서 그녀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2년간의 마음의 미궁의 궤적.
그것은 헛된 기쁨과 자기혐오를 채워넣고 후회로 봉한 만화경이었다.
몇 번이고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며,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
「미사토씨」
정신을 차리자 그의 얼굴이 앞에 와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있다.
이러면 재미없다. 그녀의 기억에 붙잡혀 또 울어버린 것 같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연색 손수건은 다름 아닌 그가 준 승진 축하 선물이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없었던 걸 신지군이 해 주는 것 같아서, 기뻤어」
거짓말이다. 그녀의 기억 때문에 울었다.
하지만 참말이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지금의 그가 극복하려 애쓰고 있음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뻤다.
사실은 무서워요. 라면서 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
펑펑. 누가 또 맹장지에 노크하는 바보짓을.
『…카츠라기 소령』
「…레이쨩? 들어와도 괜찮아」
맹장지가 열리고, 베개를 안은 아야나미가 들어왔다.
원래는 노크도 응답도 없이 당돌하게 불쑥 들어오곤 했지만, 아스카에게 걸리고 나서 단숨에 섬멸……, 교정되었다.
언제든지 들어와도 괜찮다고 카츠라기 소령은 말했는데. 라며 원망스럽게 아스카를 바라보던 아야나미가 귀여웠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먼저 이불에 들어가 있어」
――아야나미의 방에 침대를 넣어준 날, 그녀의 싱크로율은 폭락했다. 리츠코씨가 옆에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와중에, 그날 하루 일을 반추해 보았다.
어쩌면 싶어서 귓가에 속삭여 준 뒤, 싱크로율이 급회복하자 리츠코씨에게 추궁을 받기도 했다.
그 이래로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아야나미가 잠자리에 슬그머니 들어오곤 했던 것이다――
머리빗으로 빗어 내리던 머리카락을 머리망 속에 모으고, 화장수를 손에 잡자 거울에 아야나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잠자리에 자기 베개의 설치를 마치고는, 다리를 모으고 앉은 채 내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레이쨩. 이리 와 봐」
말없이 다가온 아야나미를 경대 앞에 앉혔다.
입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파자마 차림.
쪽빛을 물들인 그러데이션은 목 언저리부터 백살~병사~물파~팟잎~달개비풀까지 조금씩 색깔이 진해지고, 옷자락에 이르러 박표~표~쪽빛~납호~감색으로 익어간다. 파란색 거농이라는 전통염색법을 현대풍으로 어레인지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쪽빛 염색을 하는 장인은 드물어서 찾아내기까지 고생 좀 했지만, 충분히 보람있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
아야나미 자신도 이 파자마처럼 여러 색을 거듭해준다면 기쁠텐데.
물론 이 잠옷을 입힐 때도 말썽이 있었다.
평상복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사 주려고 데리고 간 백화점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침구류 판매장에 시선을 돌린 아야나미는, 그게 좋으니까. 라고 한 마디 중얼거리고는 입을 닫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아야나미는 AT필드라도 친 것처럼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전략적 후퇴를 도모했다.
아마 무엇인가 각인된 것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야나미에게 물려준 내 파자마가 중요한 물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얽매이는 물건이 생겼다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있어 나쁜 것은 아니다. 자아가 싹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도 매일 빨아야 하는 파자마에 얽매이는 것은 좀 불편하다. 빨았을 때 바꿔 입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오늘 욕실에서 재전투가 붙은 것이다.
이 날을 위해서 준비한 전용 언령결전병기 「매일 저녁마다 입으면 옷이 닳을 거야」는 아야나미의 AT필드를 철저하게 분쇄시켰다.
잇달아 내보낸 「열심히 찾았어, …레이쨩한테 어울릴 거 같은 파자마」는 프로그 나이프보다도 매끄럽게 아야나미의 코어를 꿰뚫은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준비해 둔 잠옷을 장비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손에 빗을 들고, 색소가 없는 아야나미의 머리카락을 빗질한다.
태양광 아래에서는 연한 팟잎색으로 잘못 보이기도 하는 아야나미의 머리카락은, 따뜻한 색감의 형광등 아래에서는 희미한 창포색으로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해서 머리카락 끝을 가지런하게 해둬야 머리카락이 상하지 않아」
「…그래도 바로 흐트러지는데」
「그러게. 하지만 작은 반복이 쌓이면 큰 차이가 되거든」
「…알 것 같아요」
머리를 빗어주는 중에도 손속없이 고개를 끄덕여대기 때문에 방심할 수가 없다.
슥슥, 머리카락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
「…오늘, 이카리군이 그랬습니다.
어머니 같은 느낌이 들어……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주부가 어울린다는 뜻……인지」
……
「그러게. 그래서 …레이쨩은 어떻게 생각했어?」
「…뺨이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이, 부끄러움? …어째서 부끄러운 거지?」
그 때는 분명히 화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전생의 아야나미와는 달라진 걸까.
「……그건, 자기 장래를 상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래?」
「응. 남자아이에게 끌리고, 서로 맺어져서, 아이도 낳고. 여자의 행복 중 하나지」
슥슥,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자기가 그렇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없니?」
「…모르겠어요」
슥슥,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남자가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그 아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상대가 자신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아야나미의 몸이 굳어졌다.
「…이카리군은, 나와 그렇게 되고 싶은 거?」
거울너머로 쓴웃음을 본 것인지 캐물어 온다.
나 역시 그랬지만, 지금의 그도 무슨 진지한 의미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일 리 없다. 단순히 화제가 끊어지자 한 가벼운 이야기일 뿐이다.
「신지군은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 거야.
하지만, …레이쨩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구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바람직?」
「여자로서 매력적이라는 말이야」
뻣뻣해진 몸을 풀어주듯이, 나머지 한쪽 손으로 어깨를 주물러 준다.
「…매력적.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동경.
이성을 끌어당기는 요소를 가지는 것.
…이성. 서로 달라서 이끌리는 것.
결합되어 보충되는 한 쌍.
…한 쌍. 사람의 끈의 한 형태.
보완된 이성.
사람의 단위.
차세대를 생산하는 조합.
이성에게 요구되는 것.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즐거움. 선택받는 기쁨. 보완되는 기쁨.
그래. 나, 기대받은 것이 기쁘구나」
드문드문 중얼거리던 아야나미가 시선을 올렸다.
산발한 머리칼을 빗는 행동을 눈으로 쫓는다.
슥슥,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
「…나는, 카츠라기 소령이 어머니라는 느낌이 드는데. …어째서?」
거울너머로 이쪽의 모습을 살피던 아야나미가 몰래 시선을 맞추어 온다.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카츠라기 소령의 아이들이 아닌데」
아니야. 라고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혈연 같은 건 관계없어.
아이가 있고,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어. 그게 부모자식이야.
부모를 뜻하는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木) 위에 서서(立) 살펴본다(見)고 쓰지. 그건 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이야.
반대로, 피가 연결되어 있어도 부모자식이 아닐 수도 있어. 부모가 된다는 것에는, 자각과 노력이 필요해.
내 아버지나 신지군의 아버지는 그런 자각이 없는 부모지」
왼손으로 가슴에 늘어진 로자리오를 만지작거렸다.
「…이카리 사령관은 부모가 아니라는?」
「그러게. 아이를 살펴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야.
부모자식 간의 끈은 단단하지만, 그건 사람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끈이고, 무엇보다 긴 시간을 들여서 키워나가는 끈이니까.
그것을 키워나가지 못한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그녀의 기억, 자신의 기억. 엇갈린 십자가 형태를 취한 닻이, 왼손 안에서 무겁다.
닻이 깊은 곳으로 떨어질 때 도망치듯 떠오르는 물거품처럼 눈물을 짜낼 뻔 했다.
「…나, 이카리군에게 말했어요.
사령관의 아들인데, 아버지를 믿을 수 없는 거냐고」
때려 버렸어. 라며 보는 것은 오른손바닥.
「…나, 부러웠던 거야?
나보다 확실한 끈을, 이카리군이 가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꽉 움켜쥐었다.
「…나, 화났던 거야?
이카리군이 그 끈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그렇구나,
나, 질투했구나」
무엇인가를 찾듯이, 쭈뼛쭈뼛 입을 연다.
자기 마음 속의 어두운 정념을, 아야나미는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괜찮아, 아야나미.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게 되는 길이야.
아야나미의 성장의 증거야.
「…나, 아무것도 몰랐어. 내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이카리군을…… 상처입혔어?」
방황하던 아야나미의 오른손이, 로자리오를 잡고 있는 내 왼손에 닿아왔다.
십자가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글쎄, 어떨까?」
상처입지는 않았었다. 다만 놀라고 이해할 수 없어서 침울해진 것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그것이 아야나미 나름의 서투른 파토스의 발로였다는 것을. 외계를 수용해서 내면에서 만들어낸, 아야나미의 마음의 잔물결이라는 것을.
「…이럴 때는,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런 말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
끄덕.
「그러면, 사과하면 되는 거야. 「미안해」라고.
잘못을 인정하는 말, 사죄의 말, 용서를 부탁하는 말이야」
「…용서……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해도, 일단 사과하는 게 중요한 거야」
눈물을 참고, 거울 안의 아야나미에게 미소 지어 준다.
「한때의 감정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사람은 용서라는 걸 하는 거지」
이것이 정말로 아야나미를 향한 말일까?
어째선지 잔뜩 굳어 있던 왼손의 힘이 저절로 풀렸다.
「괜찮아. 신지군은 용서해 줄 거야」
은제 로자리오가 소리 나게 미끄러져 내렸다.
「만약,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또한 한때의 감정이야.
그게 신지군의 전부는 아니니까」
손바닥에 새겨지듯 남은 십자가 자국. 비록 지금은 사라지지 않더라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그 때는, …레이쨩. 네가 용서해 주면 되는 거야」
…네. 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야나미의 몸을 꼭 껴안았다.
****
리츠코씨가 한발 앞서 먼저 돌아갔을 때, 느닷없이 아야나미가 떠오른 것은, 그녀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 위치에 꽂혀 있던 자양화의 색깔 때문일까.
옛날의 기억으로는, 이때쯤 아야나미는 아버지와 행동을 함께 하면서 얼마간 학교를 쉬고 있었다.
작전부에 제출된 계획에는 정기적인 정밀검사라고 되어 있었지만, 건강면 관리자인 리츠코씨가 여기 있는데 누가 무엇을 검사하고 있다는 말인가?
어제 오밤중에 아야나미가 침실에 슬그머니 돌아왔던 것이 그것과 관계없을 리 없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뭘 생각하고 있어?」
온더록 잔을 쨍 소리가 울리게 내려놓는 카지씨.
내 시선 끝의 자양화를 어떻게 본 걸까.
「아이들 생각」
학창시절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돌아오는 길. 셋이서만 호텔 최상층 라운지로 3차를 왔다.
「무정하구만. 이렇게 멋진 남자가 곁에 앉아 있는데」
TOKYO-3 잔에 입을 댄다.
보드카 베이스에 우유와 프란젤리코가 두 층 쌓였다.
표면에 각종 견과류 가루로 그려주는 그림은 그때마다 다른 것 같다. 처음 잔에는 아몬드로 하트가, 두 번째는 피스타치오로 꽃이, 이번 잔에는 개암으로 별이 그려져 있다.
강한 알코올을 달콤함과 고소함으로 가린, 확실히 제3신동경시 같은 칵테일이다.
「엄마는 아이들이 최우선이거든」
한 모금씩 마실 때 마다 우유와 프란젤리코의 혼합 상태가 변하고, 그에 따라 입 안의 맛도 계속 바뀐다. 그렇게 즐기는 사이에 보드카에 섬멸당해 뻗는다. 그런 레시피였다.
「완전히 엄마 노릇이 몸에 뱄구나」
「……의외였어?」
「그럼」
처음 만났을 때는 꼭 남자 같았으니까. 라면서 기울이는 잔속에서, 동의한다는 듯 얼음이 울었다.
처음 카지씨와 만났을 때, 전생에 그녀가 카지씨와 교제하고 있었던 사실이 닥쳐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경솔했다고밖에 할 수 없지만,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만약 기억하고 있었으면 카지씨와 여자로서 교제할 수 있었을까? 라고 질문 받는다면, 그런 각오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실수는 없었던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달랐다.
남녀의 첫 만남으로서는 최악의 방법으로 만나 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의 버튼을 잘못 채워 버렸다고 생각해서, 동요하고 고뇌하고 절망했다.
마침 우연히도 달거리가 심한 때와 겹치는 바람에, 아주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일주일 내내 틀어박혀 있었다.
리츠코씨가 상태를 봐 주러 와서 겨우 회복, 최종적으로는 카지씨와의 우정도 다질 수 있었지만, 이 일이 그 뒤로도 꼬리를 잡으며 나를 괴롭혀 이후의 교우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특히 독일 제3지부에 근무하고 있을 때, 재회한 옛 지인들 중 세 번째가 되는 아스카에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해버렸던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카지씨와 사귀지 않게 되었으니, 그 대신 아스카와 허물없는 관계가 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는데.
결국 이 주박이 풀린 건 무사히 작전부장이 되어 제3신동경시에 부임하고 나서였다.
그제야 대부분의 옛 지인들을 다시 만나면서, 인간관계의 오차는 어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최악의 만남이었지, 우리」
「…그러게」
다 마신 잔을 내밀면서 보이를 부른다.
전생의 카지씨의 행방을 나는 모른다. 자동응답기의 내용과 그녀의 태도로부터, 죽은 것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는 맥주를 먹지 않게 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그것뿐이 아닐까.
『카츠라기 늦네. 화장이라도 고치고 있나?』
『경도에는 뭐 하러 갔다 왔어?』
『뭔 소리야? 마츠시로에서 산 거야, 그 기념품』
『시치미 떼어도 소용없어. 너무 깊게 관여하면 다쳐. 이건 친구로서의 충고.』
『진지하게 들어두지』
…………
조금 전 자리를 비웠을 때 내 가방에 걸어둔 도청기로 들은 대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카지씨가 스파이인 것은 틀림이 없다. 상층부가 그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카지씨가 죽었다면, 원인은 아마 그것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까.
아니, 물론 살려야 한다. 내게 있어서도 카지씨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애인이었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찍이, 쓰러져 우는 그녀에게, 아이에 불과한 나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것으로 위로해줄 수 있다면, 닳지도 않는 몸 따위 얼마든지 주었어도 되었을 텐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나의 비겁함이 새삼스럽게 메스껍다.
그래서 그녀의 몸을 빌려 쓰고 있는 지금, 그녀 대신 전력을 다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색 원피스는 상냥한 오렌지빛 색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맞춤 볼레로는 깊이 있는 목적색.
하나타치바나라고 불리는 전통배색을 내 나름대로 어레인지한 것이다.
은색 로자리오는 이 코디에 어울리지 않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이 십자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리도 없고.
몸에 걸친 향기는 카부치와 월도의 블렌드. 아야나미가 오키나와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향주머니는 꼭 이 코디네이터를 위해서 주문한 것 같다.
「카지…군. ……나, 변했어?」
귀고리 때문에 귀가 아프지만, 그것도 참자.
「예뻐졌네」
추천받은 대로 사도마저 죽인다는 이명을 가진 칵테일을 남김없이 비운 것은, 각오했기 때문이다.
「……너는 변하지 않았어. 갈팡질팡 흔들리다가, 언제라도 없어져 버릴 것 같애」
그녀가 할 수 없었던 것을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미사토씨가 몰랐던 결말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 어드밴티지가 될 것이다.
「……술, 좋아하지 않는 거 알고 있었어? 달콤한 걸로 추천해 줘서 고마워」
조금 전 자리를 비운 진짜 이유. 1층의 프런트까지 왕복했기 때문.
「……나, 너의 닻이 되어줄 수 있을까?」
가까스로 해낸 13년 만의 각오.
카드키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계속 つづく
©️ジョニー満 |
죠니 미치루님이 이 이야기의 일러스트를 그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파자마 차림의 아야나미가 최고로 귀엽습니다. d(>_<))
트위터에서 드래곤플라이(@dragonfly_lynce)를 검색해 보세요.
©️ジョニー満 |
죠니 미치루님이 미사토의 승부복장 일러스트를 그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옷 자체는 너무 잘 어울리는데, 결사의 각오를 한 표정 때문에 분위기를 다 망쳐버리는 미사토(내용물 신지)가 귀엽습니다. d(>_<))
트위터에서 드래곤플라이(@dragonfly_lynce)를 검색해 보세요.
2006.09.19 PUBLISHED
2006.11.02 REVISED
2011.04.01 TRANSLATE
2021.05.20 ILLUSTRATED
2021.09.24 TRANSLATION REVISED
2021.10.16 ILLUSTRATED
원문 シンジのシンジによるシンジのための補完 第拾壱話
저자 코멘터리 (2020.05.05)
⚠️스포일러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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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야나미는 뜨거운 것을 못 먹는 고양이 혀 체질이었다.
- 태연히 라면을 먹었던 원작에 그런 설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그 생활 환경에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추가한 설정.
- 부부다완 같은 대소 한 쌍으로 …… 엉뚱한 억측을 불러온 모양이다.
- 역자: 부부다완이란 큰 것은 남편용, 작은 것은 아내용인 한 세트의 밥공기 내지 찻종. 아스카가 이것을 삼으로써 억측이 발생했다는 것은, 누군가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반에 소문이 돌았다는 뜻.
-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스위츠를 눈앞에서 만들어 주면, 아이들은 마법을 본 것처럼 동경하는 것이다.
-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보육원과 소아병동에서의 필드워크에 참여, 거기서 보육사에게 배운 것이라는 설정.
- 그런 일은 멜키오르 쪽이 어울리는데. 라고 불평하는 리츠코씨
- 역자: 미사토는 굳이 「어머니로서의 인격」인 발타자르를 쓰게 해 달라고 한 것이고, 리츠코는 수치를 다루는 영양관리 같은 일은 「과학자로서의 인격」인 멜키오르 쪽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 「여자로서의 인격」인 카스퍼보다야 발타자르가 낫다는 것은 역시 어머니 나오코에 대한 패드립.
- 화를 낼 줄 알았던 마야씨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신기했지만.
- 리츠코가 한 입 먹곤 「어머, 맛있네」라고 말했으니까.
- 「너희들이 파일럿이라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파일럿이기 때문에, 기왕 할 거면 엄밀함이 요구되는 것 뿐이야」
- 이 대사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 다음 문장으로 보충을 추가했다.
- 테이블 위에 올려둔 병에서 캡슐렛을 골라내서 꺼내더니, 물도 없이 삼켰다. 통째로 삼키기는 펭귄의 특기다.
- 원작에 이런 묘사는 없지만, 실험동물이었던 펜펜은 약물에 절어 있을 것이다.
- 행복하게 눈을 가늘게 뜬 온천펭귄이 기쁜 듯이 아스카의 손에 부리를 비벼댔다.
- 무리를 짓는 동물은 자기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동료에게 돌려받는 습성이 있다. 이후 펜펜이 아스카의 입가를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어서 소동이 벌어진다는 난장판 전개도 구상안에 있었다.
- 노골적인 패스워드.
- 역자: kazoku=카조쿠, 즉 「가족」.
- 일년이 언제나 여름 …… 온 세상에 아무 일도 없어라.
- 네르프 로고 아래에 적혀 있는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의 원전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를 패러디한 것.
- 역자: 원시는 이렇다.
일년 중 봄날, / 하루 중 아침, / 아침 중 일곱 시, / 산비탈에 이슬이 진주처럼 맺히고, / 종달새는 날개치며 날고, /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를 기는데, / 하느님은 천국에 계시니— / 온 세상이 무사하여라!
아야나미(綾波)는 비단처럼 아름다운 파도를 뜻하며, 아스카(アスカ)의 한자 표기법 가운데는 나는 새[飛鳥]가 있다. - 아버지의 진의는 아야나미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역자: TVA 15화에서, 겐도는 유이의 무덤에는 시체가 없으며, 사진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했다.
- 「내 아버지는, 자기 연구 속, 꿈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어 …… 나는 알 수 없게 되었지. 아버지를 미워했는지, 좋아했는지」
- 14년 전에 들었던 미사토의 원래 말을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 대사를 최대한 사용한다는 것이 2차소설로서의 약속이고, 또한 본인에게 빙의하고 있는 만큼 일치율이 높다는 것으로 해 두자.
- 연색 손수건은 다름 아닌 그가 준 승진 축하 선물이다.
- 연색이란 옅은 보라색.
- 누가 또 맹장지에 노크하는 바보짓을.
- 즉 미사토 방과 신지 방이 맹장지로 된 일본식 방(화실), 아스카와 레이는 서양식 방(양실).
- 역자: 맹장지란 종이를 양면에 두껍게 바른 미닫이문. 여기 노크하면 똑똑이 아닌 펑펑 소리가 날 것.
- 아야나미 자신도 이 파자마처럼 여러 색을 거듭해준다면 기쁠텐데.
- 아야나미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이 작품에서 아야나미에 대한 메세지까지 담아서 고안했다.
- 쪽빛을 물들인 그러데이션은 …… 거농이라는 전통염색법을 현대풍으로 어레인지한 것이다.
- 역자: 「거농」이란 아래로 갈수록 짙어지는 선염법 전통염색법. 여기서 언급된 색깔들은 모두 일본의 전통색이다. 미사토의 색깔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주석이나 괄호로 몰입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이 색이 무슨 색인지를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다가, 텍스트에 색상을 지정해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 「남자가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그 아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상대가 자신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 과거의 자신의 심리동기가 그랬다는 분석이 아니라, 아야나미가 장래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유도.
- 때려 버렸어. 라며 보는 것은 오른손바닥.
- ID카드 전달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동거하고 있기에 행동반경이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기동시험 전의 따귀 이벤트는 발생했다.
- 그녀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 위치에 꽂혀 있던 자양화의 색깔
- 역자: 자양화란 수국의 다른 이름들 중 하나이고, 일본에서는 수국을 자양화라고 부른다. 수국이라고 옮겨야 하나 생각했지만, dragonfly 작가의 에바 팬픽群이 『자양화 유니버스』라고 지칭되기에 그냥 자양화라고 음독했다. 『수국 유니버스』는 뭔가 부족한 느낌.
- 셋이서만 호텔 최상층 라운지로 3차를 왔다.
- 원작에서는 아마 지오프론트 천정부 빌딩의 최하층 라운지였으리라 생각한다. 당연히 네르프 관계자밖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호텔 같은 민간시설은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 역자: 2015년 기준 가이드북을 보면 세 사람이 간 바는 모토하코네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제3신동경시가 된 센고쿠하라를 남쪽에서 접한다. 제3신동경 외부인 모토하코네에서 북쪽의 제3신동경의 야경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저자는 아시노호 수면에 비쳐 보이는 제3신동경시 야경을 지오프론트 천정에 매달린 수납빌딩의 불빛으로 착각했다.
- TOKYO-3 잔에 입을 댄다.
- 이런 것이 있어도 좋을 법하다 싶어서 제3신동경시를 본뜬 오리지널 칵테일을 생각했다. 네르프 사관 라운지였다면 네르프 마크라던가 그려줬을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상상의 산물이라, 이 레시피로 2층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지 여부는 불명.
- 강한 알코올을 달콤함과 고소함으로 가린, 확실히 제3신동경시 같은 칵테일이다.
- 빙의자의 정신활동은 육체의 뇌기능에 크게 의존하지 않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다만 육체 자체는 취하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의 괴리가 심해져 불쾌감・불안감을 수반한다. 미사토는 그런 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음주는 불쾌한 것이라고만 인식하고 있다.
- 그녀가 그렇게 좋아하는 맥주를 먹지 않게 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그것뿐이 아닐까.
- 이것은 착각. 원작에서 미사토는 카지 사후에도 맥주를 마셨다.
-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 원작에서도 미사토가 가운데 자리였는데, 혹시 원작에서도 그런 의미를 전달한 것이 아니었을까?
- 쓰러져 우는 그녀에게, 아이에 불과한 나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것으로 위로해줄 수 있다면, 닳지도 않는 몸 따위 얼마든지 주었어도 되었을 텐데.
- 이것도 착각. 미사토가 쓰러져 운 것은 카지 사후(TVA 21화)고 미사토가 신지에게 접촉했던 것은 아야나미 자폭 이후(TVA 23화) 이야기. 미사토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후회로 인해 이런 착각을 많이 한다.
- 소비색 원피스는 상냥한 오렌지빛 색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 원작에서는 대사로만 등장했던 것. 영양관리 소프트웨어로 체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입을 수 있다.
- 몸에 걸친 향기는 카부치와 월도의 블렌드. 아야나미가 오키나와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향주머니는 꼭 이 코디네이터를 위해서 주문한 것 같다.
- 오키나와의 전통향. 카부치는 시트러스계, 월도는 그린그래스계 향.
- 귀고리 때문에 귀가 아프지만, 그것도 참자.
- 이 미사토는 지금까지 피어스 구멍을 뚫지 않았다.
- 「……술, 좋아하지 않는 거 알고 있었어? 달콤한 걸로 추천해 줘서 고마워」
- 이 미사토는 술을 마시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추천을 부탁받은 카지는 마시기 쉬운 것을 우선으로 몇 가지 후보를 골라 주었다. 그 가운데 보드카 기반의 강한 칵테일이 있음을 알아보고 미사토가 그것을 골랐다.
- 「……나, 너의 닻이 되어줄 수 있을까?」
- 여기서 「닻」은 물론 「이카리」라고 읽지만, 미사토 자신은 딱히 의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오.. 분량이..-ㅠ-;
답글삭제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근데. .마지막. 대사...
신지 녀석... 남자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인가..